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수의 꽁트] (1) 5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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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의 꽁트] (1) 5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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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양영수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양영수의 꽁트> 연재를 시작하며

바야흐로 영상시대라고 한다. 이야기문학을 감상하는 것도 문자매체보다 영상매체를 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영상매체 속에서는 금방금방 장면이 바뀌는 스토리라인을 사람이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에 깊이있는 사색과 음미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 마음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체리듬과 심리적인 템포에 따라서 메시지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는 문자매체를 이용하는 독서가 좋은 방법이다.

꽁트 게재를 시작하면서 필자가 바라는 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양영수 /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명예교수>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고영열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난 것은 중학생 때 친구 K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오래만에 고향에 와봤더니 중학교 동창회가 3일 후에 열리게 되어있어서 내가 일부러 K를 불러낸 것이었다. K와 나는 그동안에도 가끔 소식을 전하는 사이여서 쉽게 불러낼 수 있었다.

종신임기 동창회장임을 자칭하고 다닌다는, 왕년에 도의원 경력을 가진 친구였다. 내가 무명작가임을 알고있으면서도 작가라는 나의 직업 자체를 존경한다는 그의 말을 나는 사교적인 언사로 알고있으면서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며칠 뒤에 만날 어릴적 친구들의 근황을 미리 알아두기 위한 만남이었으니 만감이 교차하는 대담이기도 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 궁금했던 친구들의 소식을 주고받던 우리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고영열 얘기로까지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영열은 나의 중학생 때 여자친구로서는 나의 기억 속에 제일 선명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우리가 다닌 중학교는 별로 크지 않은 시골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한 학급이 한 학년을 이루는 작은 학교였다. 주변의 서너 개 마을 초등학교에서 진학한 학생들이 모였으면서도 그랬다.

나는 그중에서도 제일 작은 마을에서부터 도보 통학을 하는 학생이었고, K는 그중에서 제일 큰 마을, 그러니까 바로 우리 중학교가 자리한 마을의 학생이었다. 고영열 학생도 바로 그 큰 마을 출신이니까 K하고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였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들을 알게된 나하고는 그 친소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나는 중학교 다니는 동안에 K가 고영열 학생하고 흉허물 없이 가깝게 지내는 것이 부러웠다. 공부로 말하면 내가 K보다 뒤지지 않았는데도 나는 고영열의 주의를 끌 수 없었고 나는 3년 동안을 그렇게 마음 졸이는 찜찜함 가운데에서 속을 태웠다고 할 수 있다.

중학생 시절 3년 동안 나와 고영열 학생 사이에서는 별다른 감정의 교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고영열을 좋아한다는 감정 표현을 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고, 물론 그녀의 편에서 나에게 그런 표시를 해온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녀가 무슨 독심술 같은 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나의 속마음을 눈치 채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 당시의 고영열 학생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60대 중반을 맞는 지금까지도 중학시절의 고영열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고, 그것은 나 혼자만이 알고있는 비밀에 속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우리는 한 학급이 한 학년을 이루었으니까 우리의 학급편성은 자연히 남녀 혼성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인하여 일어난 아주 조그만 사건이 아직도 나의 기억창고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 우리의 체육선생님은 학생들이 체육 시간을 좋아하도록 머리를 많이 쓰셨는지, 어느 날 남자팀과 여자팀 간에 핸드볼 경기를 시키셨다. 그날 나는 요행히도 남자팀의 멤버로 출전하는 행운아가 되었다.

남학생들 수가 여학생들보다 많았기 때문에 남학생들 중에 반 정도는 탈락이 되었는데 우리 체육선생님은 운동 잘하는 아이들을 탈락시켰던 것이다. 그래야만 남녀 양팀의 경기력이 비슷해진다는 계산이었다. 핸드볼 경기를 신나게 할 정도의 실력들은 못되었지만, 상대방이 갖고있는 볼을 뺏어서 던지고 받고 하다보면 남학생과 여학생들 사이의 신체 접촉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의 손이 고영열 학생의 한쪽 손을 거칠게 스쳤던 것은 아마도 그녀의 몸이 나하고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의 정신이 팔려 가지고 나의 손이 헛놀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두 사람 손이 스치는 정도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는데도 그 극적인 순간에 고영열이가 ‘애고-’하고 비명같은 소리를 지른 것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나는 그 때에 고영열의 입에서 나온 ‘애고-’하는 음성, 그 음악소리 같은 떨림이 아직도 나의 귓바퀴 언저리에 맴도는 듯하다. 그 소리는 마치 우리들 사이의 무슨 비밀스러운 교신행위처럼 전해진 것만 같았다. 고영열은 이 순간의 기억을 아직까지 간직할 리가 없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아닌 다른 남학생을 상대하고 있었어도 고영열이가 그렇게 비명같은 소리를 질렀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오랫동안 나의 의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또 하나 고영열 학생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내가 그녀의 속살을 보아버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의 체육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은 아마도 여름철더울 때였던 것 같다. 우리는 무슨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교복 상의를 벗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남학생들은 상의를 벗기만 하면 그 안에 있는 런닝셔츠만으로도 운동을 할 수 있었는데 여학생들은 교복상의를 벗은 다음에 간단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선생님은 운동준비를 마친 학생들을 운동장에 세워놓은 다음에 반장인 나에게 교실에 가서 출석부인가 뭔가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내가 교실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고 있었는데 그 때 교실 한 구석에 있던 고영열 학생이 교복상의를 막 갈아입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고영열 학생의 양 어깨 속살을 보아버린 것은 전혀 내 탓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참으로 미안하였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내 그녀의 얼굴을 맞바로 쳐다보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 때의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그 순간 내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본 고영열이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나의 뇌리에 박혀있는 동안에는 그녀 앞에 선 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때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나는 고영열 학생에게 말도 걸고 뭔가를 함께하자고 청하기도 했을 터이니, 그렇게 꼭 막힌 맹꽁이 노릇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싶다. 내가 속옷 입은 여자의 상체를 보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릴 정도로 대경실색 직전 상태가 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할 것이다. 일찍이 전쟁통에 조실부모하여 조부모 밑에서 자란 나는 젊은 여자의 속옷을 볼 기회가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만 구름처럼 부풀려 있었던 것이다.

K하고 대좌 중에 고영열에게로 우리의 화제가 옮겨간 것은 나의 뜻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하고 소식이 끊겼던 옛날 중학교 친구들을 생각나는 대로 거명하다가 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고영열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가 중학교 졸업 후에 어떤 세상을 살았는지 소식을 모른 지가 이제 50년도 더 되었던 것이다.

고영열은 중학교를 나온 후 사범학교에 진학한 것까지가 내가 아는 거의 전부였다. 제대로 되었다면 초등교사의 길을 갔겠지만,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지냈는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 입학해서 얼마 안되는 어느 날 우리가 써낸 신상카드의 장래 지망난(欄)에 고영열이가 ‘신문기자’라고 써넣은 것을 내가 어쩌다가 훔쳐보고서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직업의 내용을 벌써 알고 있는 학생이구나 싶어서 은근히 부러웠던 기억도 떠올랐다. 사범학교를 나오고도 신문기자가 되었을까, 이것도 궁금하였다.

K는 의외로 쾌남아 같은 과단성을 보여주었다. 내가 그에게 고영열이 어디서 사는지 아느냐고 그냥 넘어가는 말투로 물어보았는데 그는 내가 물어보지 않은 사실까지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범학교 졸업한 다음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경기도 파주지방에 가서 초등교사를 했는데 지금은 고향마을에 와서 조용히 살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뜸을 들일 새도 없이 단박에 물어보았다.

--그래? 파주라면 휴전선 가까운 지방이잖아. 내가 다음에 쓸 작품은 남북 이산가족 이야기인데, 그쪽 지방에 사는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 이산가족들이 그쪽에 많이 산다는 말을 들었거든.

감각이 굼뜬 나로 말하자면 놀라운 순발력이 작동한 셈인데, K는 나의 청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핸드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걸었다.

--아, 고 선생인가? 고 선생, 중학생 때 친구 창수 기억 나지? 김창수라고 있었잖은가. ……. 그래, 그래, 그 친구가 지금 소설가가 됐어. 근데 말야, 이 친구가 지금 쓰는 작품에서 이산가족이 나오는 모양이라. 그래서 경기도 북부지방 사람을 만나면 들을 이야기가 많다나. 그러니까 고 선생 같은 사람을 한번 만나면 좋겠다는 얘기지. 어디 한번 전화로 얘기 들어볼래?

나한테로 전화가 넘어왔는데 내가 마음을 챙겨 볼 새도 없이 그녀의 다부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김창수야? 오래만에 반갑긴 한데, 김창수가 이제야 나에게 전화 걸면 어떡하냐 그래. 50년 동안 어디 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냐고. 난 이제 쭈글쭈글 할망구가 되었단 말이야.

--나도 늙긴 마찬가지여. 며칠 전에 옛날 친구를 하나 만났는데 뭐가 제일 반가웠는지 알아? 그 친구도 나와 꼭 같이 늙었다는 거야.

전화기에다 대고 뭐라고 말을 더하긴 했는데, 고영열처럼 다부진 말은 못내 꺼내지 못했다는 느낌만이 치밀어 올랐다. 옛날 친구를 만났는데 다 같이 늙은 것이 제일 반가웠다니, 그렇게 센스 없는 말을 하다니. K가 나에게서 전화를 넘겨받았다.

--3일 후엔 우리 동창회가 있으니 그 때 김창수를 만나면 되겠네. 그럼 그 날 잊지 말고 나오는 거여, 응-.

나는 다음에 고영열을 만나면 내가 오늘 전화에서 말 실수 한 것을 사과할 결심까지 하고 동창회 날을 기다렸다. 아직도 고 선생의 목소리는 곱고 윤이 난다고 말하면 내 마음까지도 알아주겠지 싶었다. 그동안 어디 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냐고 말하는 건 동창회에 나와서 나를 보고싶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동창회 날에는 모처럼 이발관에 가서 머리 단장까지 하였다. 말쑥해진 얼굴 모습에 어울리도록 옷까지도 젊은이 스타일을 골라서 입었다. 그러나, 동창회 모이는 자리에 고영열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모이기로 정해진 시간이 벌써 30분이나 넘어가고 있었다. K가 입을 쩍쩍 다시며 말했다.

--고 선생도 자네처럼 오래만에 나오는 동창회인데 나오지 않네, 거. 정년퇴임하기 전엔 고향에 오기가 어려웠지. 이젠 여기 제주도로 이사했다고 말했는데 안 나오네. 남편도 일찍 작고했으니 자유로운 몸일 텐데.

--오래만에 얼굴 보이는 것이 더 어려울 거야.

생각해 보니 나의 말이 고영열의 마음을 제대로 짚은 것 같았다. 역시 그녀의 생각이 나보다 깊구나 싶었다. 그녀가 오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옛날에 나를 좋아하기는 했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는 K에게 그녀의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고영열에게 프로포즈하지 못한 것을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그녀 앞에 나타날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잘한 일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K가 일어서면서 환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착잡하게 뒤섞이는 나의 마음을 한 곳으로 다잡아주었다.

--야-, 금년에는 박 여사가 다 나왔네. 이제 작년보다 한 사람이 더 나왔으니 이만하면 종신회장 할 만하지 않은가.

무슨 큰 경사이기나 한 것처럼 기운차게 탄성을 발하는 K의 목소리가 어디 멀리 있는 나라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양영수 /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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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져요 2019-11-08 11:54:38
꽁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앞으로도 재미있는 글
많이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