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 아아, 그곳은 언제나 다정한 곳 일레라
1월 14일. 며칠 동안 제주 역사상 50년 만이라는 엄청난 폭설이 쏟아진 후 모처럼 맑고 따뜻한 날이다. 내 동생이자 올레길 조성 초반에 어려운 여건에서 길을 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 쏟았던 첫 탐사대장 동철이가 일 년 전 이날 하늘 올레로 떠났다.
평소 그 친구의 성격에 비추어 격식을 갖춘 제사상을 받으러 오거나, 위패와 사진이 안장된 갑갑한 납골당에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사후 영혼이 있다면 올레길이나 한번 둘러보러 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어느 코스? 우리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6, 7코스? 아니 아니 머릿속으로 도리질을 쳤다. 그래그래! 분명히 우리가 트레일 조성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이, 하지만 온갖 정성을 다해서, 갖은 어려움을 뚫고 만들었던, 그 애 표현에 따르면 ‘마흔일곱 번을 드나들면서 만든’ 1코스를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외버스를 타는 동문로터리 정류장에 이른 시간은 이미 오전 10시가 넘어서였다. 십여 분 기다린 끝에 201번 버스를 탔다. 바닷가 해안 마을을 낀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도는 이 버스는 올레꾼들에게는 친구 같은 고마운 교통수단이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즐기는 동안 어느 코스 시종점이건 다 데려다주는. 올레 초반에는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을 외느라고 고생깨나 했지만, 언젠가부터 ‘올레 OO 코스 시작점입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정류장 이름과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6코스 쇠소깍, 5코스 남원포구 4코스 표선 3코스 온평포구 2코스 광치기... ‘오랜만에 오는 시흥리가 내가 사는 서귀포에서는 참 먼 곳이었구나.’ 새삼스레 드는 생각이었다.
1코스 시작점보다 한 정거장 먼저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길에서 만난 아주망이 내게 어디 가는데 여기서 내리냐고 묻는다. 난 올레길 간다고 했더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혀를 끌끌 찬다. 여기 가게에서 물 한 병 사서 가려고요. 대답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에고 그 상점 문 닫았주. 할머니가 너무 나이 들 어부 난 힘들어서.” 그 대답을 듣고선 세월의 흐름을 새삼 실감한다. 14년 전인 2007년 여름 처음 이 마을 시흥리에 길을 내기 위해 들른 후 무던히도 자주 이용했던 동네 구멍가게였는데. 하기야 환갑 갓 넘긴 내 동생도 그러는 사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이미 노인이었던 가게 주인이 힘에 부쳐서 가게를 접는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애기 소나무가 늠름한 청년 소나무로 성장하다니
입구에 두어 곳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는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초입의 밭길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화산토의 검붉은 싱싱한 에너지로 꿈틀거리면서 새로이 심어질 작물을 기다리는 빈 밭도 있고, 싱싱한 푸른 잎으로 온통 뒤덮인 채 하얀 알몸을 땅속에 숨긴 무밭들도 보인다.
처음 이곳을 답사차 찾았을 때 심긴 작물은 그 유명한 당근이었지만, 땅속에 몸을 숨긴 당근 위로 솟아난 푸르르고 낭창낭창한 잎사귀를 보고선 아스파라거스라고 했다가 동철이에게 두고두고 놀림을 받았다. 시장에서 줄기를 다 다듬은 당근만 봤던지라 당근 이파리를 몰라본 것이었다. 올레길을 조성한 지 13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이파리만 보고서도 무슨 작물인지 알아볼 만큼은 되었으니 이젠 놀림을 면할 수준이 되었는데...
예전에 마을 이장님이 자기네 어렸을 적에 소풍 갔던 곳이라고 소개하면서 올라가다가 잡초가 너무 무성한 걸 보고선 낫을 들고 헤치면서 걸었던 그 말미오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 오름 정상에서 보이는 우도와 일출봉... 그리고 그 사이에 펼쳐진 조각보 같은 초록의 밭, 밭, 밭.... 처음 보고선 나와 동철이 우리 둘 다 입을 못 다물었던 그 광경은 지금도 여전하다.
관광 1번지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지라 어지간한 풍경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우리들에게도 말미오름이 보여주는 풍광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 광경을 나중에 올레코스 개장날 오지 여행가 한비야에게 보여줬더니 그녀는 “이건 영주 십경의 첫 째 순서로 넣어야 해. 아냐 한국 제1경, 아니 아니지 우주 제1 경이야”라고 엄청난 찬사를 쏟아내기도 했다.
시흥리 지경인 말미오름에서 내려오면 알오름이 다가온다. 알오름 오르는 언덕에 소나무 한그루가 방긋 웃으면서 나 홀로 올레꾼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두어 달 전 축제 때에도 이곳을 찾았는데, 그때는 동행들이 많아서 소나무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했었다.
이 소나무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저게 제대로 자랄까 싶을 만큼 어린 아기 소나무였다. 첫 축제가 열린 2010년에는 이 소나무 옆에 풍금을 올려다 놓고, 참가자들에게 풍금을 쳐보라고 했었다. 저마다 마음 한편에 간직한 추억을 꺼내 들고 풍금을 치면서 동심으로 돌아갔던 첫 축제의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말미오름이 시흥리 지경인 데 반해, 이곳 알오름은 종달리 지경이다. 시흥리와 종달리는 이렇듯 육지에서도 이웃이고, 바다에서도 여(바닷가의 큰 바위를 일컫는 제주어)를 두고 서로 우리 것이라고 다툴 만큼 가깝고도 먼 이웃. 뿌리 깊은 그 앙숙 마을의 사연을 전혀 몰랐던지라 우리는 말미오름과 알오름을 연결한다는,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케이스였다고나 할까.
알오름이 보여주는 풍광은 말미오름보다 한 술 더 떠서, 그야말로 사통팔달 360도로 북쪽으로는 구좌의 오름군락이 빚어낸 초록의 항연을, 남쪽으로는 지미봉에서 우도와 일출봉의 블루의 향연을 차르르 펼쳐놓는다. 이러니 어찌 말미오름과 알오름을 잇지 않을 수 있으며, 1코스가 완주자들이 최애 하는 풍경이 아니 될 수 있겠는가. 알오름 능선 언덕에 앉아 있노라니 올레길에서 울며 웃으며 보낸 지난 13년 간이 주마등처럼 차르르르 스쳐 지나갔다. 동철아. 네가 있는 그곳도 여기만큼 아름답니? 그곳에서도 여기 알오름 풍경이 보이니?
# 편의점 대신 ‘승희상회’를 고집해온 아주망
알오름에서 내려와서 한참 농로길을 걷다가 해안도로를 만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종달리 마을이다. 내가 아는 한 올레길이 생기고 나서 가장 적절하게, 좋은 방식으로 변화한 마을이 아닐까 싶다.
마을과 어울리지 않은 크고 높은 건물은 하나도 들어서지 않은 대신, 시골 촌집을 그 크기와 겉모양은 그대로 유지한 채 안에만 리모델링한 작고 예쁜 가게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심야 술집도 있고, 작은 책방도, 도예 그릇과 소품을 파는 가게도 있다. 이름이 ‘바다가 안 보이는 카페’도 있고, 올레 1코스에서 처음 만나서 결혼에 이르고 아예 이곳에 정착한 올레꾼 커플이 낸 ‘제주 카페’도 나타난다.
노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인지라 세월이 흐르다 보면 빈 집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렇게 젊은 이주자들이 마을에 스며들어서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거대 자본이 들어와서 대규모 토목공사로 마을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바뀐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기에.
앗, 승희상회다. 올레길을 처음 낼 때부터 이 마을의 유일한 상점으로 오름 두 곳을 올랐다가 내려온 목마른 우리에게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했던 곳. 들어가서 생수 한 병을 사면서 쥔 아주망에게 말을 건넨다(아주망은 물론 날 기억하지 못하지만).
“승희 상회 여전하니 너무 반갑네요. 어떻게 편의점으로 바뀌지도 않고 그대로시네요.”
그러자 아주망이 대답한다. “편의점 하라고 여러 군데서 다녀가신대 내가 안해수 다게. 24시간 문 열어야 하고 하루도 쉬지도 놀지도 못하고. 나 같이 나이 든 사람은 아프면 쉬기도 허곡, 일 이시민 보러 가기도 해사 되곡. 가난이 편안으로 속 편허게 살아사 주.” 맞는 말씀이라고 맞장구를 격하게 쳐드렸다.
# 아,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그 푸르른 청년 강승우
제주 최초의 염전이었다는 소금밭을 지나니 드디어 종달-시흥 해안도로가 나타난다. 갯벌이 바닥을 드러내고 암반이 골격을 다 드러낸 겨울 바닷가에는 철새들이 주인이다.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세다가 멈추고 만다. 바닷가를 걷다가 스탬프 박스가 있는 목화휴게소에 들어가서 한라산 소주를 한 병 샀다.
동철이가 한여름 불볕 더위에 지쳐서 물속에 갑자기 풍덩 뛰어들곤 했던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서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부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마저도 좋아하는 술을 마시다가 죽겠노라고 큰소리치던 내 동생, 조폭으로도 살아봤고 탐사대장으로도 살아봤으니 이 세상 여한 없이 살다 간 내 동생, 그 좋아하는 술을 끊으면서까지 한두 해 더 살고 싶지는 않다던 내 동생을 향해 바닷가에 한 잔 뿌렸다. “동철아. 누나가 주는 술 한 잔 받으려무나” 소리치면서.
그에게 술을 한 잔 권하고 성산포 일출봉을 향해 걸어가는데 커다란 추모비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전에 세워져서 늘 그 자리에 있던 호국영웅 강승우의 추모비였다. 이곳 시흥리 출신으로 그 유명한 백마고지 삼영웅 중 한 명으로서 고지를 지키고 장렬히 전사해서 어린이대공원에도, 전쟁기념관에도 ‘백마고지 육탄 삼용사상’으로 세워졌다는 제주의 전설적인 호국영웅이다. 문득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다가가서 처음으로 추모비에 쓰인 연혁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1930년 출생. 51년 6월 부산 동래 육군 보병학교 입교, 51년 12월 육군 소위 임관. 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
종달-시흥 해안도로에는 호국영웅 강승우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1270-6번지부터 210번지까지 1.6km에 달하는 구간은 故 강승우 중위의 명예도로로 지정됐다. 강 중위는 1951년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해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인 1952년 10월 12일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 전투에서 수류탄을 무장한 채 부하 소대원(오규봉, 안영권 일병)과 함께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을 집어 들어 육탄 돌진해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산화했다.
아 그의 나이 만 22살에 세상을 떠났구나. 전사한 그에게 미국은 은성무공훈장을, 조국 대한민국은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지만, 푸르른 청년을 졸지에 떠나보낸 이곳 고향 시흥리 부모 일가친척들에겐 그 훈장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가슴이 먹먹하고 아려왔다. 내 동생 환갑 생일날 쓰러져서 환갑을 병상에서 맞이하고 눈을 감았으니, 청년 강승우에 견주면 참으로 오래 살았구나. 나는 그 길 위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