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의 길, 육지 여자들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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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의 길, 육지 여자들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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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27) 올레 21코스의 숨은 이야기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제주올레의 공식 파트너 기업 (유) 퐁낭에서 꾸리는 제주올레 완주여행팀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지난 2월 4일. 11코스를 걸을 때 함께 했는데, 그들은 벌써 제주시 권역을 다 돌았단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동참을 못하다가 2월 21일에 21코스를 걷는다기에 확 마음이 끌렸다. 만사 제쳐놓고 참가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작점인 1코스와 함께 마지막 코스인 21코스는 늘 내게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으므로. 게다가 땅끝 오름을 의미하는 지미봉 꼭대기에서 제주 남동쪽 바닷가 풍경을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나는 하루 먼저 하도리로 가서 후배네 집에서 1박을 했던 터라, 후배의 차를 얻어 타고 출발 당일 조금 일찍 21코스 안내센터에 도착해서 서귀포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출발한 여행팀을 기다리기로 했다. 안내소에 근무하는 남자분이 두리번거리면서 들어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채 (결국 이야기 끝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알고 보니 전형적인 올레 이주민이었다. 유한킴벌리에서 30년간 영업직 사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한 뒤, 우연한 기회에 올레길을 걷게 되었더란다. 이 길 위에서 너무나도 행복했고 제주를 사랑하게 되었기에 6년 전에 아예 제주로 이주해서 와흘에 정착했더란다. 이곳까지 출근 시간은 자동차로 40여 분. 허나 그 출근길도 도시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비자림로를 낀 참으로 아름답고 한적한 드라이브 명품길이란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다양한 사연을 가진 올레꾼을 만나는 즐거움은 크지만, 코로나 시국이라서 그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 권하지도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는 그. 그 마음만으로도 차를 마신 것만큼 속이 따뜻해진다.

#자매는 용감했고, 여고 동창생들은 발랄했다 

드디어 10시가 좀 넘은 시각. 버스가 도착하고, 올레꾼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모두 9명, 오늘 가이드를 맡은 이성관(닉네임 별방진) 님까지 포함해서 모두 10명이다.

완주여행팀은 날마다 참가자들이 달라지기도 해서, 내가 이미 만나본 올레꾼은 24일 내내 신청한 자매가 유일했다. 열흘 만에 보는 그녀들은 지쳐 보이기는커녕 더한층 탄탄해 보이고 힘이 흘러넘치는 분위기였다. 하기야 나도 2006년 36일간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나날이 더 근육이 생기고 지방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점점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9명 중 남자는 딱 한 명. 그 청일점 참가자조차 살을 빼기 위해서라도 제주올레 길 가서 열흘만 걷고 오라는 부인의 엄명을 받들고자 내려온 것이라니. 크크. 게다가 오늘 걷는 21코스는 일제 강점기 그 서슬 퍼런 시절에 해녀 항쟁을 주도했던 구좌읍 하도리 해녀들의 애환이 곳곳에 깊이 스며든, 그야말로 ‘해녀의 길’ 아닌가.

출발점인 해녀박물관-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녀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박물관- 잔디마당에서 우리 일행은 간단한 몸풀기 체조를 한 뒤, 둘 셋씩 짝을 지어 천천히 출발했다.

나는 자연스레 한 중년 여성과 맨 마지막 조를 이루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육지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모 모두 제주 출신이란다. 그녀의 엄마는 내 모교이기도 한 신성여고, 아버지는 오현고를 졸업했고 결혼 이후 내내 육지에 살았지만, 고향을 잊지 못해 두 분 다 고향인 제주시 근처 가족 묘지에 묻히길 원했단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부모님 묘소 벌초하러 해마다 제주를 찾았고 그 김에 자동차로 제주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그다지 큰 감흥을 못 느꼈더란다. 허나 이번에 완주여행 프로그램을 우연히 접하고 처음으로 올레길 걷기에 도전하게 되었더란다.

오늘로 사흘째인데, 지난 이틀간 걷기만으로도 부모의 고향 제주가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과 독특한 정서가 이런 것이로구나, 비로소 느끼게 되었더란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인 그녀는 면수동 마을회관을 지나 본격적인 농로길에 접어들자, 소녀처럼 호기심 어린 눈길을 여기저기 던지기에 바빴다.

“어머 이 돌담 좀 보세요. 어쩜 이리도 정겨울까요?” “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돌담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걸 보니 참 신기하네요.” 푸르른 이파리만 올라온 작물을 놓고, 도시 여자들은 ‘무다’ ‘아니다’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도리를 상징하는 장소인 별방진-조선 시대에 왜구의 잦은 출몰을 감시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길동무 이성관 님의 목소리는 조금씩 흥분해서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그가 나고 자란 곳이고, 별방진은 그가 방과 후에 친구들과 제기도 차고 딱지치기도 하면서 놀던 놀이터였다. 그래서 그는 여기저기 쓰는 글의 필명도 ‘별방진’이라고 붙일 만큼 이곳에 대한 애틋함과 애정이 각별한 제주인. 그런 그가 육지 올레꾼들을 이끌고 자신의 어릴 적 놀이터를 찾게 되었으니 감회가 각별하지 않겠는가.

#아아, 이런 해녀가 있었다니. 우리가 걷는 이 길 위에 살았던 

헌데 별방진으로 가던 중, 몇몇 제주 구옥들이 나란히 정겹게 도란도란 머리를 맞대고 서 있는 길 위에서 뭔가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그동안 숱하게 이 길을 지나가면서도 보지 못했던 긴 설명 현판이 어느 집 돌담에 붙어 있었다. 유난히 집으로 들어가는 올레가 길고 마당이 너른 어느 집 앞이었다.

어, 이게 뭐지? 일행들이 별방진으로 서둘러 발길을 재촉해 시야에서 사라지는데도 나 혼자 그 담벼락에 붙어 서서 내용을 읽어보니, 아, 자책과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아, 이런 분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가 늘 걷던 이 길 위 이 집에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런 분이 살고 계셨구나. 그분 생존시에 미처 뵙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고, 지금이라도 이런 표식을 집 앞에 붙여준 뒤늦은 ‘역사 바로 세우기’가 참으로 반가웠다.

그 설명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곳은 고이화 해녀의 생가터. 1916-2013년. 남편 이종옥과 결혼해 4남을 두었다. 제주 1호 해녀상 수상. 해녀 항일운동에 참여,” 이쯤에서 더 궁금한 분들을 위해 그녀의 긴 생애를 축약해보자면 또 이러했다.

“그녀는 우도에서 참봉 고성룡의 3남 3녀 중 둘째 똘래미(딸의 제주어)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워 14살부터 해녀가 되었다. 남달리 몸집도 크고 숨이 길어 어린 나이에도 ‘애기상군’으로 불렸다. 어린 나이에 출가 해녀로 일본과 전국 각지로 출가 물질을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해녀 활동을 하던 중, 1932년 3월 우도 해녀 270명과 함께 10여 척의 풍선에 나눠 타고 구좌읍 종달리 두문동에 내려서 일본인이 지배하는 어촌계의 횡포를 규탄하는 항일 시위를 하다가 일본 순사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해 그 상처가 평생토록 남았다. 그 이듬해 부유한 시댁으로 시집을 갔으나 일본 대마도까지 출가 물질을 다니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4.3 사건으로 시댁 식구들이 모두 경찰에 죽임을 당하고 남편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시련 속에서도 아들 넷을 훌륭히 키워냈다.”

아아, 열넷에 해녀가 되어 젊은 날 평생 상처로 남는 폭행을 일제 순사들에게 당하고 해방 이후에는 시댁 가족들과 남편을 4.3의 미친 광풍 속에 떠나보낸 뒤 혼자 아들 넷을 키우면서 98세까지 살다 간 그녀 고이화. 거의 일 년여에 걸쳐 우도, 하도, 종달 해녀들이 똘똘 뭉쳐 일제에 맞서는 항일 시위를 여러 차례 도모한 1932년 해녀 항쟁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허나 그 항쟁을 주도해서 목포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한 김옥련 해녀를 비롯한 몇몇 수형 해녀들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평생 상처를 안고 산 고이화라는 분도 있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21코스를 개척하면서, 축제 등의 행사를 하면서 이 집 앞을 지나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도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한참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다가 뒤늦게야 허둥지둥 일행을 따라갔다. 일행들은 복원된 별방진 성터 위로 올라가서 하도리 바당을 내려다보면서 아름답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예전엔 마을 사람들이 바닷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감시했던 그곳에서. 그곳에서 다시 올레길로 되돌아와서 농로를 걷다가, 하도리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가는 길, 앞서가던 여자들이 갑자기 하나 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안내소에서 자신들은 청주에서 같은 여고를 나온 여고 동창생들이라고 소개했던 여성들이었다. 지난해 축제 때 올레를 완주한 한 친구가 이번에 또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하나 둘 따라붙어서 모두 넷이 내려왔다고 그네들은 깔깔거리면서 자기소개를 했었다.

오래 숙성된 와인이 풍미가 깊듯이, 오래 숙성된 그녀들의 우정은 격의가 없었다. 네 여자는 제주 출신 가수 혜은이가 부른 ‘감수광’에 맞추어서 흥겹게 4인조 댄스를 추면서 걸어 내려갔다. 지켜보던 나도 덩달아 노래를 따라 부를 만큼, 그녀들은 흥과 끼가 넘쳐났다. 같은 길도, 누구랑 동행하느냐에 따라서 느낌도, 풍경도 다르게 다가오는 법이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그 이후, 우리는 우도와 일출봉이 양 옆 나란히 떠 있는 옥색 물빛 바닷가 하도리 동동 해수욕장 잔디밭에 앉아서 이 길을 걸은 감상을 서로 나누었고, 지미봉 정상에 숨을 헐떡이며 올라간 뒤에는 참가자들의 요청으로 시흥에서 1코스를 내고 종달리에서 21코스로 마무리 짓게 된 숨은 이야기를 내가 들려주었다.

아,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이날 하루의 여정을 되짚어보니 그 모든 게 각본 없는 로드무비처럼 참으로 다정하고도 따뜻하고 아름답고 의미 있었다. 제주 해녀의 길을 육지 올레꾼 여자들과 걸었던 그 하루가.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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