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환박물로 보는 조선후기 제주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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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환박물로 보는 조선후기 제주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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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5)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조선후기 제주도의 현실을 알려 줄 수 있는 대표적인 문헌으로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704년 저술한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이 있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제주섬의 농업농촌의 현실을 직시 할 수 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발췌하여 당시를 이해하도록 하겠다.

우선 남환박물의 제주의 자연환경에 대한 이야기로‘이 고을의 풍토는 따로 한 구역이나 모든 것이 다르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며 변화가 어긋나 일정함이 없다. 기후는 따뜻한 것 같으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심히 첨리(尖利)하다. 의식의 절제가 어려워 병이 나기 쉽다. 더구나 운무가 항시 음침하게 끼고 습하여 끓은 듯 답답하다.

지네, 거미, 지렁이 등 모든 꿈틀거리는 것들은 모두 겨울을 넘겨도 죽지 않는다.’고 하여 당시 제주의 자연환경이 따뜻함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제주에는 집집마다 귤나무와 유자나무가 있다. 토질은 부조(浮燥)하고 구릉은 둑이 되고 평지도 되어 있으니 가증할 따름’이라고 하고 있다. ‘산의 전체는 물러가는 듯하다가 도리어 높이 서 있다. 그 겉모양을 쳐다보면 둥글둥글해서 높이 험준하지 않은 것 같고,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어서 높게 솟아나지 않은 것 같다. 마치 벌판 속에 우뚝하게 선 뫼와 같아서 특별히 험난할 것이 없을 듯 하며 높고 날카로운 바위와 낭떠러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비틀어진 골짜기와 동학(洞壑)이 어둡고 침침하여 곤륜산의 터(崑崙之墟)와 판동의 골짜기(板洞之谷)와 비슷하지만 세속을 떠난 정결하고 위기(偉奇)한 맛이 많이 난다.’고 기술하고 있어 육지부와는 색다른 자연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제주의 생활환경에 대해서 제주섬에는 물맛이 좋은 샘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백성들은 10리 안에서 떠다 마실 수 있으면 가까운 샘으로 여긴다. 멀리 있는 샘은 혹은 4~50리에 이른다. 물맛은 짜서 참고 마실 수 없으나 이 지방 사람들은 익숙해져서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외지 사람들은 이를 마시면 곧 번번이 구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병이 난다. 오직 제주목성의 성 안에 있고 돌구멍에서 혹 솟아나기도 하고 혹 마르기도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제주의 섬사람들에 생활에 대해서는‘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나이가 8~90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여자는 많고 남자가 적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매년 배가 패몰(敗沒)하여 죽는 사람이 매우 많은 까닭에, 남자는 귀하게 여기고 여자는 천하게 여긴다. 아주 잔약한 사람도 또한 두셋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고, 혹은 십여 명의 아내를 둔 사람도 있다고 기술하고 있어 당시의 제주인들의 생활상들을 표현하고 있다.

제주의 풍속에 대해서는‘어리석고 검소하지만 예의와 겸손함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의복과 음식이 소박하고 검소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일이 없다. 부유한 사람도 칡의 섬유로 짠 베로 옷을 지어 입으니 역시 화려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으며‘혼례는 문 앞에서 절하여 예를 표한다’고 하였는데 혼인하는 저녁에 사위될 사람이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를 배알한다. 음식을 조촐하게 차리면 여자(신부)가 나오지 않는다. 술에 취한 뒤에 신랑이 신부 방에 들어간다. 최근까지도 이러한 풍속이 성행하였다. 또한 같은 성과 가까운 친족과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합방의 예는 신랑과 신부가 모두 부끄러워하여, 심지어 우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 습관을 익힌 뒤에는 사람들이 이를 좋게 여겼다.

그 외에도‘제주의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렵다.’, 특히 ‘여자의 부역이 매우 무겁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관의 부역이나 공물을 여자에게 부과한다. 제주지방 풍속은 짐을 등에 지고 다니기는 하지만 머리에 이고 다니지는 않는다. 물을 길어올 때도 나무통을 지고 다니는 사람은 있지만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또 치마가 없어서 단지 삼노(麻索)로써 허리를 두루 메고, 몇 자의 굵은 베를 바늘을 이용하여 삼노의 앞면에 얽어매었으니, 오직 그 음부(陰部)를 가릴 뿐이다. 옷과 치마를 벗고 몸뚱이와 볼기짝을 드러낸 것이어서 참담하여 차마 볼 수가 없다. 고을 안에 사는 사람이 출입할 때를 당하면 혹 의상을 뚫기도 하는데, 옛 풍속의 습관에 젖어 부끄러움을 모른다. 매번 서리와 백성을 대할 때마다 그것이 불가한 이유를 말하고, 그 수치스러움을 알게 하였다. 그런 뒤에 영(令)을 내려 금지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농업과 관련해서는‘토질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고 하고 있으며, ‘밭을 밟고 바령을 한다’는 기술은 밭을 밟아 주지 않으면 씨를 뿌리지 못하고, 거름을 하지 않으면 이삭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나 말을 몰고 나와 종일 달리게 하고 짓밟는다. 이것을 ‘밭볼리기(밭 밟기)라고 한다. 그들의 소나 말을 담을 쌓은 밭 안에 가두어 밤낮으로 밭에 똥오줍을 싸게 한다. 이것을 ‘바량(八陽)’이라 한다. ‘돌을 모아 담을 쌓는다’는 기술이 있는데 ‘예로부터 밭두렁이 없어서, 몹시 우악스럽고 사나운 사람이 남의 땅을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 제주 각지에 영을 내려 담을 쌓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지금은 밭두둑과 집 옆에도 모두 각기 담을 쌓았으니, 다만 밭 경계를 정한 것일 뿐 아니라 목장의 말을 막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농업 생산과 관련하여 대정현에는 약간의 논이 있었고, 정의현, 제주목에는 논이 매우 적었다는 기록과 함께 제주의 밭들은 검은흙으로 부풀어 오르며 재배토양으로서의 등급은 아주 낮다. 제주에서의 재배 작물은 기장, 피, 산도, 차조, 콩, 보리, 메밀, 사탕수수 등 비교적 가뭄에 견디는 작물들이 재배되었다.

조선시대 제주의 목장은 국영목장인 10소장(所場)과 사목장, 민관 합동의 산마장을 중심으로 63곳의 목장이 운영됐다. 이 중 10소장은 세종 11년 제주 출신 고득종의 건의에 따라 중산간 지역을 10개로 나눠 설치됐다. 목장 경계로 해발 400~500m 지점에 돌로 쌓은 것이 상잣(上城)이고 해발 150~200m 지점에는 하잣(下城)을 구축해 말들이 농경지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개인 목장은 제주목에 34곳, 대정현에 5곳, 정의현에 14곳의 개인 목장이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 들면서 국영목장이 쇠퇴되면서 제주섬안의 일은 마정보다 어려운 일이 없었으며 목장의 일은 공출로 인한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목장을 운영하는 농업인들은 이루 말할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조선 후기 한해의 공물의 종류를 보면 공마 400∼500필, 전복 9,000여첩, 오징어 700여첩, 과일이 38,000개, 말안장이 40∼50부, 사슴가죽이 50∼60령, 노루가죽 50령, 사슴 혀 50∼60개, 사슴꼬리 50∼60개 등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 외에 표고, 비자, 백랍, 산유자, 종가시나무, 활집, 나전, 포갑, 양태모자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탐라순력도의 제주조점(왼쪽), 조선후기 제주의 말총공예.
탐라순력도의 제주조점(왼쪽), 조선후기 제주의 말총공예.

감귤과 관련하여 남환박물에는 병술년(중종21, 1526년)에 목사 이수동이 다섯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하고 감귤을 심어 그곳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으며 그 뒤로 점차로 확대되었다. 제주목에 29과원, 대정현에 6개 과원, 정의현에 7개 과원으로 제주도의 과원은 42개소이며 880여명의 군사가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재배된 감귤도 당금귤, 금귤, 동정귤, 유감, 감자, 청귤, 산귤, 동금귤, 등자귤, 당유자, 유자 등 감귤 품종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앵도, 승도, 능인, 감인, 오얏, 능금 및 살구 등 육지부의 과수가 있었으며 배, 대추, 감, 밤은 매우 희귀하고 품질이 떨어지며, 잣, 모과의 종류는 재배되지 않는 것으로 남환박물은 기록하고 있었다.

남환박물이 기록하고 있는 제주의 농업은 따뜻한 기상여건을 제외하면 강한바람, 척박한 토질, 가난한 백성 등 농업수준에 대한 기술은 타 지방보다 낮으며 제주의 주요 토산품은 농업 외의 생산물인 축산물, 수산물, 임산물 등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고자료: 경인문화사(2015), <제주지역 목장사와 목축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환박물(南宦博物)(1704), 이형상 저, 이상규, 오창명 역주.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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