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커플에서 제주 올레길 커플로...그 남자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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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커플에서 제주 올레길 커플로...그 남자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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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2) 속도전으로 살던 그 남자의 변신 이유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내가 그들 부부를 만난 건 올해 제주올레걷기축제 때였다(알고 보니 그 훨씬 전인 십여 년 전부터 그들 부부는 매년 축제에 참가했었다니 구면인데도 몰라본 것이다.) 3,000여 명의 인파가 몰려서 같은 코스를 줄지어서 걷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소수가 전 코스에 흩어져서 따로 걷는 분산형 축제라서 나는 그들 부부와 제대로 눈 맞춤을 하고 마스크를 쓴 채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7코스 출발점인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만나서 아마도 삼매봉 남성대 즈음에서였던 것 같다. 함께 사진을 찍자는 그 중년 남성은 고향이 제주시 고내이고, 부인은 제주시 삼양이란다. 머릿속으로 아 남편은 올레 15코스, 부인은 18코스구나, 생각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사진을 보내달라고 내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제주 출신이 올레 완주에 도전한다기에 더더욱 반가운 마음이었기에.

서진 =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서진 =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축제가 끝난 뒤 그 남자에게서 그날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긴 카톡이 날라왔다. 축제가 열린 23개 코스는 물론이고 나머지 섬 코스까지 다 완주했단다. 축제 때 자기 팀을 리드한 류동현 반장을 앞세우고 추자, 가파, 우도까지 다 돌았다는 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

무엇이 제주 출신인 이 부부를 완주에 도전하도록 만들었을까, 그들은 고향에 난 이 길을 걸으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궁금했다. 완주증을 받으러 센터에 오는 날 부부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더니 남자는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남자 이름은 박희철, 여자 이름은 이 축생. 둘 다 61년생, 올해 나이 60세란다.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센터에 갔더니, 어라, 두 명이 아닌 네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당혹해하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알고 보니 한 명은 딸이고, 다른 한 명은 축제 때 그들 부부를 잘 이끌어주고 섬에까지 데려다준 류반장이었다. 내가 두 분 기어이 완주하셨다니 참 대단하다고 했더니, 그 남자 왈 “아마 사연을 알면 더 놀랄걸요. 지금은 빙산의 일각, 1%만 아시는 거고요.”라고 대답한다. 아, 이 자신감은 또 뭐지 싶었다. (나중 얘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 캠퍼스 마사회 커플에서 올레길 커플이 되다

그들은 알고 보니 제주대 캠퍼스 커플이었다. 남자는 축산학과를, 여자는 원예학과를 같은 해에 입학해서 4H 연구회, 농악반 등 서클 활동을 같이하고 강의도 같이 들으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다가 6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단다.

남자는 수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사람보다 동물과 더 많이 소통하면서 자랐고, 특히 말과 너무나 친해서 ‘상 몰 테우리(최고의 말 몰이꾼)’로 불렸단다. 대학 시절 제주 조랑말 천연기념물 지정에 기여한 연구발표팀 일원이었고, 제주 경마장을 만드는 일에도 관여하다가, 마침내는 중앙 마사회에 조교사로 취업하게 되었더란다. “조교사가 뭐죠?” 물었다. 마주에게 말을 위탁받아서 관리하고 기수들을 감독하는 축구로 치면 선수가 아닌 감독 격인 역할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부인도 그를 따라서 마사회 마권 발매소 직원으로 취직하면서 캠퍼스 커플은 마사회 커플이 되었고, 삶의 터전도 제주에서 육지로 옮겨졌다. 남자는 말했다.

“그때부터 제 인생은 마치 양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리기 시작했어요. 워낙 좋아하는 일인데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일밖에 몰랐거든요.”

일 외의 유일한 취미는 경주용 자전거 타기였다. 자전거만 50여 대를 사들일 만큼 공사 간에 속도에 매료된 삶이었다. 말이든 자전거든.

그런 그의 삶에 균열을 가져온 건 부인의 병이었다. 20년 전 건강하던 부인이 갑작스레 루프스 병 판정을 받았단다.

담당 의사가 남편인 그에게 말했단다. 루프스는 근무력 근위축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병이라서 그냥 흔들의자에 앉아서 책 보는 것 정도만 해야 한다고, 하지만 쉽게 죽지는 않는 병이니 재혼은 꿈도 꾸지 마시라고. 부인은 퇴근 이후나 주말에는 줄곧 누워 있었고 가끔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대성통곡을 하곤 했다.

사진 =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사진 =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여자는 걷기 시작했다. 의사는 꼼짝 말라고 처방했는데 그녀는 집 밖에 나서서 걸을 때만 통증이 덜 느껴지거나 안 느껴진다고 했다. 여기저기 걸으러 다니더니 제주올레걷기축제가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직장에 휴가를 내서 미리 내려와서 걷고 축제에 하루나 이틀 참석하곤 했다. 행복해하는 부인을 보면서 남편도 고향에 내려와서 같이 걸으면서도 내내 투덜거렸단다.

“사실 전 올레길 마뜩잖았거든요. 이런 건 부모 잘 만난 시간 많고 돈 여유 있는 인간들이나 하릴없어 즐기는 짓이라고 여겼어요. 주민들이 땀 흘리며 농사짓거나 물질하느라 바쁜데 배낭 메고 느릿느릿 걷는 게 영 못마땅하지만 각시가 하도 좋다니까 하는 수 없이...”

​그러던 중 올해 부부에게 커다란 변수가 발생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친 코로나 19가 그것이었다. 경마 경기가 잇따라 취소되거나 연기되면서 부인은 아예 장기 휴직을 하게 되었고, 조교사인 남편도 경기가 있을 때만 차출돼서 근무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했던가. 부인은 친정이 있는 삼양에 내려와서 한동안 머물면서 올레길을 여한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중 올해 제주올레 축제가 23일이나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당장 본인, 남편, 딸아이 세 사람 완주를 신청했다. 그러나 믿었던 딸아이는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갔고, 남편은 마지못해 끌려 내려왔지만 부인은 애당초 남편이 완주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단다.

불평꾼 박희철을 날마다 길로 불러낸 것은 푸근한 심성과 너른 마음으로 너무나도 성실하게 반장 역할을 수행한 류반장이었다. 그가 코스 출발점에서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릴 걸 생각하면 집을 안 나설 수가 없었단다.

마침내 23개 코스를 걷는 축제가 끝날 즈음 그는 류반장에게 으름장을 놓았단다. 당신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축제에 포함되지 않은 섬 세 코스를 다 완주할 때까지 끝까지 반장 노릇을 해줘야 한다고. 그래서 세 사람은 축제 이후에도 동행을 했고, 날 만나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더란다.

​이런 사연을 가진 부부가 완주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그 남자의 혁명적인 변신이었다. 올레꾼을 살짝 경멸하고 빠름을 신봉하던 그가 천천히 걸으면서 고향 제주를 새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되고 느린 걷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뿐인가. 그는 목표 지향적인 인간답게 올레길에서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었단다.​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클린올레로 쓰레기를 1톤 줍기가 그 목표란다. 처음에는 클린올레도 미친 짓,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했단다. 그런다고 쓰레기를 다 주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올레꾼들이 다 버린 것도 아닌데 무슨 위선적인 쇼인가 싶었단다. 하지만 이번 축제 때 코스를 걸을 때마다 ‘짜잔’ 어디에선가 나타나서 귤을 나눠주던 자원봉사자 강올레라는 양반이

“귤껍질 하나도 절대로 길에 버려선 안된다. 그 때문에 올레꾼이 욕을 먹어서야 되겠느냐”면서 신신당부하는 말을 듣고선 생각이 슬그머니 바뀌었다. 클린 올레로 완주를 끝낸 뒤 그를 만나 식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의 전화번호를 받아두었다.

​축제 뒤 추자도를 찾았을 때였다. 근처 주민들이 버린 게 틀림없는 커피 캔을 줍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머뭇거리다가 수줍은 목소리로 “너무 고맙습니다” 그러더란다. 그 말을 신호탄으로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합창처럼 “정말 고맙습니다” “수고하십니다!” 떼창을 하더란다.

그때 그는 확신을 가졌단다. 이 일이 일파만파 이 지역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구나, 이분들도 앞으로도 쓰레기를 버릴 때 한번쯤은 망설이겠구나 싶더란다. ‘강올레씨 나이가 될 때까지 1톤을 줍자’는 목표가 절로 생겨난 순간이었다.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그는 자신의 올레 패스포트에 이렇게 썼다. 올레길에서 각시를 새롭게 보게 되고, 딸이 완전히 달라졌고, 제주를 새삼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곶자왈에서 제피나무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노라고. 그 나무의 가시가 참 치열하게 살아온 증거인 것 같아서. 그러나 내게는 경주마처럼 살아오다가 다른 세상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 그야말로 인간 제피나무 같았다.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 내내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딸에게 시선이 갔다.

딸이 완전히 달라졌다니? 그럼 이 친구도 걷기 시작한 건가, 물었다. 오늘로 6일째란다. 생전 안 걷던 딸이, 대학 들어가서 35킬로나 찐 딸이, 부모의 완주 소식을 접하고 내려와서 걷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엄마 아빠에게 걸으러 나가자고 재촉하고 하루도 멈출 줄을 모른단다.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녀와 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기대하시라.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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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n 2021-04-27 13:53:38 | 175.***.***.156
글 잘 읽었습니다.
올레길 추억에 향기가 듬뿍^^
특별한 완주 기록에
공유의 향기를 맡습니다.
많이 걷지는 않았으나
옛 생각이 떠오릅니다.

사랑의 힘 2021-04-27 13:12:25 | 175.***.***.181
대단한 남편이네요. 든든하겠습니다. 인생 뭐 있나요, 의지할 동반자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