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굴 발굴 30년'...4.3 유족들이 증언하는 참혹했던 그날
상태바
'다랑쉬굴 발굴 30년'...4.3 유족들이 증언하는 참혹했던 그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4.3연구소, '다랑쉬굴 학살' 증언본풀이마당 개최
유족 3인 눈물겨운 증언..."영문도 모른 채 죽은 오빠, 유골도 안남아"
ⓒ헤드라인제주
제74주년 제주4.3을 맞아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마당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가 열렸다. ⓒ헤드라인제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오빠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다랑쉬굴 앞 칠성판에 놓인 유해들을 봤지만...뼛가루 한 줌을 남기지 못했어. 오빠는 나를 알아볼 텐데, 나는 누가 오빠인지 몰랐어"

함복순 어르신은 끝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제주4.3 당시 다랑쉬굴에서 영문도 모르고 잔혹하게 학살당한 친오빠 한명립의 사연을 증언하면서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도 했다.   

제74주년 제주4.3을 맞아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마당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에서는, 4.3 당시 잔혹한 피란민 학살사건의 상징적 장소로 꼽히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에서 혈육을 잃은 유족들의 안타깝고 눈물겨운 사연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날 증언본풀이마당은 개회식, 오페라 순이삼촌에 출연한 강정아 소프라노의 '함께하는 노래', 함복순 어르신의 증언, 4.3희생자 유족인 김정순 씨의 시 낭독, 그리고 고관선, 이공수 어르신의 증언, 폐회 순으로 진행됐다. 

전날부터 이른 아침까지 내린 비의 탓인지, 차분하면서도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이날 본풀이마당에서는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 함복순(1943년생), 고관선(1947년생), 이공수(1937년생) 등 3인이 나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참혹했던 4.3의 기억들을 풀어냈다.

유족들은 74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는 생각에 잠겨 잠시 멈칫하기도, 목소리가 다소 떨리기도,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뜨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용기를 내며 증언을 이어갔다.

ⓒ헤드라인제주
첫번째 증언에 나선 함복순 어르신. 다랑쉬굴에서 희생된 오빠 한명립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과의 대담 형식으로 함복순(80.구좌읍 종달리) 어르신이 먼저 증언을 시작했다. 그는 1992년 4월에 알려진 다랑쉬굴 4.3희생자 함명립(당시 20세)의 여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영문도 모르게 한밤중 사람들이 자꾸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숨어있으라고 했고, 오빠 한명립이 지붕 속에 숨어 지냈다. 

그런데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오빠가 없어졌다. 어머니는 오빠를 찾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어머니는 밥 허는 것도 잊고 아들을 찾아 여기저기 해매는 거라예. (아버지는) '어멍은 밥도 안해주고 어디 돌아만 댕겸쪄' 했는데 하루는 옛날은 들 것이 없으니 나무 두 개에 해서 들고 와서 우리집 마당에 훅허게 내버리고 가는데 (그 사람이) 아버지라수다. 완전 죽은 사람처럼 보입디다"

아버지 함평도는 세화지서에 끌려가 아들 찾아내라며 모진 구타를 당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후 어머니 채만세(당시 49세)는 도피자 가족이라며 1948년 12월 4일 상도리 연두망에서 대살당했다. 태어나 얼마 안 된 조카는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혈육 모두가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르고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허망하고 애타는 나날을 보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오던 어느 날, 함복순 어르신은 다랑쉬굴 유해 중에 오빠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시 상복을 차려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굴 앞 칠성판에 놓인 유해들을 보며 오빠는 나를 알아볼 텐데...나는 누가 오빠인지 몰랐어"라고 말했다. 뼛가루 한줌 남기지 못해 그는 수십 년을 참아온 눈물흘 흘리고 말았다고 했다. 하염없이 서러운 눈물만 흘렀다고.

그렇지만 그는 "예전에는 폭도라는 말에 그렇게 가슴이 찢어졌는데 이젠 희생자라고 해서 그나마 마음이 풀어진다"고 말했다. 

"나가 살안 댕기난 헐 말은 다 햄주만은 나 죽어벼시민 이런 말도 못헐 걸. 이젠 희생자여 허난 나가 말을 내놩 허주. 이 말을 해보지 못해수다" 

ⓒ헤드라인제주
두 번째 순서로 증언에 나선 고관선 어르신이 당시를 회상하며 사연을 전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이어 제주4.3연구소 오화선 자료실장과의 대담으로 고관선(76.구좌읍 종달리) 어르신이 두 번째 증언에 나섰다. 그도 아버지(고태원. 당시 26세)가 다랑쉬굴 희생자다. 고 어르신의 본적은 구좌읍 종달리다. 하지만 태어난 장소는 전라남도 완도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녀벌이로 완도에 있을 때 태어났다.

어머니는 완도에 남기로 하고 아버지는 제주에 들어왔을 때였다. 그때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과 군인들이 온 마을을 해집고 다녔고, 아버지 고태원은 산으로 도피했다고 했다. 

할어버지 고봉규(당시 48세), 할머니 김두천(당시 51세), 삼촌 고태정(당시 15세)은 도피자 가족으로 불렸다. 그리고 1948년 12월 21일 종달리 공회당에서 한순간에 대살당했다. 증조할아버지 고계돌(당시 66세)도 세화지서에 갇혀있다가 인근 밭에서 총살당했다. 일가족 모두가 눈 깜짝 할 사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머니와 고관선 어르신은 완도에서 살고 있을 때라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폭도 자식'이라는 멸시를 하루에도 수십 번 받았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연좌제로 인해 중학교를 마치자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터를 잡고 생활했다.

"열세 살, 열네 살 때 친구가 지너가더니만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를 데리고 오더라고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이 산폭도 빨갱이 새끼. 자손하나 있어 가지고 이런다' 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그래서 옛날 우리 할아버지랑 어머니가 이런 걸 조심하라고 한 거구나..."

시간이 흘러, 고관선 어르신은 다랑쉬굴에서 아버지 유해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즉시 바로 제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아버지의 유골은 땅에 묻을 뼛가루 한줌 남기지 못하고 바다에 뿌려졌다. 정부와 행정은 사건의 진상규명이 아닌 신속한 처리에만 급급했다.

"행정에서, 기관에서 빨리빨리만 처리해 버리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맥을 못 쓰는 겁니다. 힘이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화장을 한 거예요.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게 화장을 한 거에요...그리고 아버지한테 말했어요. '우리가 너무 늦었습니다'"

ⓒ헤드라인제주
마지막 증언에 나선 이공수 어르신.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마지막 증언에 나선 이공수(86.구좌읍 하도리) 어르신도 다랑쉬굴에서 자행된 참혹한 학살과 연관이 있다. 제주4.3연구소 김은희 연구실장과의 대담에서 그는 구좌읍 하도리 면수동에서 나고 자랐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다랑쉬굴 희생자 김진생(당시 52세), 이성란(당시 20세), 이재수(당시 10세), 이재돈(당시 19세), 김생만(당시 21세)과 친족 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독 하도리 사람들이 괴롭힘을 심하게 당했다고 증언했다. 

"소위 폭도와 연관 있다고 하면서 하도리 청년들을 많이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 사람들 그때 경찰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4.3이 발생했다. 친척들이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는데, 그때 몇몇이 간 곳이 바로 다랑쉬굴이었다. 이후 두 번 다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고 어르신은 말했다.

고 어르신은 이분들이 다랑쉬굴에서 돌아갔다는 사실을 수십 년이 지난 후 뉴스를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산에서 죽었을 거라고 막연하게 추측만 하고 있었다.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후 벌어진 일들은 애석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발굴 장례식은 이미 끝난 후여서 찾아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유골은 행정기관이 임의로 처리했다. 얽히고설킨 친인척 호적은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고 어르신은 "가족묘가 전부 양지공원에 가는데 다랑쉬굴에서 죽은 얼느은 시체가 없으니 양지공원에 갈 것이 없다"고 비통해했다. 그러면서 작은 소망 하나를 이야기했다. 

"이제라도 다랑쉬굴 부근에 비석이라도 세워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헤드라인제주
제74주년 제주4.3을 맞아 31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마당 '다랑쉬굴 발굴 30년-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가 열렸다. ⓒ헤드라인제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은 제주4.3 당시 잔혹한 피란민 학살사건의 상징적 장소로 꼽히는 곳이다.

1991년 제주4·3연구소에 의해 발견됐으며, 1992년 본격적인 발굴 작업으로 11구의 유해가 세상에 드러났는데, 이때 진행된 발굴작업이 4·3진상규명운동 과정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4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토록 찾던 가족들과 다시 상봉할 수 있었지만, 수습된 유해들은 유족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4·3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한데, 다랑쉬굴 유해 발굴 30주년을 맞은 현재, 곳곳에서 이 사건의 진상조사 추진과 더불어 다랑쉬굴 일대를 성역화 하는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지난 26일 개최된 '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 주제의 특별세미나에서는 다랑쉬굴 발굴의 의의와 향후 과제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한편, 제주4.3연구소는 지난 2002년부터 해마다 4.3증언본풀이마당을 열어왔다. 증언본풀이마당은 4.3체험자들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당으로, 마음속에 쌓여온 기억을 풀어냄으로써 자기를 치유하는 ‘트라우마의 치유마당'이다. 이를 통해 4.3의 진실을 후세대들에게 알리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수정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