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세포가 연극에"...제주 소극장 40년 부부에, 관객들 웃고 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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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포가 연극에"...제주 소극장 40년 부부에, 관객들 웃고 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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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은 반대, 연극 열정만큼은 똑닮아"...수십 년간 100편 넘는 작품들 공연
"핵심은 '관객'과 함께 만드는 과정...'울림' 있는 연극, 초심 잃지 않을 것"
ⓒ헤드라인제주
지난 23일 오후 <헤드라인제주> 취재진과 만난 극단 세이레아트센터 정민자(62), 강상훈(62) 공동대표. 이들 부부가 연극 외길을 걸은지 어느덧 4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헤드라인제주

"우리의 모든 세포들이 연극에 닿아 있고, 그 아름다움을 관객들과 공유하며 살아가요. 우리 부부는 가능할 때까지 이 길을 계속 걸을 거예요. 숙명일지도 모르죠"

제주버스터미널과 제주종합경기장 등 큰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삼도1동. 이 동네의 어느 골목길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다소 투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극장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수십 년간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때론 유쾌하게 그려내는 연극인 두 명이 있는데, 세이레아트센터 정민자(62), 강상훈(62) 공동대표다. 사람들은 이들을 '41년차 연극인 부부'라고 부른다.

돈이 생기면 소극장 문을 열고, 건물 임대료가 없으면 문을 닫기도 하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들 부부는 연극이 주는 특별한 아름다움 때문에 이 걸음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삶의 희노애락을 담은 100편 이상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 23일 오후 제주시 삼도1동에 위치한 세이레아트센터에서 <헤드라인제주> 취재진과 만난 정민자, 강상훈 공동대표는 말했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에요. 관객이 웃으면 저희도 웃고 울으면 같이 울어요. 그리고 소극장은 관객에게 가장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죠"

◇말없던 남학생과 적극적이었던 여학생..."연극 열정만큼은 똑닮아"

부부가 연극을 처음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81년. 말 없는 후배한테 연극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대학 선배의 손에 이끌려 강 대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연극을 시작했다. 반면 적극적인 성격의 정 대표는 연극을 배우고 싶단 막연한 생각을 곧장 실천으로 옮겨 무대에 오르게 됐다.

둘은 이어도라는 같은 극단에서 활동했지만 마주친 적은 없었다. 정 대표가 입단하기 직전 강 대표는 군 입대했기 때문. 그렇지만 부부가 인연이 될 수 있었던 계기도 군대였다. 부부가 처음 만난 건 강 대표가 휴가 날 극단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당시를 회상하던 강 대표는 "표현을 못했지만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하지만 연극만큼은 모든 것이 통했다고 했다. 정 대표는 "지금도 둘이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는 단연코 연극"이라고 말했다. 군 철조망을 경계로 편지를 주고받던 둘의 관계는 금세 연인으로 발전했고 그 인연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늙은부부이야기' 공연 중인 강 대표와 정 대표. ⓒ헤드라인제주
ⓒ헤드라인제주
정 대표와 강 대표가 '먼데서오는여자' 공연을 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강 대표는 입단한 지 10년이 지난 1991년 극단 이어도의 대표가 됐다. 그때부터 20평 남짓한 무대를 정식 공연장으로 정비하고 다양한 공연들을 기획했다. 특히, 도전적이고 예술적인 실험을 많이 했는데 '부도덕 행위로 체포된 여인의 증언'이 대표적이다.

강 대표는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었다. 서로 좋아해도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사연을, 부도덕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에 반기를 드는 작품이었는데, 그 시대 정서상 아주 쇼킹했다"며 "하지만 다르더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사회적 관습의 부조리함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세이레라는 극단을 창단하면서 더욱 도전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세이레는 지난 1992년도에 창단했는데, 부부를 포함한 초창기 멤버는 6명이었다. 이들은 이전 극단의 제한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기존의 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그려내고자 했다.

무엇보다 이전 극단에서는 단원들이 오전에 생계활동을 한다고 저녁이 돼서야 공연을 할 수 있었는데, 정 대표와 강 대표는 하루를 오로지 연극에만 힘을 쏟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금 가난하더라도 전업 연극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날들이었다.

"연극에는 정말 진심이었어요, 요즘에는 이루지 못한 꿈이었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요"

◇극단 세이레 창단 후 100편 넘는 작품 공연...최고의 무기는 '울림'과 '진솔함'

세이레아트센터 창단 첫 공연은 '위기의 여자'라는 작품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극단 세이레는 대표작 황가맹가, 밥, 콜라소녀, 자청비, 백주또, 아일랜드. 백조의 노래, 늙은 부부이야기, 먼데서 오는 여자 등을 포함해 총 100편이 넘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 2012년에는 정 대표가 쓴 '자청비'로 제9회 고마나루향토연극제에 참여했는데, 전국대상을 수상했다. 희곡상, 우수연기상까지 연이어 받는 등 전국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부부는 2017년부터 세이레의 대표직을 내려놓고 운영위원으로만 활동하고 있다. 소극장을 더 내밀하게 운영하고, 특정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양한 작품들을 접목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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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직후 단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정 대표와 강 대표.ⓒ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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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대표와 정 대표가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연극계의 사정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들 부부는 언제나 묵묵히 본인들이 추구하는 길을 걸었다.

강 대표는 개인적으로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이 보인다'라는 작품이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해당 작품 주인공은 좌충우돌형 인간이지만 본성은 담백하고 순진하다"며 "한 인간의 따뜻하고 휴머니즘적인 시선 그리고 각박한 세상을 성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굿바이 마더'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 환자인 딸과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그 작품을 한 달 동안 20회 넘게 했다"며 "저는 너무 가슴 아픈 작품이었는데 반응은 굉장히 좋았다. 그 작품으로 팬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특별한 기교나 화려한 무대장치로 승부를 보지 않았다. 거창한 주제를 다루지도 않았다. 이들이 중점에 둔 것은 '울림'.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든 진솔하고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 이들 연극이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그래서인지 연극이 끝난 후 이들 앞에 와서 펑펑 운 관객들도 있었다고 했다. 정 대표는 "몇 년 전 '늙은 부부이야기' 공연을 할 때였는데, 육지에서 관광 온 가족들이 연극이 끝난 후 포토타임 때 갑자기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자신들 이야기와 똑닮았다고 했어요. 어머님이 많이 아프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번 제주여행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했죠. 제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저도 말없이 펑펑 울고 말았어요"

◇"연극의 끝과 시작은 '관객'..."힘닿을 때까지 함께 울고 웃고 싶어요"

"아무래도 힘든 것은 경제적인 부분인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 때문에 관객을 만날 수 없다는 거예요"

부부는 지금은 자리를 잡았지만 이전까지 총 6번 둥지를 옮겨야 했다. 건물임대료를 감당하기 버거웠다고 했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돈 없이 마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상황은 지금도 녹록치 않다.

강 대표는 "연극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들 말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연극을 하려는 사람이 크게 줄어든 것이 문제"라며 "아무래도 밥벌이가 안 된다는 점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연극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한층 더 충만해질 수 있다"며 "단순 공연, 무대 이상의 감동이 오가는 것이 연극인데, 점점 여건이 안 좋아지는 상황이 여러모로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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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정 대표.ⓒ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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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북어대가리' ⓒ헤드라인제주

상황이 이렇다 할지라도 이들 부부가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달라진 적은 없다. 부부는 연극의 처음과 끝은 항상 '관객'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연극의 4대 요소 마지막이 관객이다. 연극은 관객이랑 같이 만들어가는 공연"이라며 "대극장 무대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더 강력한 메시지는 소극장 공연에서 준다고 생각한다. 관객과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배우의 거친 숨소리도 전부 들리고, 배우가 격한 연기할 땐 튀기는 침도 다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소극장 공연에서 배우는 관객과 더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고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죠. 그 기분이 쫄깃하답니다. 그런 마음에서 아직도 힘들게 소극장을 운영하나 봐요. 소극장 공연의 매력입니다(웃음)"

작은 소극장에서만 수십 년 공연을 해 온 부부의 꿈은 어찌 보면 거창하다. 정 대표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둘이 작품 하나 들고, 세계 곳곳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가 향후 무대를 '세계 곳곳'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저 "더 다양한 관객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골 마을의 광장이든, 소극장이든 장소와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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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인제주>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 대표와 강 대표. ⓒ헤드라인제주

이외에도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한 연극교육, 청소년 연극아카데미 등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코로나 상황이 나아진다면 세이레아트센터에서 연극 축제도하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친숙한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부부가 40년 이상 두 손 맞잡고 걸어온 연극 외길, 이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위로받았다. 부부는 "그것까지도 연극의 요소"라고 강조했다. 그저 하나의 공연, 일회성으로 휘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또다른 세상, 우리들의 삶 그 자체로서의 연극인 것이다. 정 대표와 강 대표는 말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고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매 순간마다 관객들과 함께 웃고 울고,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사람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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