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13) 어머니,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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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13) 어머니,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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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서너 달이 지났습니다. 오늘도 가까운 지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첼리스트 재크린 뒤프레의 연주를 들어봅니다. 굵은 중저음, 인간의 목소리를 많이 닮았다는 첼로로 들려주는 브르호의 콜 니드라이. 신께 나도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보따리를 풀어야 내 마음이 좀 시원할 것 같습니다.

2022년 5월 16일 아침, 딸이 외할머니를 보려고 반차를 냈습니다. 요양원에 도착하기 십 분 전, 외할머니의 운명 소식을 듣고 울먹이며 내게 전화를 했습니다. 몇 달 전부터 어머니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맞닥뜨린 현실에 어찌해야 하는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삼복더위가 오려면 서너 달이 훌쩍 지나야 하건만, 어머니는 벌써 삼베옷을 꺼내 입으셨더군요. 뭐가 그리도 바쁘셨을까요. 여느 때는 귀찮다고 거르던 분단장이 오늘따라 유난히 짙어 보였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가요? 나리꽃의 꽃잎을 오려 입술에 붙여 놓은 듯, 어머니의 얼굴은 생기 있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막내딸인 내가 나리꽃을 좋아하는지, 진즉 알고 계셨던 어머니. 장의사가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 순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머뭇거리다 누구한테도 들리지 않게 읊조렸습니다. 그 먼 길을 가시는데 외롭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요.

어머니는 요양원에 가시기 한 달 전부터 식사 때마다 음식을 남기곤 했어요. 그때마다 입맛이 없어도 잘 드셔야 자식들 곁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다고 어머니께 으름장을 놓곤 했지요. 사레들리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괜스레 어리광을 부리는 거라 혼자 생각하며 지나치곤 했지요. 주의 깊게 눈 녹여 보지 못한 탓에 음식물이 한 쪽 폐에 쌓이는 것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그리도 무심한 딸이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급기야 어머니는 호흡곤란으로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유동식만 찾는지, 잦은 기침으로 매일 밤 잠 못 드셨는지, 답답하다며 가슴을 왜 치는지도 몰랐던 딸이었으니까요.

입관을 마치고 오 남매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곤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열었습니다. 상자 속 안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지요. 뚜껑을 여는 순간, 성난 고양이 발톱처럼 서로를 할퀴기 시작했습니다. 원망, 미움, 후회, 비난으로 상자 속은 흙탕물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맑고, 순수한 오롯이 어머니만 생각했던 고마움, 미안함은 전혀 찾을 볼 수 없었지요. 형제 중, 어느 한 사람도 어머니를 모신 동생의 어깨를 토닥여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주절주절 누구는 자기 집에서 모실 걸 잘못했다고 했고, 누구는 요양원을 다른 곳으로 옮길 걸 그랬다고, 누구는 섬에 거주하고 있어 못 모신다고, 누구는 비즈니스 때문에 바쁘다고 말한 것을 후회한다며 떠들었습니다. 모두 다칠까 겁을 내며 비겁하게 방어벽만 치고 있었지요. 정작 어머니는 세 평짜리 병실 한구석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자식들 하나하나가 가해자였습니다. 어머니를 두고 우리는 미련하기 짝이 없었지요. 오 남매의 밤이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채 깊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이북이 고향인 어머니는 오 남매의 맏이였습니다. 6·25사변 이후 외할아버지가 경주에 정착하면서 간장 공장을 운영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고생을 모르고 사셨다고 생전에 말씀하곤 했지요. 그런 어머니가 기침병으로 퇴역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으니 그 세월이 어찌 편하기만 하셨을까요. 만년 군인이셨던 아버지가 세상의 이치를 알 리 만무였지요. 그러니 친구에게, 지인에게 마음을 다치는 일이 다반사였답니다. 아버지가 상도동 일대의 땅을 사 모았지만, 지병으로 야금야금 땅따먹기 놀이로 잃어가듯, 아버지의 병원비와 약값으로 조금씩 줄어들었으니까요. 손아귀에 쥔 모래알처럼 그 많았던 땅이 솔솔 빠지고 결국 시유지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집만 남았지요. 그 이후,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 뒷바라지와 꼬장꼬장한 아버지 병시중에 삼십 년 동안 단 하루도 당신을 위해 살지 못하셨던 어머니.

오래전, 어머니는 뇌수술로 미각과 후각을 잃었지만, 기억만은 또렷했습니다. 어느 해 어버이날. “너는 왜 혼자야? 애들하고 아범은 어쩌고?” 그리 말씀하며, 지금도 아범하고 헤어지고 싶으냐고 물으셨죠. 잘살고 있는 줄 알았던 내가 둘째를 낳고 한동안 병자처럼 살 때, 딱히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채 그냥 사는 게 힘들다며 집을 나갔을 때가 있었지요. 그때 안 된다고 안 하시고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했던 어머니.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한다고 하며 참지 말라던 어머니.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어느 자식보다 가장 아픈 손가락이던 나를 벌건 실핏줄의 눈으로 말없이 바라만 보던 어머니. 방황하는 내가 눈에 밟혀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요. 내 대답을 조급해하시던 어머니께 잊고 살고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몇 년 전부터 혼자 살아보겠다고 제주로 내려간 나를 걱정하며 밤마다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눈물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왜 내가 모르겠어요. 어머니를 아버지 옆으로 보내드리고 참았던 속울음을 꺼내 소리 내어 울어봅니다. 재크린 뒤프레가 켜는 첼로 소리에, 음률에 내 울음을 보태봅니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쓸쓸하고 몽환적인 부르흐의 곡에 내 마음을 실었습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보내셨다는 말을 이제야 실감합니다. 구멍 난 것처럼 텅 비어 버린 마음, 어머니의 자리가 유난히도 시리는 오늘입니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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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2022-09-02 11:40:22 | 112.***.***.220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건 왜일까요 살아계시든 돌아가시든 어머니는 늘 우리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계시기 때문이겠죠 어머니를 세상에서 보내드리는 일은 나의 가슴속을 다 파헤쳐 가장 깊은 뿌리를 뽑아내는 것처럼 아프죠 하지만 어머니는 떠나신게 아니라 계속 그 곳에 계십니다 단지 다른 모습으로요 좋은 거름이 되어 내 안에 더 깊이 살고 계신거예요 따뜻한 어머니의 품처럼 나 자신을 꼬옥 안아주세요 사랑합니다

그리움 2022-09-02 16:47:23 | 110.***.***.218
글을 읽다가 한숨을 내쉬다가 눈물을 글썽이다거 먼산을 보다가 빗소리에 귀기굴이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리운 어머니를

살살이 2022-09-13 17:43:59 | 211.***.***.189
가슴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더 늦기 전에 마음만으로가 아닌 행동으로 엄마에게 살갑게 대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