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를 말하는 역사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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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를 말하는 역사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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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7)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탐라에 대한 고증자료가 적은 것은 고대국가로의 정착이 늦은 이유도 있지만 제주는 해양문화의 특성상 역사적 문헌이 많지 않은 여건이다. 여기에서는 그나마 탐라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나 유물들을 통한 탐라에 대한 흔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역사적인 기록으로서 탐라는 3세기의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주호(州胡)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탐라국은 ‘섬나라’라는 의미로서, 섬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독자적인 국가 형태로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탐라국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후한서(後漢書)에는 섭라(涉羅),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耽牟羅國), 신당서(新唐書) 등 국내외 사서에는 담라(儋羅), 혹은 탐부라(耽浮羅), 탁라(乇羅), 탁라(托羅), 탁라(託羅), 둔라(屯羅) 등이 나타나 있다. 특히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이미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라(羅)라 하며 탐, 섭, 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송나라 구양수가 편찬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참고하면 7세기 제주인들의 생생한 삶이 모습이 되 살아난다. 당시 제주인들은 개와 돼지를 키워서 고기를 먹은 후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여름에는 초가에서 살다가 추운 겨울 되면 자연 동굴에서 기거를 했다. 오곡이 나지만 소로 밭을 갈 줄을 몰라 따비로 땅을 파 농사를 지었다. 후에 백제의 지배에서 다시 신라의 지배로 바뀌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660년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과 여러 왕자, 대신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태에 이르렀을 때, 탐라는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했고, 그 해에는 당에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고 당회요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듬해 사이메이 덴노 7년(661)에는 일본에서 보낸 제4차 견당사가 탐라에 표착한 것을 시작으로 왕자 아와기(阿波伎)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 이후 탐라에서 보낸 사신은 덴무 덴노 7년(678)까지 일본측 공식 기록에 남은 것만 총 아홉 차례에 달했고, 679년 신라에 복속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백강구 전투의 항복자를 나타낸 기록에 탐라국 사신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구당서》 유인궤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 탐라는 왜와 함께 백제 부흥을 지원하고 있었던 듯 하다.

중국의 화폐 오수전, 산지항 출토(왼쪽), 구당서(舊唐書)의 탐라표기
중국의 화폐 오수전, 산지항 출토(왼쪽), 구당서(舊唐書)의 탐라표기

탐라의 관직 체계로 성주, 왕자, 도내(徒內) 등은 탐라 지배층의 호칭이다. 기록상으로는 신라 전성기에 고을라의 15대손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세 형제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와서 조회하자 신라의 왕이 이들을 가상히 여겨 성주, 왕자, 도내의 작위를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특히 성주는 국왕을 지칭한 것으로 고려에서도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국의 왕을 성주라고 불렀다.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 21년(938) 12월조에 의하면, 탐라국의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알현하자 왕은 그에게 성주·왕자의 작위를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에서는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 등의 무산계를 주어 우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 또는 세자라 하였다. 성주와 왕자는 1105년(숙종 10) 이후 제주가 군·현으로 편제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여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하며 조선 초기까지 내려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는 중앙의 행정력이 제주에 미치게 되면서 성주를 좌도지관,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하였고 이 때부터 이전과 같은 대우는 없어졌다.

성주와 왕자의 직능(職能)에 대해서는 ‘성주는 종래의 기록과 같이 신라 때 있어서 객성상(客星象)의 출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탐라란 나라 이름도 탐진(耽津)에 당도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다. 성주는 탐라국 토어로 국왕 또는 임금의 뜻이며 왕자는 군장의 뜻을 가진 탐라의 토어이다. 따라서 성주는 국왕이요, 왕자는 부왕적인 존재로서 탐라국은 이 양자가 다스리는 이원적인 왕제를 가진 나라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대외 교역에 대한 유적을 보면 1928년 제주시 산지항 공사 때 부근의 용암(熔岩) 아래에서 우연히 중국 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화폐로는 오수전(五銖錢),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 화포(貨布)가 발견되었다. 이 중 오수전은 전한 무제 때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왕망의 신(新)나라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화천, 대천오십, 화포 등은 모두 왕망 때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산지항 부근 유적의 성립 시기는 왕망 시대(서기 8∼25년) 이전으로는 유추 할 수가 있다. 

제주시 용담동에서는 단검(短劍), 장검(長劍), 철부(鐵斧) 그리고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출토 유물들은 실제 전투용의 무기들이 아니라 그 소유자가 자기의 고귀한 신분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위신재(威信財)라는 성격을 갖는다. 출토된 물품들의 시기는 같이 동반되는 중국 제품으로 추정되는 40여 점의 유리구술들로서 보아 전한대에 해당된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출토된 물품들 또한 적어도 기원후 1세기경 제주도 지배 세력이 한반도를 경유하거나 직접 중국과 교역해서 들여온 것이다.

탐라국이 대외 관계에 대해 국내외 사서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476년(문주왕 2) 백제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쳤다는 데서이다. 그 후 탐라국은 고려 전기인 1162년(의종 16) 현령관이 고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올 때까지 국내 사서에는 10회 정도,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서는 각각 7회와 19회 정도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탐라국에는 왕, 왕자, 그리고 백제의 중앙 관위인 은솔(恩率)이라든지 좌평(佐平) 직책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이 사실은 탐라국 내부에 그 구성원들이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상당히 계층 분화된 사회 체제와 그것을 통제하는 상부 구조가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더구나 그것을 종주적 위치에 있는 백제라는 해외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탐라국은 하나의 ‘국(國)’으로서 동북아시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국제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고종 인덕 2년조(665년)에 신라, 백제, 탐라, 왜국 사자들이 중국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7세기라는 시점에서 사자들의 서열을 살펴보면, 탐라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었으며 다른 세 나라들과는 거의 대등하게 보인다. 또한 실례로서 신라 27대 선덕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워서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을 때 탐라는 신라의 잠재적인 적대국들 중 제4위에 속하였다. 따라서 당시 신라 당국도 탐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탐라국 시대의 농업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사서에서 제주 돌담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송나라 왕부(王溥)가 편찬한 당해요, 탐라국(耽羅國)조의 기록이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탐라시대의 제주의 왕 이름은 유리도라이고, 사람들은 5부락으로 나뉘어 살았으며 바람 때문에 추가 주변에 돌로 둥글게 담장을 둘렀다. 인구는 약 8천명 정도였다. 활, 칼, 방패, 창 등의 무기를 사용하면서 문기(文記)는 없고 오로지 귀신을 섬기고 있었다. 당신 탐라는 백제의 지배 아래 있었고, 용삭(龍朔:당나라 연호) 원년(661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이미 7세기 이전에 제주의 마을 내에 돌담을 쌓는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으로 탐라의 흔적들을 구명하기 위한 더 많은 국내외 문헌 및 유물들이 발굴되기를 기원해본다. 특히 중국은 서기전 2070년∼서기전 1600년경에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 문명의 고대문명국가로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 중국 변방의 문화에 대한 많은 기록들을 보유하고 있다. 찾지 못한 탐라에 대한 문헌 기록들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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