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당시 집단학살 희생자 유해 3구 발견...그날,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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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당시 집단학살 희생자 유해 3구 발견...그날,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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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작전 참상 보여준 4.3희생자 유해 73년만에 발굴
일가족 7명 중 40대 가장 유해 발견...30대 여인, 10대 소년도
"1948년 12월, 가시리 우구리동 피신 중 군.경 토벌대에 학살"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종합] 제73주기 제주4.3희생자추념일을 앞두고, 4‧3 당시 대량학살을 초래한 군경 토벌대에 의한 초토화작전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4‧3희생자 유해 3구가 발굴됐다. 

오랜 세월 차디찬 땅 속에 묻혀 있던 억울한 죽음의 희생자 유해가 73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자,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지 주민들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31일 오후 3시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속칭 '우구리동산’에서 4.3유해 발굴 보고회를 개최하고, 이곳에서 4.3유해 3구가 발굴됐다고 공식 밝혔다.
 
이번 유해 발견은 지난 2018년 유해 발굴작업이 시작된 후 3년 만에 이뤄졌다.

제주도와 4.3평화재단은 4.3희생자가 암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7곳 중 가시리 일대에 대한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22일 4.3유족회와 제주도.재단 관계자 등 15명이 참여한 가운데 유해발굴 개토제를 진행했고, 24일부터 26일까지 일영문화유산연구원에서 시굴 조사를 진행하던 중 유해가 발견됐다.

발견된 지점은 속칭 우구리동산에서 4.3당시 토굴과 움막이 있던 자리에서 200~300m 떨어진 가시리 2227번지 감귤과수원 한쪽 모퉁이였다.

이번에 발굴된 유해는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대상으로 초토화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1948년 12월 21일, 가시리 마을 내 토굴과 움막에 피신 중이던 이 마을 주민으로, 열한 살의 어린이와 30대 여인도 포함됐다.

결정적 제보를 한 강군섭 할아버지(79‧표선면 가시리)는 "어릴 때부터 (현재의 발굴지에) 4‧3 유해 4구가 묻혀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면서 최근에 4‧3평화재단과 제주4‧3연구소에 조사 발굴을 요청했다.

강 할아버지는 이날 현장 설명에서 이 유해들은 일가족 7명이 몰살당한 이 마을 출신 강원길(당시 48세)과, 다른 가족인 김계화 여인(당시 32세)과 그 아들 강홍구(당시 11세)로 추정했다.  
 
강 할아버지에 따르면, 이들 희생자들은 1948년 12월 21일 가시리 남쪽 ‘우구리동산’ 토굴과 움막에 피신 중이던 두 가족의 시신으로, 토벌대에 의해 현장에서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되던 1948년 11월 15일, 군경 토벌대는 가시리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했다. 이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0여 명이 희생됐고, 토벌대의 방화에 의해 가옥 250여 채가 불에 탔다. 

가시리 주민들은 11월 22일 "해변마을인 표선리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부 주민들은 표선리나 토산리 등 연고를 찾아 해안마을로 떠났지만, 일부 주민들은 겁에 질려 하산하지 못하고 불에 타 버린 마을 안 토굴과 움막에 임시 거주하고 있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과 관련한 제보자인 강재섭 할아버지가 31일 자신이 전해들은 4.3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과 관련한 제보자인 강군섭 할아버지가 31일 자신이 전해들은 4.3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 "한살 갓난 아이 포함 일가족 7명 참혹한 몰살"

제보자 강 할아버지는 희생자 유해 중에는 자신과 먼 친척되는 강원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4‧3위원회의 희생자 신고자료와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등을 종합하면, 강원길은 가시리 폭남동 주민으로, 당시 부인인 고열평(당시 47세), 딸 강대열(당시 12세, 이명 강순열), 아들 강봉일(7), 딸 강태일(5)와 둘째 부인 오차여(당시 46세) 등 일가족 7명이 모두 몰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희생자 김계화 여인은 강태춘(당시 33세)의 부인으로 아들 강홍구와 함께 이번에 발굴된 유해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살 된 갓 난 아들 강홍주도 죽임을 당했다. 그날 남편 강태춘도 총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지만, 얼마 뒤 사망했다. 다만 딸 강순자(당시 10세), 아들 강홍권(당시 6세)은 할머니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죽음을 모면했다. 

발굴조사단은 유해 4구가 묻혀 있다는 제보자의 주장을 감안, 아직 찾지 못한 유해 1구 발굴작업은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4‧3희생자 발굴유해 유전자 검사를 전담하고 있는 서울대 법의학교실 이숭덕 교수는 “이번 발굴된 유해와 앞서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친인척분들의 채혈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해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일영문화유산연구원 박근태 박사는 “제보자가 주장하는 학살현장인 토굴과 움막과 현재의 유해 발굴지점은 200~300m 거리가 있는데, 어떻게 이곳으로 유해가 옮겨졌는지, 머리뼈 등 일부 유해만 옮겨졌는지, 다른 가족들의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조사해야 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현장보고회에 앞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례를 봉행했다. 제례에는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좌남수 제주도의회 의장, 오임종 제주4·3유족회장,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어진 보고회는 시굴조사를 담당했던 박근태 일영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의 발굴 현황 설명과 함께 이숭덕 서울대학교 법의학 교수의 유전자 감식에 대한 설명, 강군섭 할아버지의 증언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에서 31일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제례가 진행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현장. ⓒ헤드라인제주

 

◆ 73년전 자행된 집단학살, 가시리 마을에서는...

1948년 10월 17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은 본격적으로 초토화작전을 선포하는 신호탄이었다. 진압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은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 전부가 해당되었다. 중산간마을에서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폭도배로 인정해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고 포고문에서 밝혔다.

1948년 11월 중순경 대규모의 초토화작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3 당시 총 82개의 중산간마을 중 주민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은 35개로, 표선면 가시리는 주민 희생이 많은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표선면 가시리 마을 주민들이 희생됐던 대표적인 집단학살은 표선리 ‘버들못’ 집단학살과 표선백사장 집단학살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는 표선면 가시리를 급습했다. 이날 희생된 30여 명의 성별과 나이는 당시의 처참함을 대변해 준다. 젊은이들이 급히 피신한 가운데 집에 남았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집집마다 불에 탔고, 자연마을인 ‘새가름’과 ‘종서물’은 폐허가 되어 ‘사라져버린 마을’이 되었다.

11월 22일 가시리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은 연고를 찾아 표선리나 토산리로 이주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내려가지 못한 채 폐허가 된 마을 주변과 들녘을 헤매다 토벌대의 수색전에 총살당했다.

이번에 표선면 가시리 마을에서 발견된 총 3구의 유해도 가시리 소개 와중에 토굴과 움막에 임시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의해 1948년 12월 21일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가시리 수색이 있던 그날인 12월 21일. 경찰은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 생활을 하던 가시리 주민들에게 갑작스럽게 집결 명령을 내리고,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이후 경찰들은 호적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가족이 모두 함께 있는 사람들과 가족 중 한 명이라도 그 현장에 없는 사람들을 분류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없는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으로 따로 선별했다. 

경찰은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된 주민들 90여 명을 표선리로 끌고 갔다. 이들은 다음날인 12월 22일 표선리 ‘버들못’(현 표선변전소 옆 밭)에서 모두 집단 총살당했다. 

4·3위원회에 신고된 버들못 희생자는 87명, 미신고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총 92명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여성 희생자가 44명(48.0%)으로 희생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참혹성을 말해주고 있다.

1949년 2월 1일에는 토벌대가 표선국민학교에 수용 중이던 가시리 소개민들을 또다시 집결시킨 뒤 주민들을 분류했다.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표선면사무소 창고로 연행된 후, 표선백사장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이날 가시리 주민 41명이 학살되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10살 미만의 어린아이와 여성, 50~60대 민간인들이었다. 

가시리 마을을 비롯해 많은 마을 주민들은 이른바 ‘대살’이라는 학살을 당한 것이다. 군경토벌대는 즉 중산간마을에서 해변마을로 소개 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졌다면, ‘도피자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청년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나이 든 부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자녀 등 주로 노약자들이 총살됐는데, 주민들은 가족 대신 죽는다는 뜻으로 ‘대살(代殺)’이라고 불렀다. 

4·3 당시 가시리 마을은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으로 인해 총 421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제주도에서 노형리(538명), 북촌리(446명)에 이어 세 번째로 주민 학살이 가장 많았던 마을로 꼽힌다. <헤드라인제주>

<출처 >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98~400쪽, 2003.
∙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198쪽~213쪽,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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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 2021-04-05 23:26:49 | 119.***.***.101
오랜시간이 지난 사건이지만 이제서야 유해가 발견이 되었네요
발굴된 유해가 모두 가족들이 같이 묻혀있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1살이된 애기까지..
빠른시간내에 유전자 감식을 통해서 가까운 친적들이 발견된 유골 모두를 따뜻한곳으로 모셨으면 합니다.

박두화 2021-04-06 17:33:52 | 112.***.***.90
이것이 4.3 의 진실이다.
나의 외조부또한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70년이 흘렀어도 깊은 골은 쉬이 잊혀지지않는다.
무고한 어린생명과 불짚혀지는 초가지붕을 바라보며 마음조렸을
누군가의 어버이이자 누군가의 자식이였을 그들이 어찌하여
시퍼란 총칼앞에 목숨을 내놓아야했단 말인가.
너무나도 쓰라리고 허탈한 가슴에 쌓인한이
다시 반복되는 일이 생길까.
제주가 그래서 아프단 말이다.
화해와 용서는 너무 무너져버린후라 그저 그런가부다 하지만
다시 총칼에 권력이 이용된다면 그 원인자는 발본색원하여
똑같은 아픔을 주고싶을 뿐이다..
미군의 사과와 그당시 정권이 이용자들은 되새겨 이후 역사에서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한다.
다시는 이땅에 아비없는 자식으로 홀로남겨지는 일은 없어야할것이다.

역사의 다시없을

이정 2023-08-05 14:07:28 | 106.***.***.119
국내어도 징별적 손해배상이' 여러분야에서 허용되고잇다
예를 들어. 편의점에서 라면과 오뎅. 우유. 담배 라이터에대해선'''징벌적 손해배상을 해준다..(손해금의'' 3~5배 한도로)
그런데. 김밥에서'문제가 생겻다. 뭐다냐 저쪽은 손해에' 다섯배까지' 배상을 하며 같은 상점에서. 차별하냐... 헌법에서. 평등권을' 침해하고 잇다며... 국가가 반인륜적 벙죄를''저질 럿는데'' 실손 보상은 커녕 공익을 위해 보상액을 낮출수 잇다고..''그래서'억울한 학살 피해 유족들이. 다들'꼼짝 마라한다
그렇담'과연 공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수 잇는건 무슨법 조항을 근거로. 하는걸까, 헌법에 공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ㄷ재산귄을 제한하는듬. 할수잇다고 다만 정당한'보상을'해야한다
고 명기됨.그럼. 과연''정당ㄴ 보상이. 카드깡하듯. 전반이나 30 퍼센트 정도의 보상액을. 만 하는걸까' ...통상적 평균적 의미에 가까울것이다... 28 세 청년 사망시. 본인과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