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농업과 민중 항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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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농업과 민중 항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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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65)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민 항거로 동학농민운동이 있다. 조선 시대, 1894(고종 31)년에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에 농민들이 항거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제주에도 동학농민운동과 유사한 민중 항거들이 많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육지와는 달리 봉건적 신분제나 지주 전호제가 대단히 미약하였고, 육지의 산간 지방에서처럼 중소 지주나 영세한 자작농, 자소작농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미개간 국유지가 많고 어업, 목축 등의 보조 생계 수단이 확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무산자나 임노동자 또는 걸인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사회, 경제적 동질성이 강하였고 이는 농민 항쟁 시 동일한 적대 세력에 대한 강한 계급적 연대성을 발휘하여 전 제주도민이 참여할 수 있었던 조건이 되곤 하였다.

또한 제주 민란 발생의 공통적 배경으로 특유의 토지 보유 구조와 주세 수취 구조를 들 수 있다. 원래 제주도의 경지는 공토(公土)로서 전답에는 소유권이 없었으며 그 매매 역시 오직 사용권의 매매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농민들도 지세가 아닌 지대를 납부하는 국가 소작인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경작권, 사음권, 지대율 등이 불안하고 이를 매개로 한 봉건적 수탈 착취가 용이하게 자행될 수 있는 토지 보유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제주도는 공물 상납을 제외하고는 행정과 재정 운영이 거의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중앙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는 자의적인 통치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악용의 소지가 많았다. 그래서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들은 거의 다 수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때문에 제주도민은 전통적으로 국가 권력의 수탈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하였다.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난 시기는 탐라가 고려에 병합되던 12세기부터이다. 이때의 민란은 탐라령의 횡포나 고려의 압정에 저항하면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 정벌 직후 원은 제주도를 그들의 직할지로 삼았는데, 외세의 지배 하에서 탐관 오리의 가혹한 수탈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고려와 몽고의 이중적인 과세, 원의 일본 정벌 준비 과정에서의 가혹한 노역 등이 더해져 민란을 촉발시켰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빈번한 민란이 되풀이되다가, 조선이 건국하면서 잠시 평화의 시기를 맞았으나, 다시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삼정(三政)의 문란에 분격한 농민들이 궐기하여 임술민란을 일으킨 것을 기폭제로 잇달아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대표적 민란으로는 ‘사용, 김성의 난’이 있다. 『고려사』 충숙왕 5년 「2월조」에 “제주민 사용, 김성 등이 무리를 모아서 난을 일으켜 성주, 왕자를 내쫓았다”라고 되어 있다. 관리와 토호 권세가의 이중적인 가렴 주구가 난의 원인이다. 또한 ‘목호의 난’은 원에서 제주도 목장에 파견하여 목마에 종사케 했던 몽고인들이 일으킨 난이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탐관 오리의 침탈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이외에도 1374년(공민왕 23)에 차현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일으킨 반란으로, 최영에 의한 상당수의 마필 징발도 난의 원인이 되었다.

왼쪽부터 목호의 남 삽화(정용연)돠, 4.3 당시 오라리 방화사건.
왼쪽부터 목호의 남 삽화(정용연)과, 4.3 당시 오라리 방화사건.

조선시대의 대표적 민란으로 우선 임술 농민 항쟁은 1862년(철종 13) 당시 임헌대 방어사가 특정인의 청탁을 받아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고 그 부담을 농민에게 떠넘겨 징수하는 등 가렴 주구를 멈추지 않음에 따라 발생하였다.

1862년 10월 안덕면 서광리에 살았던 강제검과 제주목에 살았던 김흥채 등이 삼읍의 농민을 이끌고 제주성문을 부수고 관청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결국 임헌대 제주목사는 화북으로 도망가서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강제검과 김흥채 등은 목이 베어져 저자 거리에 내걸렸다. 경인민란은 1890년(고종 27) 12월 목사와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의한 민중 봉기였다. 1888년 제주에 부임한 송구호 제주목사와 1890년(고종 27) 부임한 조균하 제주목사는 민간의 재화를 갈취하는 데 급급하였다. 이에 홍수와 흉년, 호열자의 만연, 그리고 부역의 되풀이 등으로 오랫동안 비참한 상황 속에 놓여 있던 농민들은 애월읍 하귀리 출신 김지의 선동 하에 제주성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김지는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농민들을 해산시켰다. 이에 1891년(고종 28) 정의현이 이완평, 현계환 등이 수많은 민중을 모아놓고 관리와 악질 토호들의 비위 사실을 성토하고 강력한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난이 진압되면서 이완평 등 4명은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병신민란은 1894년(고종 31)에 일어났다. ‘홍범 14’조를 위시한 각 분야에 걸친 새 체제의 급격한 강행은 당시 동요하던 민심을 더욱 자극하여 민중 사이에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1896년(고종 33) 3월 제주 사람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수천 군중을 이끌고 신설된 경무청에 난입하여 ‘제도 개혁 반대, 왜양축척(倭洋逐斥)’ 등을 내세워 민란을 주동했다. 그러나 이 난도 관군에 의해 진압된 후 송계홍은 자결하였으며, 강유석은 도망쳤으나 그의 자식들은 체포되어 참형되었다. 무술민란은 1896년(고종 33)에 이병휘 제주목사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일어난 난이다. 화전민인 방성칠은 원래 전라도 동복군 사람인데 제주목사의 가렴 주구에 분노해 마침내 동헌으로 몰려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주목사의 횡포가 줄어들지 않자 난을 일으켰고, 주성을 점거한 민란군은 관덕정 광장에 모여 밤새 함성을 지르며 제주목사와 군수를 비롯한 탐관 오리들의 비행을 성토했다. 그러나 이후 난이 진압되면서 방성칠은 대중 앞에서 붙들려 난자당하여 죽었다. 천주교란은 1901년(고종 38)에 발생했다. 이 난은 당시 구마슬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인 특수 권력과 이에 편승한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제주도민들이 궐기하여 일어난 난이다. 당시에는 천주교도가 살인을 해도 관리가 체포하지 못했으며 시체의 검시도 허용하지 않았다. 천주교도가 남의 부녀를 빼앗거나 강간을 해도 백성은 이에 항의하지 못했다.

천주교도들은 이미 팔아넘긴 토지가 다시 필요해지면 원가만 지불하며 늑탈하고, 교회에 끌어다가 사형을 가하고 성서나 포교 책자 등을 강매하였다. 또 천주교도들을 비방하는 행위를 천주교에 대한 모독으로 단정 지어 교회에 연행한 뒤 징벌, 체형 등을 함부로 하였다.

이처럼 불법 행위와 약탈 행위가 극에 달하자 대정군의 유지들이 탐관 오리와 불량 교도들의 불법 행위에 대항할 자위 집단으로 상무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당시 대정군수 채구석을 추대하여 천주교도에 맞서자 두 세력 간의 분쟁이 야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군중이 일어섰으나 당시 장두인 오대헌은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평화적 항의가 별 다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비분을 참지 못한 이재수가 마침내 무장 봉기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 난으로 인해 피살당한 천주교도들은 400명에서 500여 명에 이른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함정이 5월 31일 제주항에 닿아 천주교도를 제외한 제주도민을 모조리 섬멸하겠다고 하였으나, 이재호 신임 제주목사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결국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은 서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프랑스 공사는 배상금 5,160원을 청구하였고, 이는 1904년 제주도민이 부담하였다.

가장 최근의 역사적 민란으로는 4.3을 회자 할 수 있다. 4.3의 발생 배경을 보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4.3민란이 발발하게 된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거듭된 제주 민란의 역사를 볼 때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란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현실 인식에 대한 주민의 꾸준한 의식 수준의 향상에 따른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민란의 당사자들은 눈앞의 탐관오리의 축출이나 선정관의 파견을 요구하였을 뿐 근본적인 모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던 것이 당시 민란의 한계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정용연(2019), <목호의 난, 1374 제주>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원 등을 두루 거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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