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수의 꽁트](12) 실수한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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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의 꽁트](12) 실수한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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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나타난 택시까지 길 건너에서 지나는 것을 봤을 때 나의 머리에 떠오른 말은 ‘머피의 법칙’이었다. 전에는 분명히 이쪽 편에서 택시 잡기가 쉬었는데 하필 오늘 따라 저쪽 편으로만 다니다니, 되게 재수없는 날이다 싶었다. 교통의 흐름을 눈 여겨 보았더니, 이 시간에는 길 건너에서 차량 통행이 많을 이유가 있었다. 아침 시간에는 제주시내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차량이 많고 저녁 시간에는 들어오는 차가 많다는 것인데 지금 길 건너에서 질주하는 차들이 많은 것은 지금이 아침 시간이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머리가 나쁘면 다리를 고생 시키기 마련이지, 나는 급히 생각을 바꾸고는 횡단보도로 걸어가서 신호등을 기다렸다. 허비한 시간이 10분은 될 것 같았다.

길을 건넌 자리에서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시내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빈 택시가 하나도 없어서 초조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침 시간에 도시 외곽으로 가는 차가 많다는 것이 여기에서 택시 잡기가 쉽다는 말은 되지 않겠다 싶었다. 주말을 즐기기 위해 토요일 아침에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택시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에도 손님이 없는 빈 택시가 나갈 리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아침 시간에는 도시 밖으로 손님을 태워다 주고 들어오는 빈 택시들이 많을 것이 아닌가.

나는 부랴부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넜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어서 나는 마음이 마냥 다급해졋다. 한참 만에 나타난 택시에 올라타면서 나는 소리 질렀다.

--종합운동장까지 10분 안에 갈 수 없겠습니까.

택시운전사에게 재촉을 하긴 했지만, 시계를 보니까 나의 독촉은 너무 무리일 것 같았다. 당황해진 나는 오늘 행선지를 급히 바꿀 결심을 했다. 나의 고향마을 향우회의 총회 겸 야유회가 중산간 마을 교래리에서 열리는데, 오늘 아침 아홉 시에 오라동 종합운동장에서 집결하기로 된 시간이 거의 되었던 것이다. 대절버스 업자들은 시간 엄수를 사업간판으로 한다고 했고, 단체행동에 비협조자가 되기도 내키지 않은 일이어서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총회 참가 못함.’

나는 향우회 회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좀 안심이 되었다. 택시 잡기에 실수한 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이 들면서 발길을 끊었던 향우회였는데 이번 야유회에는 특별히 나가보기로 했던 것은, 옛날 바로 이웃집에 살았던 후배가 회장이 되는 바람에 인사치레하기 위함이었다. 저번 총회에서는 회장이 모처럼 부탁하여 향우회 고문 자리까지 수락한 처지였지만, 그곳에 나가봐야 번번히 소외감만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젊은이들과 무슨 얘기를 나누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많았으며, 옛날 세상 이야기 중에도 젊은이들 들을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다보면 꼰대 소리나 들었던 것이다.

택시 잡느라고 수고한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내가 참석하기로 된 모임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종친회 가을 총회가 **씨 한마음단합대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데 그 날짜가 마침 오늘이었다. 그 모임의 집결지는 총회 장소인 표선민속촌이니까 조금 늦게 도착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이제까지 종친회 모임에는 별로 가본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 회장이 되면서 오늘 모임에 참석을 권해온 것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지체없이 오늘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아, 기사님, 종합운동장 말고 버스터미널로 가주세요.

종합운동장과 버스터미널이 지척의 거리여서 다행이었다. 향우회보다 종친회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 더 좋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표선민속촌이라면 오래 전에 한두 번 구경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바쁜 일정에 건성으로 둘러봤기 때문에 언제 한번 더 가보고 싶었던 차였다. 오래 전 이 지역 사람들이 살던 시골마을 풍경의 그윽한 분위기를 느긋하게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하고 친구 사이인 종친회 회장이 가을총회 장소를 민속촌으로 정했다는 것이 용하다 싶었다. 민속촌 관람이나 종친회 모임은 모두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잊지않고 역사를 존중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이 같은 장소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해석을 해보기도 했다. 옛날 가옥들이나 동네의 모습을 찬찬히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들이 어떤 세상을 살았을지 상상이 떠오를 것 같았다.

표선으로 가는 버스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버스 앞쪽에 빈 좌석을 찾아 앉은 나는 느긋하게 창밖 경치를 즐기기로 했다. 오래만에 타보는 시외버스였다. 나는 금년에 70세가 되면서 도내에서의 버스 이용은 무료이지만, 시외버스 무료 승차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초에 자가용차를 팔아버리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고, 버스 무료승차는 나에게 자유 공간의 폭을 크게 넓혀준 셈이다. 직업에서 손을 떼고나니 시간은 많이 남아나고, 시간이 많아지니 별 볼 일 없이 버스 타고 밖으로 나갈 때가 많아진다.

그러나, 막상 밖으로 나가봐야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나의 관여를 필요로 하는 일이 별로 없고, 무슨 일에 손을 대려고 해도 나의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느껴진다. 친구들을 만나봐도 나하고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재미없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늙은이에게는 아이들 커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최고라지만, 그것도 한 지붕 아래 살 경우의 얘기가 아닌가.

두서없는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버스 앞쪽 전광판에 눈길이 머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탄 버스의 행선지는 표선이 아니라 서귀포였던 것이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지만, 표선행 갈림길은 벌써 지나간 뒤였다. 나는 몸을 다시 앉히면서 이 일을 어쩌나싶었지만, 당황하는 마음을 금세 진정시켰다. 내가 버스 행선지를 잘못 보았던 것은 표선행 버스 타기를 피하고 싶은 잠재의식의 작용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나는 표선민속촌 구경을 가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곳이 아닌가. 게다가 종친회에 가면 잘 모른 얼굴들이 대부분일뿐더러, 자기소개할 때는 중시조가 누구이며 어느 가지에 몇 대 손임을 밝히고, 어떤 때는 서로간에 항렬과 촌수까지 헤아려보고, 그리고 나서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어느 사회학자가 밝힌 바로는, 족보를 만든 것은 족보상의 오래 전 조상들 시대보다 훨씬 후세의 일이고, 자기네가 자랑스러운 가문임을 과시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 많았다는 연구결과가 생각났다.

나는 결국 서귀포행 버스에서 내릴 강단을 갖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이 버스의 종점까지 갈 이유도 없었다. 도리없이 성판악에서 하차한 나는 한라산 등산 온 사람처럼 넓은 주차장을 가로질러서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나를 여기까지 태워다 준 버스가 헛수고를 한 것이어서는 아니라야 할 것이고, 향우회나 종친회에 나가는 것에 못지않은 중요한 일로 여기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막상 등산로 길로 접어들고 보니 다른 생각들은 깨끗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거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등산객들의 행렬에 함께 끼이자 나도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행보에 동화되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오늘 한라산을 높이 올라가는 일에 욕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자 걸음 속도를 내지 않기로 했다. 느긋하게 걸어가다가 적당한 쉼터를 만나면 편히 앉아서 드높은 하늘을 쳐다보며 산 속의 초가을 정취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점심 준비를 해갖고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디 한적한 곳을 찾아서 조용히 쉬다가 하산하기로 마음 먹었다. 성판악 등산로는 옆길로 빠지는 곳이 없는지라, 한라산 동쪽으로 나있는 개울을 찾아보았다. 있는 둥 마는 둥 애매한 개울이 나타나자 그쪽으로 한참을 들어갔다. 제주도 개천이 으레히 그렇듯이 물 흐르는 곳은 없었지만, 빗물에 잘 씻겨진 자갈돌들이 나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것 같았다.

다리를 뻗고 앉은 나는 오늘 일어난 일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향우회나 종친회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모임 진행에 무슨 차질이 있을 것도 아니고, 그 때문에 실망할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머릿속을 비우고 나자 발치 가까이 있는 작은 풀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사람들이 보아주지 않는 호젓한 곳에 있으면서도 함초롬히 예쁘게 자라고있는 풀들이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가만히 바라다보니, 작은 풀들도 떳떳이 자기 세계를 갖고 살아가는 품이 신성한 생명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싶었다. 그러자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손주녀석이 들어줄 만한 화제를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도서관 아동문고 칸에서 <보물섬>이라는 모험소설을 얼마 전에 읽었는데 그 책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천신만고의 사투 끝에 땅속에 묻힌 보물을 모두 찾아내지는 못한 채로 담담하게 돌아나오는 사람 눈에 들어오는 풀 한 포기 모습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슴 조이는 모험을 겪고 난 사람 앞에서 유유히 고갯짓하는 작은 풀잎사귀가 그렇게도 위엄있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장한 소설 스토리가 끝나는 부분에 이르러 주인공이 겪는 긴박한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자연현상의 묘사가 여러 번 나왔음이 생각났다. 나뭇가지나 풀포기 같은 식물, 구름이나 산봉우리 같이 무심한 물상이 사람 옆에 있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사람 마음도 웅대한 자연현상의 한 조각임을 일러주는 것은 사람들이 겪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순화하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간에 나의 고향마을 향우회 회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유쾌한 목소리여서 우선 안심이 되었다.

--삼춘, 오늘 향우회에 안 나오셨는데 무슨 불편한 일이 있으신 건 아니지예.

한 가지 말씀 드릴 건, 선배님이 오늘 안 나오셨기 때문에 오늘 임원 개선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이전에 의논하기로는 선배님을 우리 향우회 고문으로 추대하기로 되었지만, 회의 현장에 부재자는 임원으로 선출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합니다.

--어, 오늘 못 나가서 미안허네. 오늘은 마침 우리 종친회가 열리는 날이라서 그리 되었네. 종친회장이 나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이라서 우정 출연 하느라고 말이지.

조금 후에는 종친회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네, 오늘 종친회에 어찌 안 나왔노. 자네가 나오지 않아서 오늘 임원 개선에서 자네는 제외되었네. 그전 약속으로는 이사로 추대하기로 됐었잖은가.

--어, 오늘 못 나가서 미안허네. 오늘은 마침 우리 고향 마을 향우회가 열리는 날이었네. 향우회 회장이 나하고는 어릴적부터 친형제처럼 지냈고 내가 강권해서 향우회장이 된 처지라서 내가 불참할 수는 없었네.

나는 안도의 함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하루는 결과적으로 최고로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되었다. <소설가 양영수>

<양영수의 꽁트>는...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바야흐로 영상시대라고 한다. 이야기문학을 감상하는 것도 문자매체보다 영상매체를 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영상매체 속에서는 금방금방 장면이 바뀌는 스토리라인을 사람이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에 깊이있는 사색과 음미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 마음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체리듬과 심리적인 템포에 따라서 메시지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는 문자매체를 이용하는 독서가 좋은 방법이다.

꽁트 연재를 통해 필자가 바라는 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양영수 작가 

제주 태생의 소설가.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 정년퇴임.

그 동안 내놓은 작품들로는 단편집 '마당 넓은 기와집' (2008년), 장편소설 '불 타는 섬' (2014년,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복면의 세월'(2019)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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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행복 2020-04-06 12:20:06 | 39.***.***.165
천신만고 끝에 잡은건 보물이 아니라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풀 한포기였다는 글귀가 와 닿습니다. 유유히 고개짓하는 작은 풀잎사귀의 위엄. 요즘 코로나와 총선으로 산만한데 무심한 물상이 값비싼 보물보다 더 마음을 움직일수 있다는 지혜를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