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1) 소리 소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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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1) 소리 소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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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주말 아침, 창밖을 보니 한라산에 머물던 안개가 “스르륵” 걷히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까투리를 찾는 장끼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밤새 세차게 불던 바람이 잔잔해지고 보랏빛 가지 꽃도 안정을 되찾은 듯합니다. “토도독 톡” 호박잎에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투 두두 툭” 빗줄기가 텃밭 위에서 탭 댄스를 추나 봅니다. 주방 쪽에서도 “드르륵드르륵.” 아마도 남편이 모닝커피를 하려고 원두를 갈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내 아침을 여는 소리랍니다.

서울 집 마당에는 나무들이 봄소식을 전하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대문 옆에 터를 잡은 목련이 밤새 봄비를 맞았습니다. 겹겹이 에워싼 꽃잎이 하나둘 벙글더니 건너편에 복사꽃도 뒤질세라 한 몫 거들고 있더군요. 장미의 유혹하는 소리도 간간이 들리곤 했습니다. 꽃들의 향연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집에는 어둡고, 슬픈 소리가 스멀스멀 정원을 휘감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절절한 첼로의 저음이 안방 문지방을 타고 건넌방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해방되고 싶다는 불경한 마음이 내 안에 꿈틀거렸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고 오신 어머님은 고통에 겨워 안방을 빙글빙글 돌고 계시더군요. 그리곤 이내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반야심경을 읊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인 내 입에서는 본능적으로 사도신경이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이별의 시간을 목전에 둔 남자 앞에서 나는 겉으로만 안쓰러워하며 속으로는 차라리 고통을 멈추는 것이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여자입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 부부는 한동안 소원해지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며칠 전에 핀 가지꽃이 살랑대는 바람에 “톡.” 내 귀가 마음의 실마리를 풀었습니다. 바람 탓이 아닌 소임을 다 했기에 자리를 내어 주는 게 아닐까요. 자식밖에 모르고 그 성정이 소박하셨던 어머님은 아들 옆에 다만 며칠이라도 더 머물길 소원했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어머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아가, 고생 많았지.” 나는 어머님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어머님께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내 가슴속에서는 가끔 통곡 소리가 들려오곤 합니다.

제주도의 글방에는 커피 향이 가득합니다. 며칠 전, <빛의 벙커>에서 사 온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채웠습니다. 남편은 ‘편안해?’라는 말을 눈에 담았습니다. 나는 ‘고맙고 미안해요.’ 하며 미소 띤 얼굴로 남편에게 다가앉았습니다. 그리곤 머그잔 속에 비친 잔영에 물어봅니다. “너는 누구니?” 육지에서 생활하던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 일상이 소리에 민감해지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어느새 비가 멈췄습니다. 한라산을 에워싼 안개도 멀어져 갑니다. 앞마당에 수런대는 호박꽃에 벌이 “윙.” 날아와 앉았습니다. 벌이 수정을 도우려고 왔군요. 나도 서둘러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아봅니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던 것은 소리였습니다. 겹겹이 포갠 꽃잎에 꽃 문이 열리는 그날까지 내 글에 소리를 담아봅니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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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2022-04-23 10:13:40 | 39.***.***.233
귓가에 소리가 들리고 커피향이 코 끝에 와 닿고 눈앞에 장면이 펼쳐지는 듯 생동감 느껴지는 글이네요~너무 좋아요!

노란들국화 2022-04-10 09:40:11 | 118.***.***.64
감각있는 언어가 톡톡 살아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2022-03-12 09:56:53 | 1.***.***.34
어머님 얘기가 찡하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합니다

아꼬와콩 2022-03-11 11:42:55 | 182.***.***.82
작가님 글에서 소리뿐아니라 어떤 색감과 기분좋은 향도 느껴지네요 글속에 아픔도 있지만 스스로 치유도 하고 있어요 마치 풀꽃들처렁요 덕분에 제 기분도 좋아집니다 봄꽃 기다리듯 다음글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