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와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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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와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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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용식 /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장  
부용식 /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장
부용식 /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장

제주시내 어느 곳에서든 북쪽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날이 좋으면 여서도, 청산도, 소안도, 보길도 등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성산 일출봉에서도 멀리 거문도가 보인다.
 
제주 사람들의 물질은 아주 옛날 제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원시 어로 활동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제주도 해안가에 원담을 쌓아 물고기를 잡았을 것이고 얕은 물속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며 생계를 이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테우’와 같은 해상 운송 수단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제주 해안가를 벗어나 ‘가시거리(可視距離)’ 안에 있는 남해의 여러 작은 섬들에 대한 동경과 그 해역에서 어로 활동 또한 당연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섬’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바다를 매개로 제주 연안과 남해 일대를 삶의 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시야에 들어오는 <가시거리>는 곧 생활영역을 뜻한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생각도 할 수 없으며, 어떠한 행위로 이어질 수도 없다. 제주사람들은 특히, 제주여성인 해녀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자그마한 섬을 보며 인간의 무한한 애착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발휘하였으니, 그 진가는 ‘독도 원정 물질’에서 드러난다.
 
독도는 우리의 영토 ‘울릉도’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고, <가시거리> 안에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영원한 생활영역이었다. 이러한 생활영역 안에서 경제활동을 주도한 제주해녀들이 1950~1960년대에는 매해 수 십명씩 독도 물질을 갔으니 제주사람들이 독도를 생활 영역으로서 실효적 지배를 한 셈이다.
 
1969년에는 제주의 동촌과 서촌의 해녀들 30여명이 독도에서 공동 물질을 하며 노동의 힘겨움을 서로 달래가며 어울리고 노래하였으니 그야말로 독도는 제주해녀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구좌 행원리 출신인 고순자 해녀는 1970년대 이후로 20여년간 독도물질과 잠수기업을 하며 1984년과 1987년에 두 번에 걸쳐 독도에 주민등록을 이전하여 공식적으로 독도 주민이 되기도 하였다. 1983년 독도 서도의 덕골에서 식수원 근원지 물골로 가는 998계단 완성에  일조한 사람이 또 제주해녀가 아닌가?

 그래서 ‘제주해녀’는 가슴 뭉클한 제주역사다. <부용식 /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장>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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