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수의 꽁트] (5) 맞불 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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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의 꽁트] (5) 맞불 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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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운클럽 산행에 박성구를 데리고 나온 것이 잘한 일인지 의심스러워진 것은 점심 도시락 먹을 때부터였다. 박성구가 우리 등산 클럽에 처음 나오는 날이고 해서 나는 그의 도시락까지 챙겨갖고 나왔던 것인데 그랬다고 해서 내가 무슨 공치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도시락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면 내가 들인 정성을 알 수 있을 터인데, 맛깔스럽게 먹어주고 입담좋은 말치레라도 해주었으면 그것으로 점심 값이 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음식 칭찬 같은 것은 천박한 사람의 표시라는 듯이 엄숙하게 굳어있는 그의 표정을 보니 일시에 온몸에서 힘이 쪽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오름 꼭대기에서 지친 다리를 꺾고 앉아 도시락 까먹는 점심시간은 하루 동안의 산행 일정 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시간인데, 박성구의 철학자 같은 얼굴표정이 분위기를 망치는구나 싶었다. 심지어는 옆자리 여자들에게 한눈을 팔고 남들의 도시락까지 흘깃거리다니 이 남자가 도대체 자기를 데려온 여자의 존재를 깜빡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오늘 박성구를 만날 것에 대비하여 어제는 미장원에 다녀오기까지 했는데 나는 정말 지독히 수모를 당하는 기분이 되었다. 나하고는 오랜 친구 사이니까 인사치레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것인지 모르지만, 받는 정이 있으면 주는 정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고등학교 동창인 박성구와 나는 **상고 재학시절 각별하게 친밀한 사이였으니 인사치레 같은 것을 무시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 학교 1학년 때 우리 두 사람은 연극반에 가입하여 두 학기 동안 열심히 연기연습을 했고 연말 공연을 위한 준비 기간에는 정말로 찐한 우정과 교감을 경험한 사이, 말하자면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인문계가 아니고 실업계 고교라서 가능한 일이라고들 하였다. 내가 상고 졸업 후 은행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취직시험에 대비한 학교공부를 착실히 했기 때문이지만, 박성구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웬만한 취직자리 얻어 가는 데에도 대학진학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이러한 박성구가 생각날 때마다 실업계 고교를 나온 나의 열등감이 사그라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고교 졸업 후 오랫동안 박성구와의 교제를 멀리했던 것은 그의 불안정한 직장 탓이었다. 그는 지방대학의 비인기 학과 출신이기 때문인지 그저 그런 직장을 여러 군데 전전하였고, 한참 늦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그동안 말단에서만 맴돌다가 계장 진급을 했다는 말을 최근에야 들었다. 그의 진급 소식을 듣고서 나는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어떤 도약이 있을 것을 기다렸으나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내가 그를 우리 청운클럽에 들어오도록 권한 것은 말하자면 그의 프로포즈 작심을 유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허황된 생각을 할 줄 모르고 얌전한 그의 성격이 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박성구와의 교우관계를 연인관계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다는 이같은 전략이 서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침에 우리 일행 30여 명이 오름 행선지로 출발하는 자리에서 나는 우리 청운클럽 오름대장에게 박성구의 인사 소개를 시켰다. 그 때만 해도 내가 보는 박성구 첫인상의 평가는 만점이었다.

--저의 남자친구입니다.

--저는 박성구라고 합니다. 진영희 하고는 **상고 다닐 때부터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박성구의 자기소개 인사는 간단하면서도 당당하였고 품격과 센스가 있었다. 내 이름을 거명할 때도 그냥 ‘진영희’라고만 지칭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에 ‘진영희 씨’라고 했으면 우리 사이가 아직 섣부른 남녀관계,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친구 사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상고 다닐 때부터 친구였다고 한 말도 그에 대한 신뢰감이 솟아나게 만들었다. 우등생이었던 나조차도 **상고를 나왔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은 실업계 고교를 나온 열등감 때문인데, 박성구가 그런 말을 예사롭게 하는 것은 내가 몰랐던 뚝심이 그에게 숨어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여러 대의 자가용차에 분승하여 오름 행선지 가까운 곳까지 간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자유롭게 짝을 이루어 계획된 산행 코스로 접어들었다. 청운클럽의 오름대장이 박성구를 도보 동반자로 삼은 것은 신입회원 환영의 뜻이었을 텐데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화제를 이어가는 것이 서로 죽이 맞는가 보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그들 사이에 오가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오름대장은 박성구가 오름 등반을 취미로 삼고있다는 말을 듣고는 탄성을 발하며 좋아하였다. 박성구는 거의 주말마다 오름을 갈 정도로 오름마니아이며 혼자서 산행에 나설 때도 많다고 하였다. 나는 박성구의 등산 취미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열성인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약간 머쓱하는 기분이 되었다.

오름대장은 박성구에게 호감을 가졌는지 청운클럽 별동부대에서 수고해 줄 수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네? 별동부대라니, 그건 어떤 겁니까?

--우리 클럽엔 별동부대라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클럽 본진이 등반하기 전에 미리 현장 답사를 해서 계절 변화에 걸맞는 산행 코스를 정하도록 하는 거지요.

--아, 그렇습니까. 그 별동부대는 몇 사람이나 되나요?

--답사 가는 날에 불가피한 사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여유있게 네 사람 정도 수고하고 있는데, 요즘에 인원 변동이 생겼어요. 지망자들은 많은데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어서 걱정이오. 우리 클럽에선 젊은 피가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저 같은 신참자를 끼워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박성구는 오름대장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오름을 오르면서 우리 일행이 나눈 이야기는 주로 박성구와 오름대장이 뭐를 물어보고 대답하는 형식이 되었다. 오름동호회의 이름을 청운클럽이라고 지은 사람도 자기이며, 청운클럽 안에 별동부대를 두자는 아이디어도 자신이 낸 것이라고 말하는 오름대장은 초로의 나이에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오름등반이라고 하였다. 오름대장은 나하고도 각별한 관계였다. 우리는 같은 지방은행에 근무하기 때문에 서로 선후배 같은 친근감이 오갔고, 나의 청운클럽 참여도 그의 소개롤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등반 중에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동안 박성구가가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하나 나타나서 나의 관심을 확 끌었다. 한영선이라는 우리 또래의 여자였다. 박성구가 한영선의 얼굴을 보고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의 막연한 지인이었지만, 이런 경우에도 산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는 빨리 친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들은 같은 대학 출신에 같은 학번이라서 얼굴을 알아본 것이라는 말이었지만 나는 한영선의 존재가 공연히 마음에 걸렸다. 우리 청운클럽 전체 인원의 절반에 가까운 여자들 중에서 한영선은 내가 제일 피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한영선은 노상 수수한 차림에다 화장기 하나 없는 부시시한 얼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남자들 눈길을 잡아끄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매력없는 여자는 옆에 있는 여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동반자로서는 환영을 받는다는 말이 있지만, 한영선과 자리를 같이하면 나의 자존심을 깎아내린다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내가 한영선을 피하고 싶은 것은 우리 둘 사이에 현 사장이라는 남자가 끼어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관광회사를 경영한다는 현 사장은 나하고 출신 마을이 같은데다 나의 초등학교 3년 선배이다. 내가 청운클럽 회원이 되는 날 선후배 간에 인사를 나눌 때에는 부담없이 가까이 지낼 수 있겠구나 싶었으나 현 사장과 한영선이가 가까운 친척관계임을 알고서는 그게 잘되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등반 중에도 함께 걷거나 말 상대가 될 때가 많았다. 나의 선배 동향인이 보는 자리에서 내가 한영선과 함께 있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한영선만 없었더라면 나는 현 사장하고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재미있는 세계여행 이야기도 많이 갖고 있을 것이고, 스포츠로 단련된 몸이어서 그런지 풍채도 훌륭하였다.

나는 혹시나 오늘 산행에서 박성구와 한영선이가 동행이 되는 일이 있을지 신경이 쓰였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는 곧 갈라섰던 것이다. 점심시간 중에도 한영선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그녀의 존재를 잊을 수가 있었다. 더구나, 점심시간 중에 나의 신경이 쏠려있었던 것은 박성구의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가 쓸데없이 옆 사람들에게 한눈 파는 것을 보면서 나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속만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 동안 멈춰있었던 한영선에 대한 경계심이 퍼뜩 되살아난 것은 잠시 안 보이던 그녀가 박성구에게로 다가와 섰을 때였다. 점심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모두 일어설 무렵에 한영선이는 박성구 앞으로 성큼 다가와서 큼직한 밀감 두 개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잘 익어서 탐스럽게 보이는 한라봉이었다. 제딴에는 오래만에 만난 대학 동문에게 반갑다는 표시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어설픈 친절 흉내를 보고 단박에 화가 치밀었다. 박성구와 내가 점심도시락을 함께 먹는 것을 한영선이가 보았다면 우리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임을 눈치챘을 터인데, 그녀는 같은 여자이면서 어찌 그렇게 나의 심정을 몰라줄까. 딴 여자가 주는 밀감을 우리 두 사람이 기쁘게 받아 먹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 여자는 바보란 말인가.

한영선에 대한 의심과 함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것은 오늘 아침에 오름대장이 했던 말이었다. 우리 청운클럽 별동부대에 새 일꾼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박성구는 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도 있다는 것이 오름대장의 말이었다. 만약에 박성구가 그 부대에 참여하고 한영선까지 자원해 나서면 어떻게 될까.

한영선이는 오름대장의 신임을 받는 것 같고 청운클럽 안에서도 모범 회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다가 그녀가 박성구를 좋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나는 고졸 학력이고 한영선이는 대졸 학력이라는 사실에 대해 박성구는 얼마나 비중을 둘까, 갑자기 이런 의문도 떠올랐다. 한영선은 현 사장의 파트너라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에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집어치우자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하산 길에 나선 다음에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박성구와 한영선이 나란히 오름 길을 걸어다니는 상상 속의 모습이었다.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상상 속에서는 꼴사나운 장면들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머릿속이야 무엇으로 차있든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이 나는 하산 길 내내 박성구의 옆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내가 오름대장의 말 상대가 되어 같은 일행이 된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앞서 가던 오름대장이 나에게 할 말이 있었는지 멈춰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금융계통 직업이다 보니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알아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가는 동안 박성구는 걸음을 늦추었는데 아마도 은행업무에 관련된 우리 얘기에 대해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마침 잘 되었다 싶다. 내가 오름대장에게 넌지시 물어보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이다.

오름대장하고 얘기하는 동안 혹시나 했던 일이 사실로 나타난 것을 알고 나는 움찔 놀랐다. 박성구와 한영선이 함께 별동부대 대원이 될 것 같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 아침에 박성구가 그것을 자원한 것은 내가 본 대로이고, 한영선이는 지난 번 산행 때에 이미 의사표시를 해 왔다는 것이다. 부질없는 상상 공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다니 나는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눈앞에 뽀얀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에 찔린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웬 일인가. 박성구와 한영선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서로 마주보며 웃기도 한다. 아무리 얌전한 남자라고 해도, 저처럼 섹시한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여자를 좋아하다니, 나는 오기와 분기가 솟구친다. 오름대장처럼 감각이 닳아 문드러진 꼰대 같은 남자니까 인정해준 것이지, 저런 여자가 어떻게 박성구 같은 젊은 피를 넘본단 말인가.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나도 한 남자와 다정한 파트너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

맛불 전략이다. 때마침 저만치 앞에서 훤칠한 키의 남자 하나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잘 보았더니 나의 초등학교 선배 그 남자이다. 걸음을 재촉하면 이 남자와 동행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일행이 되면 박성구와 한영선보다도 더 즐거운 동반자인 듯이 보이자. 이 남자 정도이면 누가 봐도 씩씩하고 늠름하다.

나는 파트너를 보며 웃기만 할 것이 아니라 손짓과 고개짓까지 할 것이다. 박성구는 우리가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따끔하게 찔리는 데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센스 없는 남자인지 반성도 할 것이다. <양영수 소설가>

<양영수의 꽁트>는...

양영수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바야흐로 영상시대라고 한다. 이야기문학을 감상하는 것도 문자매체보다 영상매체를 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영상매체 속에서는 금방금방 장면이 바뀌는 스토리라인을 사람이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에 깊이있는 사색과 음미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 마음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체리듬과 심리적인 템포에 따라서 메시지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는 문자매체를 이용하는 독서가 좋은 방법이다.

꽁트 연재를 통해 필자가 바라는 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양영수 작가 

제주 태생의 소설가.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 정년퇴임.

그 동안 내놓은 작품들로는 단편집 '마당 넓은 기와집' (2008년), 장편소설 '불 타는 섬' (2014년,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복면의 세월'(2019)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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