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연대의 힘을 믿는 당신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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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연대의 힘을 믿는 당신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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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다. 한동안 아프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다. 고립된 시간 속에서 끙끙 앓아대면서 침묵 속에서 멈춰 있는 시간 같았다. 말하지 않는 날이 늘어나고 잠 못 드는 시간이 늘어가고 밥을 제대로 먹지를 못하거나 너무 많이 먹었다. 외출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절망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끔 잊은 듯이 툭 치는 어깨의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귀찮았다. 건네오는 말도 성가셨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챙겨오는 살뜰함이 부담스러웠다. 사방에 벽을 쌓아 올렸다. 이미 거리를 상당히 두고 혼자인 상태에서 벽까지 쌓아 올리니 요새가 따로 없었다.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못난 내게 마음을 보내오는 그들은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다. 역시 우리는 모두 못났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절망의 연속이 삶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할 만큼 잘 살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엿보면 당신들도 넘어지고 엎어지고 흐느끼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팬데믹의 현실에서, 모두가 일정의 소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심적이든 경제적인 것이듯 몸의 것이든 우리는 사회가 고립을 형성시킬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개인사의 슬픔은 이런 현실에서도 당연하게 이어진다.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것은 단순히 1+1이 2가 되는 것이 아니다. 더해지는 것은 무한증식으로 이어지곤 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사회적 연결고리는 약해서 무너지기 쉬운 구조다. 그런 길을 모두가 걸어가고 있다.

베드로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다혈질이고 제멋대로여서 꾸중을 자주 듣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신뢰를 지켜낸 사람도 아니었다. 배신자 유다는 죽음으로 속죄를 했지만, 베드로는 그런 근성도 없는 사람이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심지어는 불타는 로마를 두고 박해받는 동지를 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못난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Quo Vadis Domine.”,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그리고 돌아가서 동지들과 함께하고 함께 고통을 나눠 갖는다. 그가 예수의 환영을 봤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매일 실패하고 실수하면서도 성질도 나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을 지녔음에도 그는 질문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 질문은 늘 사람과 맞닿아 있었다. 도주하는 자신에게 절망하면서도 결국 그가 돌아가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질문의 올바름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체념 속에서 돌아온 마음은 못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회귀하여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철저히 고독한 시간 속에서 깨달은 연대의 힘 때문이었다. 당신의 손길을 거부하면서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작은 신호, 어깨를 툭 치는 손짓, 귀찮게 물어오는 안부, 부질없어 보이던 사랑한다는 말이란 것을 깨닫는다.

청소년 배구 이야기를 다룬 일본 애니메이션 <하이큐>에서 츠키시마는 이런 말은 한다. “고작 블로킹 하나, 고작 25점 중에 1점, 고작 부 활동” 이 말을 하면서 매사에 시큰둥하던 그는 처음으로 쾌재를 부른다. 냉정한 척, 대충대충 살아가던 것은 그가 홀로 절망했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내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 과거 선배들이 한 말들이 현재에 꽂히면서 그 ‘고작’이 전환의 힘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말은 역시나 소요가 토비오에게 한 명대사다. “나에게 토를 건네줘!(オレにトス 持ってこい!)” 모든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실패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못난 소요는 잘난 선수들에게 손길을 부탁한다. 네가 건네줘야 내가 날아올라 스파이크를 때릴 수 있다고, 네가 블로킹을 막아내 줘야 내가 다시 결정적 한 방을 때릴 수 있다고. 그 말은 결국 시니컬한 츠키시마가 블로킹을 막아내며 외치게 한다. “원터치(One touch)!”. 아름다운 경기를 만들어내면 성패와 상관없이 패자에게도 행복한 분함을 일으킨다. 실패하고 절망을 해서 분해도 포기하는 평안을 찾게 만들지 않게 만드는 힘. 그 한 번의 터치가 만들어내는 기적은 결국 성가시고 끈질기게 내미는 손길 때문이고 그 손길을 믿고 내밀어달라고 말하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당신에게 부탁한다. 다시 한번 더 “원터치.” 고작, 그 “원터치”. 나에게 우리에게 다시 어둠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못난 우리들의 연대의 손길. 과거도 미래도 혼자일 수밖에 없을지라도 지금 당장, 이 순간 보내오는 손길 하나. 마주 잡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손길 하나. 언젠가 떠올리게 될 손길 하나. 빛 속에 다시 서면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손길 하나. 그래서 당신도 무너지지 않을 손길 하나.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사람 프리즘'의 글은 <웹매거진_멍Mung>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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