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서로 보는 조선후기의 농업Ⅱ
상태바
농서로 보는 조선후기의 농업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2)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정조(1779∼1800년) 때에는 강력한 권농정책 아래 농서의 대대적인 모집이 있어 그 중에서도 북학파의 석학들이 농업측면에 보여준 관심은 괄목할만한 일이다.

농업면에 탁견을 보여준 학자로는 박제가(朴齊家)와 박지원(朴趾源)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빈번한 연경(燕京) 방문에서 얻은 견문과 경험에 보태어 예리한 식견으로 북학의(北學議)와 과농소초(課農小抄)를 각기 엮어 내놓았다. 이 밖에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 이규경(李圭景)의 백운필(白雲筆), 서유구(徐有榘)의 행포지(杏蒲志)·종저보(種藷譜) 그리고 백과전서식의 임원경제지, 정약용(丁若鏞)의 논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농업론 등이 실학파학자들의 농정과 농업기술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나타났다. 이들 논저들은 탁월하고 혁신적인 내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농론(農論) 자체로 또는 보급되지 않은 교본(敎本)으로 매몰되고 말았다. 자연재해에 따른 흉작과 악정(惡政)에 시달린 농민들에게 대용식품이 될 외래작물의 도입은 이 시기의 식량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무제-1.jpg
▲ 박제가의 북학의(왼쪽), 박지원 흉상과 과농소초

그 중에서 고구마(甘藷), 감자(馬鈴薯) 및 옥수수가 특기할 만한 것들이다. 고구마는 1763년(영조 39)에 통신사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씨고구마[種藷]를 얻어 부산진으로 보낸 것이 그 도입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거의 같은 때에 이광려(李匡呂)와 강계현(姜啓賢)도 씨고구마를 얻어 심어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필리(姜必履)는 동래(東萊)에서 시험재배하여 민간에 장려하는 한편 감저보(甘藷譜)를 지었다. 

이들은 씨고구마를 서울로 보내 재배를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재배는 한때 영남지역에만 보급되었던 모양이다. 1813년(순조 13)에 이르러 김장순(金長淳)과 선종한(宣宗漢)이 많은 씨고구마를 기호지방에 보급시키기 시작했으며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824년에 당시 호남순찰사였던 서유구가 종저보를 편찬하여 호남지방에도 재배를 장려하였다. 고구마의 재배에 알맞은 땅은 기름지고 가볍고 질이 거치른 땅으로 양지쪽을 택하여 여러 차례의 겨울갈이로 벌레알을 죽이고 거름을 한 뒤 곡우 전에 3, 4차 갈아서 둔덕을 만들어 모를 옮겨 꽂고 생육이 진전하여 무성하게 되면 적절히 마디와 덩굴을 막거나 자르고, 가벼운 서리가 한두 번 내린 뒤 수확한다. 

종저보의 풍부한 내용을 보면 영남, 호남, 기호 각지에 알맞는 고구마 경종법(耕種法: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방법)을 알아내느라 무던히 노력한 자취가 역력하다. 이와 같이 여러 인사들이 고구마의 재배법을 연구하였고 그 보급에 힘썼건만, 그 재배법과 저장법이 까다로워 파급의 속도가 느렸다. 감자는 고구마보다 60년이나 뒤늦어 함경북도를 통하여 도입되었으나 불과 10여년 만에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갔다. 

두만강을 건너 도입, 보급한 공로자는 명천김씨(明天金氏), 이향재(李享在), 신종민(申鍾敏), 김사승(金士升) 등이 있다. ‘북저(北藷)’라고도 하는 감자는 ‘남저(南藷)’라고도 불린 고구마와 달라 한랭지에도 잘 견디며, 재배법이 비교적 간단하며 다수확성이다. 이 새로 도입된 작물은 평지는 물론 화전(火田)에 이르기까지 단시일에 보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거의 모든 농가마다 심는 옥수수는 30여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크게 나누어 수끼계·당쉬계·강남(강냉이)계·옥수수계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때 어느 경로를 통하여 들어왔는지 농가집성, 색경(穡經), 산림경제 등에도 이 곡물이름의 기록이 없고, 1766년에 나온 증보산림경제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옥수수에 5품종이 있으며 비옥한 땅에 자라고 쪄먹고 죽을 쑤어먹기 좋다 하였다.

무제-2.jpg
▲ 홍만선의 증보산림경제(왼쪽),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1800년대 초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서유구의 행포지에는 옥수수 품종이 청·백·홍 3품종이 있으며, 가루로 하여 양식으로 충당할 수 있고 맛이 밀가루에 견줄만하나 국민들이 그리 숭상하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에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땅콩(落花生)은 1778년경에, 완두콩(豌豆)은 두만강을 건너 들어온 것 등이 있다.

조선 후기 농업정책은 영조(1724∼1776년) 때에 제언당상(堤堰堂上)을 두어 모경자(冒耕者:임자의 승낙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사람)를 과죄(科罪)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제방을 개수하며 수차(水車)를 제조, 보급하는 등 수리정책에 힘을 썼다.

균역법을 베풀어 일반민의 납세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었고, 그 보충은 어염세와 은결(隱結: 탈세를 목적으로 조세의 부가 대상에서 제외시킨 땅)의 과세로 이루었다. 권농의 교서가 빈번하였고, 농가집성, 구황촬요(救荒撮要) 등 서적의 중간이 있었으며, 옥토에 담배가 과하게 재배되므로 그것을 금하기도 하였고, 우역(牛疫)이 창궐하여 사람이 대신 쟁기를 끌게 되므로 소 잡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으며, 측우기를 각지에 나누어준 때도 있었다. 정조 스스로 농정에 유의하여 제언의 개축, 제언절목(堤堰節目)의 전국 반포, 새로운 제언(萬年堤, 祝萬堤 등)의 축조가 있었고 권농행사가 많았으며 농서를 널리 구하기도 하였다.

헌종(1834∼1849) 때에도 권농윤음(勸農綸音)이 내리고 각 도에 제언수축의 공사가 있었으나, 큰 가뭄과 흉년이 잦아 모를 내지 못한 논에 다른 곡식을 심는 일과, 모내기 금지의 안(案)이 대책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황폐하여 방치된 땅의 경작을 장려하여도 비옥한 전답마저 많이 폐기되고 감히 개간할 의사도 보이지 않았으며, 어쩌다 맞는 풍년에도 영세민의 고생은 오히려 흉년 때보다 못하지 않았다. 

여러 해 체납된 환곡과 신포(身布: 평민의 身役 대신에 바치던 무명이나 베), 그리고 부역에 대한 독촉이 성화 같아 1년 소작의 곡식이 모조리 상납되는 참경을 빚어내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이때부터 척신에 의한 세도정치가 점점 심하여가면서 관기(官紀)의 부패는 더하여가고 국민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게 되었다. 철종 때에는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절정에 다다랐다.

조선 헌종(1834∼1849년)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1,032구의 월령체(月令體) 장편가사인 ‘농가월령가’에 따르면 가을보리를 냉동처리하여 봄에 파종할 수 있게 하는 기술(현대용어로는 春化處理)이 있었으며, 벼에는 조(早)·중(中)·만(晩)의 익는 시기별 품종이 있어 각기 파종·이앙·수확의 시기와 방법이 잘 구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맥류의 그루갈이에도 윤작의 순서가 잘 짜여 있어 조, 기장, 수수 등과 콩류의 안배가 묘하게 되어 있다. 거름의 준비에 있어서도 인분뇨, 외양간거름은 물론 재의 마련 및 두엄과 녹비의 제조를 위한 가지가지 풀과 잎의 수집과 활용 등 용의주도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목화재배에서는 전업(專業)을 위한 집약재배가 논술되어 있다. 다른 특용작물로 염색용 작물과 제지용 작물인 닥나무 등의 재배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담배의 파종·모종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기호작물이 얼마나 신속히 이 땅에 보급되었는가를 암시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농가의 필수용품인 밧줄, 멍석, 이엉, 잠박, 도롱이, 뱁댕이 등의 제조를 위하여 수시로 띠, 갈대, 물억새, 돌삼 등 야생잡초를 십분 활용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참고자료: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사계절(2015),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jpg
▲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수정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