[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5) 백록담에 안긴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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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5) 백록담에 안긴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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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정 모르는 친구 셋이 여행을 떠났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였다. 대학생이던 친구 오빠를 든든한 지킴이 삼아서. 누가, 어떻게 그리 대담한 계획을 했는지 가물거리지만, 같이 갔던 현숙이와 애순이는 자꾸 나였다고 우겨댔다. 가끔 쓸데없이 용감한 걸 보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응급용이랍시고 배낭 겉주머니에 건성건성 의약품 몇 개를 챙겨 넣었었다. 송정역에서 기차를 탈 때였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는 걸 보고 배낭을 힘껏 둘러매려는 순간, 삐죽이 나와 있던 핀셋이 발목 위 다리를 긁어 버린 것. 바지를 적시며 피가 솟아올랐다. 깜짝 놀랐지만, 손수건으로 둘둘 묶고는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목포에 내렸다. 열 바늘이었던가 생살을 꿰맸다. 그 상태로 여행 가면 안 된다는 의사의 권유는 듣는 둥 마는 둥 항구로 달려갔다.

크루즈가 운행되기 훨씬 전, 제주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걸리는 시간도 그러려니와 높은 파도를 견디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작은 배에 부대끼며 바다를 건너야만 했다. 잠들면 멀미하지 않더라는 말을 듣고 선실 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멀미약까지 먹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울렁대는 바다의 근육질이 등짝을 훑어갈 때마다 뱃속은 요동쳤다. 추자도쯤이었을까. 파도에 얹힌 배가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속절없이 미끄러지고 구르다 보니 친구는 간 데가 없고 웬 청년 옆구리를 붙들고 있었으니. 요지경 같은 항해였다.

처음 보는 제주는 신기했다. 검푸르고 무성한 숲이 그렇고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가 낯설었다. 말씨도 사뭇 달랐다. 살갗을 덮치는 습하고 후끈한 공기도 두툼했다. 걷다가 지치면 바닷가에 나란히 앉았다. 검은 화산석 위로 끝도 없이 달려와 부서지는 파도는 가난한 여행의 피로를 위로해 주었다. 땡볕이 정수리를 달구는 한여름, 제주 지리도 모르면서 무거운 배낭을 멘 채 어떻게 이동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미스터리다. 어찌 되었든, 어디엔가 텐트를 치고 코펠에 밥을 지어 먹으며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다. 언젠가 백두산 천지에 가볼 날이 있기를 꿈꾸며 백록담 풀밭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세고 싶었다. 성판악에서 대장정의 첫발을 뗄 때는 활기에 넘쳤다. 얼마 가지 않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쏟아지는 땀방울이 목덜미에 흘렀다. 목이 말랐다. 어느 지점부터는 물 마실 곳이 없을 거라 했건만, 배낭 옆구리에 꽂아둔 물병은 금세 텅 비었다. 고꾸라질 듯 오르는 우리에게 내려오던 등산객들은 남은 물병을 건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껌을 주기도 했는데 입에 넣자 씹히는 게 아니라 녹아 없어지는 희한한 경험도 했다.

중간에 쉴 때는 다리를 풀어헤쳐 상처를 소독하곤 했다. 절반이나 올랐을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돌아서세요!” 소리치며 지나쳐갔다. 무언가를 어깨에 메고 비척비척 내려가는 게 보였다. 몇 시간이 걸렸는지 해거름에야 겨우 정상 부근에 다다랐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힘겹게 올라왔던 한라산을 굽어보았다. 바람결에 하얀 골안개가 뭉실뭉실 몰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길과 숲을 덮으며 사진에서 보던 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홀했다. 그 위에 벌렁 누워도 받아줄 것 같았다.

남은 힘을 쥐어짜며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어서자, 모습을 드러낸 백록담이 석양빛에 빛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호수는 작았으나 깊어 보였다. 가파른 주변은 거대한 바위가 솟아있었고 비스듬한 경사면은 나무와 풀숲으로 푸르렀다. 한라산 정상이라니, 백록담이 눈앞에 있다니, 벅찼다.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 만세! 만세!”를 외치고는 평평한 곳을 찾아 내려갔다.

많은 이들이 도착해 여기저기 텐트를 치고 있었다. 한쪽에선 청년들이 장작을 쌓느라 부산했다. 한라산의 거친 속살을 딛고 상처를 견디며 오르던 여정이 힘들었던지 배낭을 벗어 던지자마자 풀밭에 쓰러져버렸다. 백록담이 품어줬을까, 밤새도록 캠프파이어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와글바글 떠드는 속에서도 비단이불에 누운 듯 아늑했다.

백록담에 생기 넘치는 아침이 밝았다. 바위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이 신비로웠다. 엊저녁 씻어 엎어둔 코펠을 꺼내 다시 백록담 물을 퍼다 밥을 지었다. 숲이, 물빛이, 계곡을 휘돌아온 바람이 거들어주어 그런지 풀밭에 둘러앉아 먹는 아침은 별미였다. 산 위에서 짓는 밥이라 설익었으련만, 한라산이 내어주는 풍경을 반찬 삼아 성찬을 즐겼다,

설거지하러 주섬주섬 그릇을 챙겨 백록담으로 갔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얼렁설렁 짐을 꾸려 메고 정신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좁은 오솔길, 나무뿌리에 발부리를 채이며 숨차도록 달렸다. 관음사 계곡으로 접어들어서야 얕은 물길이 흐르는 곳에 다시 짐을 풀었다. 그릇을 씻고, 얼굴을 씻고, 손발을 씻고, 목을 가시기를 여러 번. 놀란 가슴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제 올라올 때 얼핏 보았던 이가 백록담에서 헤엄치다 허우적거리자, 오늘의 그 사람이 구하려 뛰어들었다가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했다. 관음사에서 내려오는 풀밭 사이 길을 말없이 걸어 내려왔다.

큰길에 들어서자, 수박밭이 드문드문 보였다. 농부들은 익은 수박을 골라 따느라 바빴다. 놀란 가슴에 정신이 혼미한 데다 입안은 가뭄에 말라버린 논바닥 같았다. 달콤한 과즙이 줄줄 흐르는 수박 한 조각이 간절했다. 한 입 베어 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차비 몇 푼 달랑 남아있었으니, 수박밭을 돌아보며 주머니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거지꼴로 송정역에 내렸다. 왼쪽 복숭아뼈 부근에 붕대를 감은 채로 후줄근한 패잔병처럼 대문에 들어섰다. 땡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양 팔에서는 스멀스멀 하얀 껍질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주에 가기 전, 친구들과 합세해 아버지께 온갖 아양을 떨며 허락해 달라 졸랐었다. 아버지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치셨고, 나는 허락받았다고 여기고 들떠서 떠나버린 것. 벼르셨던지 나를 보는 아버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이내 뒤꼍에서 꺾어온 싸릿대로 종아리를 내리치셨다. 난생처음 호되게 매를 맞은 날이었다.

낯선 곳에의 호기심으로 떠난 용감무쌍했던 여행, 희미하게 남아있는 상처가 그때의 풋풋함을 일러준다. 원효대사라면 크게 깨달았을 일을 겪고도 아무런 각성도 없는 나였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 하나 몸에 새겨놓은 것은, 어쩌면 즐거운 일이 아닐런가.

나흘간의 제주 나들이, 그리 무모하게 떠나지 않았다면, 백록담 품에 담쏙 안겼던 행복한 하룻밤은 내 인생에 없었으리라. <수필가 배공순>

한라산 백록담 ‘나무위키.에서 퍼옴
한라산 백록담 ‘나무위키.에서 퍼옴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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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이 2024-06-24 11:28:26 | 220.***.***.133
가녀린 소녀 다리에 회초리라니,
놀 때는 좋았으나 너무 아팠겠어요.
그래도, 아버지의 그 사랑이 그립기도 하시겠어요.

희야 2024-06-24 11:25:56 | 220.***.***.133
그 시절 친구 셋이면 천하무적~~ 삼총사라 깔깔거리며 쏘다녔던 기억은 하나쯤 다들
있겠지만, 그래도 제주라니, 놀랄 일이네요.
그래서 제주와 좋은 인연이 이어졌나 싶네요!

미슉 2024-06-21 19:50:45 | 218.***.***.81
와, 선생님은 고등학교때도 그 먼길을 나서다니 용감했네요~~^^

백두대간 2024-06-21 16:21:14 | 223.***.***.176
철없던 시절의 추억이 생생하게 대신 전해집니다.
상처와 멀미, 백록담의 사건등 잊을 수 없는 추억이네요.
젊었을 때 좋은 추억을 만들고 겨험한 일이 부럽습니다.
건강하게 좋은 글 계속 내놓으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