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2022년, 어느 곳에서도 안녕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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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2022년, 어느 곳에서도 안녕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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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장애계를 관통하는 질문을 질문하며

지난 12월 3일은 <세계 장애인의 날>이었다. 이에 맞추어 '제주장애인체육발전포럼'에서는 '당사자 중심이 되는 제주 장애인 체육 환경 조성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제주장애인체육인 인권의 밤”을 마련했는데 더구나 지난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었다. 시일이 지나 우리나라가 16강 진출이 확정되어 월드컵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19일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축구의 신이라 칭해지는 역사적 한 획이 그어지는 인물이 탄생하면서 체육계에 대한 관심도 초고조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던 한달도 안 되는 사이, 내내 서울에서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위해 삭발식을 감행하는 시위를 이어 나가고 서울시는 무정차라는 극단적 행정적 조처를 했다. 세계 장애인의 날과 세계 인권의 날이 지나가고 세계적인 축구선수들의 인권 투쟁의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자꾸만 다른 이슈들 속으로 묻혀갔다.

다시 지난 3일 토론회로 돌아가 보자. 장애인체육인 프로 당사자는 물론, 관련 행정가, 관련 법조인, 관련 교수 및 지도자까지 참여하여 제주를 넘어 전국 장애인체육계의 현실을 더듬었다. 날 선 논쟁이 오가며 과거와 현실을 냉정히 돌아보고 앞으로 장애인체육계의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생각 외로 심각하게 제기된 사안은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 당사자성/주의’의 차이와 그 간극을 넘어서야 가능한, 어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들이었다. 장애인 당사자성/주의는 당사자만이 가진 것인가, 비장애인은 그 당사자성을 공유하고 체화할 수 없는가.

서울은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 권리조차 쉽게 행사하기 어려운 현실에 질문을 던지면서 이 나라에 거주하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이동의 자유가 침해되는 현실을 알리고, 장애인의 인권이 비장애인의 인권과 차별되는 현장을 드러내고자 했다. 삭발식이 진행될 때,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될 때, 거기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없었다. 누구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삭발을 감행하고 누구나 차별 현장을 고발하기 위해서 동행하였다. 그 장면을 무심코 보면 당사자성이라는 것이 무색하여 이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재는 장애인체육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사치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둘로 나뉘어서 다루어질 사항이 절대 아니다. 앞선 토론회에서도 언급되었듯, 장애인 당사자성/주의는 비장애인도 체화하여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치 성소수자 운동의 앨라이((영어: ally)는 성소수자 차별에 대해 차별당하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그 차별을 반대한다는 뜻에서 서로에 대한 연대를 표현하는 단어이다.-<페미위키> 참조)와 유사하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비장애인의 이동권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동의 어려움이 있는 아동, 노인, 질병인, 일시적 장애를 지닌 몸-이를테면 다리를 다친 사람- 모두에게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는 길이다. 장애계에서 끊임없이 <유니버설디자인> 주장해온 실천적 걸음 중 하나가 바로 서울에서 진행된 이동권 투쟁이다. 이 이동권 투쟁은 바로 장애인의 건강권과 연결된다.

코로나 시국을 거치면서 갇혀 지내던 사람들은 운동의 질과 양이 저하되어 건강이 나빠졌다고들 호소하고는 했다. 이제는 조금씩 규제가 풀리면서 비장애인들은 다시 다양한 체육시설에서 쉽게 체육활동을 시작하고 자신의 건강을 돌볼 뿐 아니라 활동의 기쁨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장애인을 위한 전문 체육시설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심지어 제주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체육관인 반다비체육관 설립마저, 평창동계 올림픽 이후 지금까지, 여러 이유로 난항 끝에 2023년 12월로 유예되었다. 장애인이 사설로 체육시설을 이용하고 싶어도 길 자체가, 대중교통이, 장애인콜택시가, 엘리베이터 등의 문제로 이동 자체가 어렵다. 시설에 들어서도 장애인을 위한 도구가 없거나 장애인을 지도할 지도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냥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이 사회에서 장애인의 생존은 일상다반사가 불편하고 그에 적응하다 보면 몸은 고통을 부르는데 주변 환경은 여전히, 건강을 해치게 방치하고만 있다.

이렇듯 비장애인보다 더 취약한 건강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비장애인보다 더 취약한 지원-지원이라 말할 수조차 있을까?-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간다. ‘전문장애인체육인’의 경우도 열악하지만-가령 전국 최고의 선수들이 활약하는 제주휠체어농구단의 경우도 연습할 공간이 없어 난처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연습하고 있던 탐라장애인복지관의 시설은 낡고 위험해서 다칠 각오를 하면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생활장애인체육인’의 경우는 더욱 열악하고 일상적으로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체육을 하는 장애인의 경우는 지원 자체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장애인도 레저스포츠를 즐길 권리가 있고 장애인도 체육활동을 통해 행복할 권리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근본 원인이 장애인 이동권조차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서 장애인의 생존을 시혜적으로 바라보는 행정 편의적 지원만으로 실현할 수 있는 일인가.

더군다나 장애인의 이동권과 체육권은 모두 장애인의 생존과 직결돼 있다. 극단적인 예로 지난여름 서울지역 폭우로 반지하에서 사망한 장애인 가족의 경우를 기억하자. 대다수의 장애인이 처한 빈곤의 현실로 빚어진 주거권, 이동권, 체육권 등 총체적 문제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만이 자유로운 공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발달장애라는 이유로, 여러 신체장애라는 이유로, 정신장애라는 이유로 비장애인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내몰린다. 그러니 장애인 누군가는 비만으로 누군가는 영양실조로 양극단을 이루는 비율이 비장애인보다 높다는 것은 상상이 가능하다. 운동할 공간이 없는데, 운동할 기구가 없는데, 운동하기 위해 이동조차 불가능한데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갖고 운동을 하고 체육활동을 하여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장애를 가지는 몸이 이미 아픈 몸이 아닌지 의문을 갖는다면 단언컨대 당신은 장애인혐오를 내재화한 사람이다. 장애인은 질병을 앓는 게 아니다. 장애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고 장애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이라는 개념은 폐기된 지 오래되었다. 장애는 사회가 개인을 자유로운 몸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막아놓은 현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 구조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것, 그래서 모두가 자유로운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유니버설 디자인>이다. 이것을 주장한 지도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그런데 왜 아직도 장애인들은 이동권 투쟁을 해야 하고 장애인의 체육권을 주장하면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는가.

올 한해를 돌아보면 무참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이 너무나 많아서, 살아 목숨을 걸고 투사가 되어야 하는 현실 면면이 변함이 없어서, 이 사회는 왜 이렇게 고통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나 싶어서, 못내 슬프다. 그러나 굳이 2022년, 우리나라의 중심 서울에서 가장 멀리 제주까지 관통한 하나의 주제를 떠올리자면 나는 “장애계의 투쟁’이라 말하겠다. 서울은 장애인 모두의 이동권 투쟁으로, 제주는 장애인 체육인 모두의 인권 투쟁으로 한해를 꿰뚫어 이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변방의 목소리든 중앙의 목소리든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라 거센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묻히곤 한다. 우리도 사람이니까,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보장하라는 걸 두고, 소위 구조적으로 불가능한데도 흔히들 쉽게 말하는 언어 ‘역차별’까지 들먹이면서 찍어누르는 시민들의 이기심도 서글프지만, 그 시민들의 이기심을 부추기며 자본적 이득을 얻고 웃는 자는 누구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당사자 인권활동가인 변재원은 자신의 SNS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그의 허락을 받아 일부를 여기에 올리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장애인에게 체육이 필요한 이유는 체지방 감소나 근육량 증가가 아니라, 내 몸 여건상 할 수 없다고 단념했던 것들을 “정말 할 수 없었던 걸까?”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정선/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 소수자 활동가 및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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