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본 인터넷 신문 칼럼 '복지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정권의 재창출'(11월16일자 보도)에서 필자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사회보장의 확대이고, 대선을 맞아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당이 정권을 창출 또는 교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본지의 일부 독자들을 포함하여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어떤 경제학파의 주장에 근거하여 사회보장확대를 주장하지 않는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든 아니든, 각 개인은 나름대로 경제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경제학을 만인의 경제학이라고 생각한다. 만 개의 경제학파가 존재할 수 있다.
필자가 사회보장확대를 주장하는 경제적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와 같이 개발경제체제를 벗어난 성숙한 경제(Matured Economy)에서는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지 않고 정권(진보 정권 또는 보수 정권)에 상관없이 기술진보의 속도로 완만하게 성장한다. 둘째 이러한 상황에서는, 보수적 정당이 신봉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병폐인 시장실패 즉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정부의 시장개입이 절실하다. 셋째 선진국들의 경우, 보수 정권 진보 정권 가릴 것 없이, 사회보장을 지속하여 확대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넷째 사회보장이 잘된 국가일수록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내성이 강하다. 다섯째 대미 균형환율(구매력 평가환율)로 평가했을 때 우리나라의 소득은 영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와 엇비슷한데 사회보장수준은 열악하고, 그들의 약 1/2 또는 1/3 수준이다.
독자들을 포함하여 혹자는 GINI 계수(Coefficient)로 나타낸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도는 유럽연합을 대표하는 독일의 수준과 같아 아주 양호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오류를 데이터를 통하여 밝히기 전에 GINI 계수가 무엇인 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소득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위 <그림 1>은 통계청 웹사이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의 X축은 인구의 누적비율을, Y축은 소득 누적점유율을 나타내고 있다. 원점 A와 대각선상의 대척점 C를 연결한 사선을 생각해 보자. 사선 상의 좌표(X=10, Y=10)는 소득 하위 10%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10%를 차지한 것을 나타낸다. 사선 상의 좌표(X=20, Y=20)는 소득 하위 20%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20%를 차지한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사선은 소득의 불평등이 없는 상태 즉 소득분배가 아주 공평하게 일어난 것을 나타낸다.
그림의 원점 A와 점 C를 잇는 점선을 생각해 보자. 점선 상의 좌표(X=10, Y=1(?))는 소득 하위 10%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1%를 차지한 것을 나타낸다. 점선 상의 좌표(X=20, Y=5(?))는 소득 하위 20%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5%를 차지한 것을 나타낸다. 이 점선은 로렌츠곡선이라고 불리고, 소득의 불평등도를 나타낸다. 점선과 사선을 잇는 초승달 모양은 불평등 면적을 나타낸다. GINI 계수는 이 불평등의 면적을 삼각형 ABC의 면적으로 나눈 것으로 정의된다. 불평등 면적을 크게 하는 점선을 상상해 보자. 이 점선이 만드는 초승달 모양의 불평등 면적이 삼각형 ACB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커진다. 따라서 GINI 계수가 증가한다. GINI 계수가 커질수록 소득 불평등도는 증가한다.
<표 1>은 선진 7개국, 즉 G-7 국가와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도 즉 GINI 계수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8개국 중에서 GINI 계수가 가장 낮은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의 GINI 계수는 0.289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표방하는 서유럽의 경우, GINI 계수가 낮고 사회보장수준이 높다. 미국 또는 영국 그리고 우리나라와 같이 경제적 자유를 주창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하는 국가일수록 GINI 계수가 높다. 능력주의(Meritocracy)를 중시하는 미국의 GINI 계수는 0.39로 가장 높고, 영국과 우리나라 순이다. 우리나라의 GINI 계수는 0.345로 3위이고, 소득의 분배가 서유럽 복지체제 국가들과 비교할 때 아주 열악하다.
GINI 계수는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소득 불평등 측정 지표지만, 비슷한 소득과 지니계수를 가진 국가라도 서로 다른 소득분배상을 가질 수 있다. 로렌츠곡선의 곡률(Curvature)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면적이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 GINI 계수로만 판단할 때 우리나라와 일본의 소득 불평등도가 유사하게 보이지만 소득과 부의 분배 양태가 일본과 비교하여 사뭇 다르다. 표 2는 이것을 함축하고 있다. <표 2>는 선진 7개국들과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각 나라의 소득과 자산가 수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총 국내소득(Gross Domestic Product, GDP)은 2020년 20조 9336억 원이고, 10억 달러 이상의 부(Wealth)를 소유한 자산가들의 수는 726명이다. 일반적으로 총 국내소득의 크기는 경제력의 크기를 나타낸다. 경제력을 가지고 비교할 때, 미국의 대부호(Super Rich)들의 수는 독일보다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하지만 일본과 비교할 때는 미국의 대부호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훨씬 크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의 경제력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일본의 1/3 수준인데, 우리나라의 대부호들의 수는 43명으로 일본 47명과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GINI 계수가 비슷하지만, 일본에 비교하여 부의 분포가 상대적으로 편중되어 있다. 이것은 소득분배의 양상이 다르고, 그 질이 양호하지 않다는 것을 함축한다. 일본과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부의 불평등이 심화 되어 있고 소득분배의 질이 양호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에 내재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 요인이 있겠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이다. 일본의 경우 중소기업의 임금은 대기업의 약 80%인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약 60%이다. 이러한 임금 격차를 해소하지 않으면, 부의 불평등과 소득분배 불평등의 질(Quality)은 갈수록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나의 방법은 중소기업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기업 수준의 80% 이상의 임금을 받도록 정부가 보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주의적 노동 배분 기제(Socialistic Labor Allocation Mechanism)를 통하여 민간부문의 노동 배분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장을 통한 노동의 배분(Labor Allocation)이 사회주의적 협동적 노동 배분 기제와 비교하여 우월한 것인가? 최근의 연구결과는 사회주의적 기제가 동태적으로 비효율적인(Dynamically Inefficient)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하여 정부가 보조할 경우, 재원조달이 관건이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의 방법은 재산세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재산세는 약 0.8%이다. 이 재산세율을 우리나라에 적용할 때, 강남의 집 한 채의 값이 40억이라면 일 년에 3천 2백만 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 강남에 거액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 대선후보들, 재산세를 미국사람들처럼 낼 생각이 있는가? 부자들의 재산세를 감면시키고, 가당치 않은 논리를 가지고 가진 자들의 비대칭적 교섭력(Asymmetric Bargaining Power)을 증가시켜 궁극적으로 가난한 청년들(사람들)의 삶을 짓밟아 버리려는 궁리만을 하는 정당과 대선후보, 이 땅의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고뇌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를 묻고 싶다.
청년 간의 소득분배 불평등을 진정 우려하는 대선 후보자라면 선거 캠페인에 일부 선택된 소위 엘리트 청년을 내세우기보다는 청년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제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청년을 선거 캠페인에 이용하기 위하여 마치 국정에 중용할 것처럼 쇼맨십(Showmanship)을 부리는 대선후보들 자중하기 바란다. 쇼맨십에 놀아날 만큼 이 땅의 청년들이 미욱하지 않다. <김진옥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진단에는 엉뚱한 처방이 뒤따릅니다. 위기 때마다 정부 개입을 통해 경제를 살리려는 시도야말로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왔습니다.
그저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려고 그 짐을 미래 세대로 넘겨왔었죠.
장기적으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케인즈의 헛소리는 정말이지 경제학자로서 무책임한 말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멋진 구호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저라고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없을까요?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이 없나요? 전혀 아닙니다.
20대 청년으로서 누구보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공짜 점심이란 결코 없다는 쓴 소리를 해줄 수 있는 분들이 보이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