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풀과의 전쟁', 묵묵히 듣던 그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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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풀과의 전쟁', 묵묵히 듣던 그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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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23) 예초기 회사와의 인연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 그 자리에 예초기 유통회사 대표가 있을 줄이야

제주올레 초창기, 우리 사무국에는 그야말로 최소 인원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부수적인 일에는 마치 돌려막기를 하듯, 눈에 띄는 선후배 지인들을 자원봉사로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대부분 즐겁게, 기꺼이 그 궂은일을 맡아서 처리해주었다. 김수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귀포에서 나고 자라 잠시 진로를 고민하느라 고향인 서귀포에 내려와서 있던 중, 규슈 관광 추진기구 통역으로 온 누나의 소개로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 그는 제주올레 사무국에서 운전이 필요하면 운전기사로, 예초가 급할 때는 예초 보조 인력으로, 인터넷 자료를 만들 때는 지피에스를 찍으러 다니는 요원으로, 그때그때 다른 역할을 빛나게 수행했다. 그 후 서울에 올라가서 대학원에 다니더니,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고향 구억리에 부모님이 물려준 땅을 기반으로.

그런 그가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을 다니더니, 올봄에 내게 특강을 부탁했다. 자기네 동기생들이 제주에 2박 3일 내려와서 워크숍을 하는데 제주올레에 관해 특강을 해달란다. 워낙 왕년에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던 터라, 단박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락했다. 내 특강을 듣기 전 오전에 일부는 골프를 치고, 일부는 제주올레 길 14-1코스를 걷는단다. 워낙 올레에 관한 한 선행학습을 확실하게 한 수환인지라 곶자왈 코스를 잘 안내할 것 같아서 안심했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 유난히 질문이 많았던 매우 적극적인 청중

6월 4일 오후 약속된 특강 장소로 가면서도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골프든, 올레걷기 등 오전에 몸을 쓰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 특강이라서 다들 졸지나 않을까 싶어서. 허나 그들은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연배가 다른 CEO 30여 명은 한결같이 열심히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태도에 자극받아 나도 강의안에는 없던 이야기를 마구 꺼냈다. 그중 하나가 예초에 관한 이야기였다(아마 그 전날에 탐사팀으로부터 2021년 예초 계획을 보고받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말했다. “이제부터 5개월간 우리 제주올레 탐사팀은 ‘풀과의 전쟁’을 벌어야만 한다, 제주도는 본디 고온다습하고 비가 많은 섬이다. 게다가 올레길은 자동차 길을 되도록 피해서 길을 냈기에 곳곳이 풀길이다. 우리 탐사팀은 6월 초만 되면 얼굴이 어두워진다. 힘들여 예초해도 비 한번 크게 오고 나면 또 풀이 무성해지기 때문이다. 탐사팀의 여름은 풀과의 전쟁 기간인 셈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걸으면서 그들의 노고와 정성을 한 번쯤은 떠올리기를 바란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난 꿈에도 몰랐다. 그 자리에 예초기 유통회사 한일상역 대표가 자리하고 있는 줄은. 게다가 그날 열성적인 수강생 중에서도 맨 앞줄에서 가장 열심히 메모하면서 듣고 질문도 두어 차례나 하던 그 수강생이 그 회사의 대표라는 것을.

# 예초 장면 살피던 중 눈을 다치다

그 며칠 뒤 제주올레 후원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며칠 전 최고경영자과정 특강을 들은 분인데, 그날 특강에 너무나 감명받아서 꼭 하고픈 이야기가 있으니 이사장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는데 어찌하느냐고. 그래서 당연히, 번호를 알려주라고 했더니 즉각 연락이 왔다. 세상에나. 그는 예초기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파는 회사의 대표란다. 골프를 치지 않는지라 그날 특강 전에 14-1코스를 처음 걸으면서 올레길에 너무나 감동을 받은 후, 특강을 듣는데 예초에 대한 이야기에 또 한 번 깊은 감동을 받았더란다.

그래서 본인은 이 일을 계기로 제주올레 길 완주를 결심했고, 가급적 올레길에 예초와 관련된 후원도 하고 싶단다. ‘불감청 고소원(감히 먼저 청할 수는 없지만 진정 원하는 바라는 사자성어) ’이 딱 이런 경우지 싶었다. 제주올레 길 유지·보수 관리에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예초기를 후원하시겠다니, 내려오시면 꼭 연락을 달라고 부탁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야호,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설문대할망께 감사!!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회사 일에 바쁜 그가 모처럼 마음먹고 제주올레 길 완주를 위해 긴 시간을 내서 제주로 내려온 건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인 7월 21일. 내려오자마자 다음날, 그는 예초 현장에 동행을 원했다. 예초 현장마다 각각 상황이 다르고, 예초기도 워낙 모델이 다양하고 성능이 다르므로, 직접 현장을 봐야만 제주올레에 필요한 예초기와 관련 부품을 골라서 보내줄 수 있다면서. 현물 제공만도 고마운데, 대표가 그런 세심한 배려까지 해준다니 우리로서야 따따블 감사였다.

탐사팀은 동행 현장으로 6코스 제지기오름을 택했다. 전 대표와 나는 제지기오름 입구에서 탐사팀과 만났다. 마치 전쟁터의 전사를 연상케 하는 ‘예초 전사’ 3인방은 벌써 거무스레하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임연택 탐사전문위원이 우리에게 먼저 올라가 있으면, 자기네가 예초를 하면서 올라가겠노라고, 헌데 위험하니 절대 너무 가까이 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오름 중턱에 미리 올라가서 내려다보는데 ‘와리릿 와리릿’ 굉음소리를 내면서 풀들이 스러져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리자 전 대표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가는가 싶더니, ‘으악’ 비명소리가 들렸다. 전 대표가 양 손으로 한 눈을 감싸 쥐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누군가가 예초작업 중 튄 돌에 눈을 맞은 듯하다’ 고 걱정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지난 후에야 전 대표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 다 제 잘못입니다. 사용하는 예초기 칼날이 어떤 건지 좀 더 가까이에서 확인하려다가 그만 돌이 눈에 들어가고 말았네요. 너무 걱정 마세요. 곧 괜찮아질 겁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예초기 유통사 대표가, 그것도 후원을 결심하고 필요한 제품이 무엇인지 참고하기 위해 찾은 예초 현장에서 눈에 돌멩이가 정통으로 들어가는 사고를 당하다니.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하고 벌어진 일에 당혹해하는 황당한 상황이 눈앞에 전개된 것이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전 대표는 이날 일정을 취소하고 일단 서귀포 시내에 있는 안과로 달려갔다.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의사는 당장 서울로 올라가서 큰 병원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허나 전 대표는 올레길 완주하러 왔으니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두어 번 설득하다가 급기야는 크게 화를 냈다. 지금 시력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걷는 게 대수냐면서. 최소한 일주일은 숨 쉬는 것과 밥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안정을 취한 뒤에 다시 상태를 보고 서울행이냐 올레길이냐 결정짓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일주일 뒤 의사는 전 대표에게 이제는 살살 움직여도 된다고 허락을 했다.

# 한라산 중턱 원점비에서 조용히 흘린 눈물

7월 말부터 그는 예정보다 늦게 올레길 완주에 도전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는 한 코스를 걸을 때마다 그 벅찬 감동과 소회를 내게 문자로 보내왔다. 얼마 후, 그를 다시 만났더니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와 다음날 올레길 대신에 한라산 근처 오름을 간단다. 그런가보다 무심코 넘기려는데, 그가 중얼거리는 말이 내 귀에 꽂혔다.

“형제처럼 지냈던 한 살 위의 사촌 형이 1982년 한라산 중턱에서 군용기 추락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거길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는데, 그간 먹고 사느라 바빠서 못 가봐서 너무 맘에 걸려서...”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아니 1982년, 한라산 중턱, 군용기 사고라면? 내가 두어 달 전에 두 번이나 다녀온 그곳, 원점비가 있는 그곳 아닌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두어 달 전 난생처음 등반한 한라산 관음사 코스의 원시림 풍경에 반해서 그 뒤에 다시 올라가다가, 원점비 표지판에 우연히 눈길이 갔다. 그 표지판에는 1982년 2월 전두환 대통령 제주 방문 경호 작전을 수행하던 공수부대 요원 53명을 태운 군용기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감행하다 이 근처에 추락해서 전원 순직했음을, 원점비는 이곳에서 150미터쯤 떨어져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문득 그 사고 현장과 현장 부근에 세워졌다는 원점비를 확인하고 싶어서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로지 검디검은 바위들이 널려 있는 깊디깊은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 계곡에서 다시 조금 올라가니 원점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날밤 나는 젊은 병사들이 그 계곡에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는 악몽을 꾸었다. 그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또 한 번 막걸리를 한 병 사들고 그 장소를 다시 찾기도 했다. 술 한 잔 뿌리면서 조용히 말씀드렸다. 당신들이 그토록 열심히 지킨 조국이 이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으니 마음 놓고 쉬시라고.

헌데, 이 예초기 유통사 대표의 사촌 형이 그곳에서 산화한 공수부대원 중 한 명이었다니. 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전 대표님, 거기 제가 너무 잘 알아요. 거긴 아무나 못 찾아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다음날 전 대표와 그의 친구를 관음사 등산로 입구에서 만났다. 등산로 입구에서 계속 오르막으로 두어 시간 올랐을까. 원점비 표지판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 표지판에서 꺾어져서 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부터였다. 전 대표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는 계곡을 내려가고 오르는 동안 말 한마디 없었다. (평소 그는 거의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에너자이저 스타일이다).

드디어 나타난 추모비 앞에 구르듯 달려가는가 싶더니, 그 비석 앞에 한참을 엎드려 어깨만 들썩거렸다. 그 안에서 조용히 통곡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물기 젖은 눈을 훔치면서 공손하게 갖고 온 잔에 막걸리를 따르곤, 절을 올렸다. 그러더니 내게 두어 차례나 정말이지 동행해줘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데 나는 전 대표의 눈물을 본의 아니게 두 번이나 목격한 셈이었다. 한 번은 육체적 통증으로, 한 번은 마음의 통증으로 흘리는 눈물을.

# 그 뒤 이야기

제지기오름 사고 당시 전 대표는 눈을 감았던 그 순간에 마음속으로 신에게 이런 기도를 올렸단다. 제발 제 눈만 멀지 않게 해 주십사고, 이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죽을 때까지 제주올레를 힘이 닿는 한 돕겠노라고.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그리곤 실제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지난 10월 7일 그는 회사의 공동대표인 아들과 함께 제주올레여행자센터를 찾았다. 예초기와 관련 부품까지 향후 5년간 무상 공급, 무상 수리해준다는 후원 협약을 체결했다. 이 회사의 제품을 제공받아, 시운전해본 탐사팀의 임연택 전문위원은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번에 한일상역에서 제공해주신 예초기는 그동안 저희들이 써온 제품보다 모든 면에서 성능이 좋습니다. 출력, 부하, 진동, 절삭, 그립감 등 작업하기에 여러모로 편합니다”

아, 내년 본격적인 예초 전쟁이 찾아오더라도 좋은 무기를 갖고 있으니 한결 걱정을 덜었다. 참으로 구구절절 사연 많았던 한일상역과의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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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기 2021-10-15 09:42:49 | 175.***.***.55
감사합니다. 매번 무더운 여름에 예초해주시는 분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덕분에 편하게 아름다운 제주올레를 걷습니다^^

감동 2021-10-15 12:14:15 | 110.***.***.230
읽을수록 감동이네요. 대장동 화천댜유니 뭐니, 손바닥 왕자 논란 등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그래도 이 글을 읽으니 뭔가 치유가 됩니다

박혜숙 2021-10-16 11:49:18 | 39.***.***.188
글을 읽으면서 함께 눈시울이 을컥해집니다. 이런 고마운 마음이 모여 아름다운 올레길이 유지된다니 내가 걷는길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네요. 예초기대표님 마음에도 올레길이 큰 위로가되길 바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