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애니메이션이 구현하는 세계관이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장을 확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면에서 자극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성적 대상화나 아동 청소년의 몸을 성애화하는 작품들에 역겨움을 느끼다 보니 작품을 고르는 데 망설여질 때가 많다. 보다가 중지하는 때도 많다. 특히 어린 몸을 외설적으로 그린 것들을 보면 분노가 먼저 생기는데 본능적으로 아동이란 보호의 영역이란 생각이 강하기 때문인 듯하다. 성적 대상화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은 언제나 사회적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대상화는 나쁜 것일까. 대상화된 신체가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드러낼 때 대중의 반응은 어떻게 흐르는가.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등장한 소년 배우는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원작 토마스만의 소설 <베니스에서 죽음>도 영화도 소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으나 이 작품들에선 거부반응이 오지 않는 이유가 청소년의 몸을 단순히 성애화한 것이 아닌, 예술적 사랑의 영역으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반면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성인의 몸을 제대로 포착한 작품에는 관심이 간다. 균형 잡힌 각이 잘 만들어진 곡선의 아름다움에 심취되기 때문이다. 곧은 뼈대에서 단단한 근육이 흘러내리며 만들어낸 선들을 보면 경이롭기도 하다. 특히 운동선수들의 경우엔 그간 노력한 세월이 쌓인 모습이란 생각에 더 감탄한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에서 남성 피겨 선수들의 성장을 다룬 <유리!!! 온 아이스>라는 작품이 있는데 성장별 인종별 다른 몸을 대상화하고 있다. 15세 선수는 소년의 몸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유리오의 몸은 유리오의 대사를 통해 정확하게 표현된다. 더 자라면 달라질 몸이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내겠다고. 가늘고 긴 선의 소년 미를 피겨 경기 안무를 통해 구현하는 것.
반면에 유리의 경우는 성인 동양 남성의 몸을 재현한다. 피겨 선수임에도 선의 흐름이 가파르지 않고 조금 무디다. 그래서 체력은 좋지만, 규격화된 서구적 아름다움에는 조금 덜 미치는 모습이다. 그 모습도 시리즈가 진행되면 차차 다듬어지지만 그런데도 안무와 기술을 통해서 편견을 부서뜨리는 모습에 주안점을 둔다. 마지막으로 천재 피겨 선수인 빅토르는 운동한 사람이 이를 수 있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몸의 결정체처럼 그려진다. 성인 북유럽 남성의 잘 다듬어진 근육과 곡선을 그려내다 보니, 몸만 보면 액션을 다룬 애니메이션 남성 주인공의 이미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다만 근육의 형태와 몸의 유연성과 탄력성이 조금 더 피겨선수답다고 해야 하나…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남신 등장”이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우아하게 묘사된다.
이 작품은 생각 외로 국내에서 저평가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동생애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댓글을 봤다. 그건 제작진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이 든다. 편집, 음향, 음악, 스토리 작품 곳곳에 묻은 정성 하나하나 거론하지 않더라도 앞서 언급한, 캐릭터를 그려낸 육체의 다양성과 섬세함만으로도 이미 훌륭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동성애 코드가 은근히 스며있다. 최고의 경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그걸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코치진들의 노력도 놓치지 않으면서 하물며 사랑이라니. 그게 남성들 간의 사랑이라 하여 폄하될 이유가 있을까.
대선을 앞두고 정당별 대선후보가 정해지면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면면에서 첨예한 부분은 동성애다. 동성애가 제도적으로 인정 받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차이가 있다. 오랜 세월 불법화돼 온 섹슈얼리티에 갑자기 온정적으로 변하기는 어렵겠지만 법률로써 보장할 때 혐오가 표면화되는 것은 어렵다.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 감정들은 지속해서 이어지기 어렵다. 사랑이 불법이 된 이 나라에서 혐오가 표현의 자유라는 언어도단으로 인해 난무하고 있을 때 차별금지법이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왜 사랑이 불법이고 혐오가 합법이어야 하는가. 왜 사랑이 불법이고 폭력이 합법인 현실을 바꾸지 않는가. 왜 혐오가 불법이라고 제도적으로 마련하지 않는가. 한 나라의 대표가 폭력이 합법인 현실을 묵인하는 사람이라면, 국가 공권력은 폭력을 지원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회적약자는 과연 온전한 시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폭력이 왜 인권보다 앞서고 사랑보다 앞서야 하는가. <<한정선 /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사람 프리즘'의 글은 <웹매거진_멍Mung>에도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