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가 지켜야할 농업유산, 제주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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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지켜야할 농업유산, 제주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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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50) 역사속의 제주농업 문화

제주 밭담은 제주 농촌이 다른 지방 농촌보다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 이기도 하다. 제주도는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화산섬으로 돌이 많은 지형적 특성은 제주 섬의 척박한 농업환경을 상징하기도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을 연상시키는 제주섬의 밭담은 제주 선인들의 지혜와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농업문화유산이다. 밭담 틈새를 지나는 바람은 주위 공기에 비하여 큰 속력으로 틈새를 지나 주위보다 압력이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 바람의 힘은 밭담 틈새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무척이나 허술해 보이는 밭담이 강한 바람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이다.

돌의 형태와 그에 따라 돌이 받는 마찰력 그리고 돌과 돌 사이의 구멍이 빚어내는 과학으로 표면에 많은 기공을 지닌, 비정형의 둥그런 현무암 밭담은 바람을 달래고 어른다. 구멍 숭숭 뚫린 밭담은 바람을 갈라 부드럽게 만들어 그 오랜 세월 태풍과 같은 큰 바람에도 꿋꿋이 버텨내며 서 있는 밭담의 비밀인 셈이다.

왼쪽부터 구좌읍 하도리 제주 밭담과 한림읍 귀덕리 제주 밭담.
왼쪽부터 구좌읍 하도리 제주 밭담과 한림읍 귀덕리 제주 밭담.

제주밭담이 길이는 중국의 만리장성(6천400㎞)보다 훨씬 긴 약 2만 2천 108㎞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히 중국 만리장성은 그 시대의 민초들이 집권자의 부역에 의해 조성되었지만 제주밭담은 제주 선조들의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가족단위 또는 제주만의 수눌음 공동체에 의해 쌓아졌다는 특징이 있어 역사적인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적 기록으로 고려시대(1234년) 제주판관 김구의 권장으로 경계용 밭담을 쌓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지만 제주의 척박한 농업환경을 생각한다면 그 이전부터 밭담이 조성되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땅을 개간하면서 나온 돌을 이용해 담을 쌓아 동물과 바람을 막고 수분을 유지시키는 등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제주선조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특징이 있어 제주밭담의 유래는 고려 시대 판관 김구의 권장이 아니라 그 이전 제주농업의 역사와 일맥상통 할 수밖에 없다.

제주 밭담은 제주인들이 농업활동을 영위해 왔던 수천 년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제주 선인들의 노력으로 한 땀 한 땀 쌓아올려진 농업유산으로 바람을 막고 토양유실을 막아내며 목축산업이 발달로 말과 소들의 농경지 침입을 막아 농작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제주 농업인들의 삶과 지혜 그리고 제주농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농업유산이다. 특히 제주의 밭담은 개인 또는 가족단위라는 소규모 공동체에 의해 쌓아져 왔다. 제주 전역에 걸쳐 형성된 밭담은 시간적으로 볼 때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주밭담은 마침내 2013년 국가중요농어업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 유엔식량 농업기구(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제주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돌담은 제주 선민들의 생존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으며 제주도를 상징하는 미학적(美學的) 요소이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다른 요소들, 즉 한라산과 오름, 청정바다, 해녀, 초가집, 감귤, 돌하르방과 더불어 제주도의 미학을 상징한다. 까만 돌담이 줄기차게 얽혀서 이어지는 가운데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 그것은 제주도만이 가진 색깔이자 음색(音色)이다. 바닷가 연안에 일정한 너비와 높이로 쌓아놓고 고기를 가두어서 잡는 원담(또는 갯담), 조선시대에 소와 말을 키우는 데 필요한 목장 울타리용으로 쌓아놓은 잣성,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등 읍성(邑城)과 군 주둔지였던 진성(鎭城)에 쌓은 성담, 고려 말에서 조선에 걸쳐 왜구 등을 막는 데 활용되던 환해장성(環海長成) 등이 있다. 또한 올렛담(큰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돌담), 우영담(택지 옆에 붙어있는 텃밭의 돌담) 또는 통싯담(돼지우리를 둘러놓은 돌담)처럼 돌담이 쌓인 장소나 위치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들도 있다.

집담은 집의 울타리로서 외부인의 시선으로부터 집안 내부의 모습을 차단하고, 강풍이나 태풍이 불어올 때는 바람의 강도를 낮추어 바람의 피해를 줄이고, 평소에는 지나가는 우마 등 가축이 마당 안으로 들어와서 피해를 주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한다. 또한 해안에 아주 인접한 가옥인 경우에는 파도에 의한 염해(鹽害)를 막는 기능도 있다. 또한 경작지의 소유를 구분함과 동시에 우마 등 가축들로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산담은 원래 사자(死者)의 영혼이 깃드는 공간 혹은 사자의 생활공간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와 함께 우마의 피해와 산불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도 하였다. 밭 한쪽에 길게 쌓아놓은 잣담은 근본적으로는 경작지에서 나오는 불필요한 돌들을 한쪽에 쌓아두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돌의 양이 워낙 많다보니 먼 곳으로 치우지 못하고 옆 밭과의 경계를 구분 짓는 돌담에 의지하여 쌓아두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잣담도 여름이나 가을철에 비가 많이 내리던지, 장마가 지속될 경우에는 농작물을 돌보는 과정에서 통행로로 이용하며, 또한 평소에는 농기구나 작업복 및 점심 바구니 등을 놓아두는 용도로도 이용된다.

제주인들은 이런 잣담길을 보통 잣질(잣길)이라 부른다. 원담 또는 갯담이라 불리는 어로 시설은 얕은 바닷가 연안에서 주변의 지형지물과 연결하여 1m 내의 높이로 쌓은 돌담인데, 이것은 보통 밀물을 따라 연안으로 들어온 고기떼가 원담 안에서 유영하며 놀다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은 빠지고 고기들은 얕은 물 속에 갇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잣성은 잣 또는 잣담이라고도 하는 데, 이 돌담은 조선시대 때 중앙에서 사육하는 말과 소를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방목하며 키우기 위한 울타리 역할을 했다. 잣성과는 시대적으로 조금씩 다르나, 환해장성을 비롯하여 3개 지역에 쌓여졌던 읍성이나 9개의 군 주둔지(화북, 조천, 별방(하도), 수산, 서귀포, 모슬포, 차귀(고산), 명월, 애월)의 진성에는 돌로 석성(石城)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교한 돌담으로 이루어진 성담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주도 내를 빙 둘러가며 요새지마다 쌓은 것이다.

제주도에서 돌담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새까만 현무암과 회색이나 연녹색을 띠는 조면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 중에서도 돌담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현무암이며 그만큼 양적으로도 많다고 할 수 있다. 현무암과 조면암은 모두가 화산이 폭발하여 제주 섬이 형성될 당시 흘러나온 용암류(熔岩流)에 의한 것으로, 현무암이 제주도 전역에 걸쳐 골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반해 조면암은 한라산 백록담 부근을 비롯하여 한라산 남쪽 지역 등에 부분적으로 분포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지어 보면, 회색이나 연녹색의 조면암 돌담은 주로 서귀포와 안덕 및 그 주변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검은 색의 현무암 돌담이 주를 이룬다.

제주도의 돌담은 기본적으로 자연에서 얻은 원형의 돌을 거의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근래에 들어 집담이나 밭담 등 일부는 좀더 치밀하고 일정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모가 난 부분을 부분적으로 가공하여 쌓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에 돌을 가공하는 기술이 보급되고 그에 따른 도구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제주농업이 산업화의 궤도에 진입하면서 한때는 농사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많은 밭담들이 정리되어진 부분도 있었으며 최근에는 개발의 뒷전으로 밀려 많이 손실되거나 훼손되어지는 실정 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주 밭담은 그 자체가 악조건의 제주농업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제주만의 독특한 농업유산이다. 또한 제주섬의 빼어난 농업문화경관으로 제주 농촌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대표주자이며 1,500년 넘도록 제주 섬의 농업을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앞으로 제주밭담은 보존을 전제로 문화관광, 농촌관광, 체험관광 등 제주도민을 비롯한 전 국민들에게 제주의 가치를 제공 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이다. 제주농업의 역사와 맥락을 함께해 온 제주밭담은 전 세계의 농업유산으로 제주가 보전해야 할 가치가 있는 자원인 것이다

※ 참고자료: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유정(2015), <제주돌담>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원 등을 두루 거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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