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오늘]<4>사각의 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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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오늘]<4>사각의 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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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집 근처에 있는 비디오 가게에 아주 오랜만에 들러 비디오를 고르고 있었다.

무엇을 볼까 고민 중에 매장에 있는 대형 TV화면에서 서양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그래 ‘반칙왕’이나 보자’하고 비디오를 들고 나왔다.
 
“원 투 쓰리 경기가 끝났습니다. 한국 선수들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경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는 장내 아나운서 멘트와 함께 영화에서는 박수와 승리의 함성소리가 섞인다.

평범한 은행원인 영화속 주인공은 소극적인 성격때문에 아침에 출근하면 상사에게 말 대답한번 제대로 못하고 매일 구박에 시달리다가 우연한 기회에 레슬링을 배우게 되면서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활기차게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내가 태어나던 1970년대에 최고의 스포츠라고 하면 당연 ‘프로레슬링’이었다. 그 인기는 대단하였다.

TV가 흔치 않았던 터라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이른 저녁식사를 끝내고 동네 사람들이 흑백 TV가 있는 집에 남녀노소 구분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감자나 고구마를 쪄 먹으면서 봤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TV는 컬러가 아닌 흑백이었고, 대문을 여닫듯 양쪽으로 열고, 요즘같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엄지와 검지를 돌리면 ‘탁..타닥..탁..’ 소리가 나는 수동 채널이었다. 몇 개 안되는 채널이었지만 이제는 수동채널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심판의 시작소리에 맞춰 모두들 숨을 죽이고 경기에 몰입이 된다. 우리 선수들은 우리의 기대와는 아랑곳없이 초반에는 일방적으로 외국 선수들에게 당하고, 반칙을 당하는데도 심판은 얄밉게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진행시킨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아이고 시상 어떵허코. 저 심판 뭐햄서게. 반칙 햄신디도 몰라그네.”하며 안절부절 못해 하신다.

외국 선수들은 짓궂게 한 선수만 집중 공격했고, 같은 파트너인 동료 선수나 경기를 지켜보는 우리들을 안타깝게만 했다.

레슬링의 스타 우리의 김일, 당수의 귀재 천규덕 선수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면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아이고 시상 어떵허코.”하는 탄식과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그러나 계속해서 당하지만은 않는 법, 마지막 힘은 비축했는지 김일 선수가 상대방을 코너로 몰고 가더니 주특기인 박치기가 터져 나오면 상대방 선수들은 하나 둘씩 비틀거리며 나가떨어지고, 그 동안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면 쓰러져 있던 천규덕 선수도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당수로써 상대방을 제압하고, ‘해드락’과 ‘드롭킥’을 연이어 하면서 상대 선수들을 매트 위로 쓰러뜨리고 만다.

“하나, 둘, 셋.”하면 끝날 것을 “셋”하는 순간에 상대방 선수의 어깨가 매트 위에서 떨어지거나 순간순간 반칙으로 위기를 넘기는 상대방을 지켜보는 우리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레슬링 최고의 스타 김일 선수의 박치기가 한 번 더 상대방의 이마에 작렬되고, 상대선수가 정신을 못 차리고 매트에 쓰러지면 우리 선수들은 재빠르게 상대방을 제압하고 심판이 매트를 손바닥으로 세 번 내리치고, 우리 선수들의 손을 들어주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레슬링이 승리로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어제 보았던 레슬링 동작을 따라 하다가 많이 다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로레슬링은 쇼다. 짜고 하는 거다.'라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 동안 손에 땀을 쥐며 재미있게 봤던 인기 스포츠 종목이 한 순간에 사양길로 접어드는 것을 보면서 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지난 1989년 김일 선수가 지병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레슬링의 부활을 보지 못한 채 영면 하셨다. 장례식에는 예전에 같이 했던 동료뿐만 아니라 이왕표, 노지심 등 후배 선수들과 김일 선수를 알고 있는 외국 선수들의 조문 행렬도 이어졌다는 신문기사도 읽었다.

가끔씩 외국의 프로레슬링을 보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운동경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패싸움을 연상케 한다. 의자로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치는가 하면, 링 밖으로 나뒹굴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잔인하고 악랄할 정도의 고통을 주면서 유유히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제는 프로레슬링도 새롭게 변화를 줘서 예전의 그 명성을 다시금 이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헤드라인제주>
 

이성복씨 그는...
 
이성복님은 제주장애인자립생활연대 회원으로, 뇌변병 2급 장애를 딛고 지난 2006년 종합문예지 '대한문학'가을호에서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수필가로 등단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적극적인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이성복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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