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최초로 교육을 진흥시킨 스승 찾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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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최초로 교육을 진흥시킨 스승 찾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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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옛 스승 '명도암 선생 유허비'를 찾아서 (1)

제주시 봉개리 명도암 마을 안세미오름 북측 자락에 명도암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명도암'이라는 마을 이름은 과연 '명도암'이라는 진용 선생의 호에서 유래하였을까요? 오현단에는 귤림서원의 효시가 되는 장수당이 이괴 목사 당시에 김진용의 건의로 건립되었다는데 과연 그러할까요? 아니면 이괴가 목사로 도임하여 우선 교육사업을 일으키고자 진용 선생과 상의하여 세운 것일까요?

먼저 현장을 답사하여 비문을 확인하면서 선생에 대하여 잘 못 알려지고 있는 내용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에 게재된 '명도암선생유허비(明道菴先生遺墟碑)'내용은 일부 향토사학자까지 인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한문 글자가 한글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 쓴 글자(20여 곳)가 많아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아니함으로, 광김 일가(光金一家)와 금석문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내용을 바르게 알리기 위하여 1편에는 원문과 잘못 쓴 사례와 잘못 알려지고 있는 내용을 2편에는 원문에 대한 해설로 나누어 글을 쓰고자 합니다.

글쓴이: 광산김씨 大橋洞派(대교동파) 37世 正虎(정호)

「명도암선생유허비(明道菴先生遺墟碑)」에 표기되어있는 ‘명도암 선생’ 김진용(金晉鎔)은 본관이 광산(光山)이요, 자는 진숙(晋叔)으로 구좌읍 한동리에서 태어나 처가(妻家)인 봉개리 명도암 마을로 옮겨 살았습니다.

제주에 유배 중이던 실학자 이익(李瀷)에게 수학하였고, 인조 13년 을해(1635) 사마시에 급제하여 숙녕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임하고 고향에서 평생 훈학에 힘쓰셨습니다.

현종 1년(1660) 당시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교육을 진흥하기 위하여 김진용과 상의하여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현재 오현단)에 장수당(藏修堂)을 건립하였고, 김진용은 삼읍(三邑: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학생들을 모두 가르치니, 제주에 유학이 왕성해지고 풍속이 교화되어 일대 변혁을 가져왔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우러르는 유종(儒宗)이 되시므로, 후인(後人)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그가 살았던 곳의 이름을 빌어서 ‘명도암 선생’이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

진용 선생의 교육 진흥에 대한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선생 탄신 6회갑 기념으로 1965년 10월 ‘명도암선생 유허비’를 제주시 봉개 명도암 오름 북쪽 기슭에 세웠으며, 이후 2015년 3월 9일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明道菴先生遺墟碑.
明道菴先生遺墟碑.

 

○ 明道菴先生遺墟碑 (원문)

南溟의 靈峰인 漢拏山의 儲精이 뻗어 그 東北 기슭 六十餘里에

明道菴兀音을 이루었으니 水石이 幽邃하고 秀氣 감도는데 冽泉을 사이에 둔 이곳 安胎田은 바로 先生이 居處를 卜하여 養德尙志하신 遺墟이니라.

삼가 살피건대 先生의 諱는 晉鎔이요 字는 晉叔이며 先生이 明道菴에 隱居脩道하시매 世人이 敬慕하여 明道菴先生이라 일커렀다.

先生은 光山金氏로서 麗朝門下侍中 諱台鉉을 中始祖로 都染領同正 諱逸을 入海始祖로 모시니 이로써 耽羅의 文物敎化 자못 刷新된 바 있더니 先生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儒家로서 일찌기 뜻을 聖賢의 學에 두고 硏學尙志로 能히 荒蕪를 旣除하니 南方의 敎化蔚然히 이룩되어 드디어 萬人崇仰의 儒宗이 되시니라.

先生은 李氏朝鮮 宣祖 乙巳에 降生하시니 天性이 高明하고 才質이 特出하여 幼時에 謫居中인 艮翁 李瀷先生에게 受學하시다.

仁祖 乙亥에 司馬에 오르셔 泮宮에 出遊하시고 肅寧殿參奉에 敍함을 입자 辭하고 歸鄕하니 本志仕宦에 있음이 아니러라.

爾來俊才를 모아 聖賢의 길을 講하며 育英에 힘써 오시더니 孝宗 戊戌에 晩悟李公襘 牧使로 到任하자 于先 興學을 첫 事業으로 삼고자 先生께 條規方略을 諮訪하매 先生이 더부러 經綸하여 學舍創建에 이르니 이것이 藏修堂으로 오늘의 五賢壇이 바로 그 由緖地요 耽羅庠校의 嚆矢라.

이로 말미암아 敎學이 興隆하고 人才輩出이 이루 헤아릴 바 아니니 先生의 功은 靑史에 길이 傳할지어다. 癸卯에 逝去하시니 享年五十九라.

純祖 壬辰에 牧使 李公禮延이 先生의 遺德을 欽仰하고 士林의 要望도 있어 永惠祠에 從享하고 憲宗 癸卯에 知州 李公源祚가 따로 鄕賢祠를 세워 高靈谷得宗과 幷享하여 왔으나 高宗 辛未에 大同撤享되더니 癸巳에 士林이 모여 鄕賢祠遺墟碑를 건립하였도다.

이제 또 先生의 後孫들이 모여서 遺墟碑를 세워 先祖의 遺德을 顯揚코자 하니 참으로 感激할지어다. 噫라 先生은 일찌기 山林에 隱居하면서 硏學과 育英으로 生涯를 마치신 분으로 耽羅의 海荒을 깨치시고 鄕土에 獻身하여 그 敎化는 婦孺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참으로 거룩하시도다.

길이 그 遺志를 繼承하여 先生의 偉業을 보람 있게 할지니라.

文學博士 延安 李崇寧 譔, 安東 金忠顯 書

先生嶽降之六周 乙巳 十月 日 立

▶첫째,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 글자를 잘못 기술하여 뜻이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 사례입니다.

명도암선생유허비 원문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내용
①宣祖 乙巳에 降生하시니 선조(宣祖) 을사(乙巳)에 강생(講生)하시니
②仁祖 乙亥에 司馬에 오르셔 泮宮에 出遊하시고 인조(仁祖) 을각(乙亥)에 사마(司馬)에 오르셔 판관에 출유(出遊)하시고,
③先生嶽降之六周 乙巳 十月 日 立 선생악강지육주(先生嶽降之育周)을사(乙巳) 십월 일(日) 립(立)

①선생이 선조 을사에 降生(태어나시니)를, 강생(講生; 조선시대 과거를 보는 유생)으로 잘못 기록하였고

②을해(乙亥)를 을각(乙亥)으로 잘못 쓰고, 반궁(泮宮; 태학을 일컫는 성균관)을 판관(조선시대 종5품 관직)으로 둔갑시키니, 성균관에 遊學(유학)하신 것을 판관 벼슬살이를 한 것으로 기술하였으며,

③六周에서 ‘周’는 周甲을 줄인 말로 六十甲子의 甲으로 여섯 번째 회갑을 뜻하므로, 선생의 여섯 번째 회갑이 되는 1965년 시월 일 입(立) 또는 세움인데, 六周를 育周로 시월을 십월로, 입(立)을 립(立)으로 한글 표기법에도 틀리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탄신 여섯 번째 회갑 1965년은 선생의 출생년도(1605년)에 六周(60× 6회갑= 360)를 더한 것이며, 단순히 오기로 보이는 글자까지 포함, 잘못 쓴 곳이 무려 20여 곳이나 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비문 두 번째 단락의 기록으로 일부 관청, 신문, 향토사학자들에 의해서 잘못 알려지고 내용이므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살피건대 先生의 諱는 晉鎔이요, 字는 晉叔이며,

「先生(선생)이 明道菴(명도암)에 隱居脩道(은거 수도)하시매 世人(세인)이 敬慕(경모)하여 明道菴先生(명도암 선생)이라 일컬었다」

→ 선생이 명도암에 은거 수도하였기에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명도암 선생’이라 일컬었다.    

윗글로 미루어 ①明道菴(명도암)은 선생이 직접 지은 號(호)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경모하여 일컬은 호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②명도암(明道岩, 明道菴) 마을이 진용 선생의 호인 明道菴에서 유래하였다는 기록들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즉 이와는 반대로 김진용을 명도암 선생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가 살았던 마을 이름을 빌어서 명도암 선생(明道菴 先生)이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구한말 지식인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선생의 ‘탐라기년’에도 잘 나타납니다.

‘김진용(1605~1663)은 字가 진숙(晉叔)으로 제주사람이다. [본관은 광산이다.] 경서에 밝고 행실이 깨끗한 것으로 칭송되었다. 인조 을해년(1653)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의 이름을 따라서 명도암 선생이라 일컬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原文] 金晉鎔 字晉叔 本州人也 [其先 光山] 以明經潔行 稱 仁祖乙亥 中生員 補參奉 不仕 「後人 因所居里 稱明道菴先生」

※심재 김석익(金錫翼)은 명도암 선생의 9대손이시며, 윗글의 내용은 특히 光金一家(광김일가)들이 유념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정호씨 ⓒ헤드라인제주
김정호씨 ⓒ헤드라인제주

혹시 명도암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明道는 길을 밝힌 사람이라는 뜻이며, 명도암 선생의 호를 따라서 명도암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내는 일이므로 오히려 선생의 품격을 손상시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예로부터 過恭은 非禮라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의 敎化(교화)에 힘입어 제주에 교육과 학문이 성대히 일어나고, 인재가 배출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선생의 공적은 역사에 길이 전하여지고, 현재 鄕賢祠(향현사)에 配享(배향)되어 모셔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2편에서는 탐라의 옛 스승인 ‘명도암선생 유허비’를 찾아서가 이어집니다. <글쓴이: 광산김씨 大橋洞派(대교동파) 37世 正虎(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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