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의 개국과 제주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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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2)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청동기시대에는 신석기시대보다 재배하는 작물이 종류가 늘었다. 보리, 콩, 팥, 조, 기장 등 다섯 가지 곡식이 모두 재배되었다. 육지부 유적에는 청동기시대에 곡식만 재배된 것이 아니라 복숭아, 살구, 매실 등 과일과 채소도 재배되었지만 제주에서는 과일과 채소가 재배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바람이 많은 제주의 특성상 과일 재배는 부적합한 환경 일 것이며 그나마 채소는 재배되어 졌을 것으로 추정 해 본다. 

전 시대에 비해 특히 발전적인 것은 청동기시대에는 이랑과 고랑을 일정한 간격으로 만들어서 작물을 재배 했다. 신석기 시대에는 평평한 땅에 구멍을 내서 씨를 뿌렸지만 이 시대에는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서 씨를 뿌리면 훨씬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추위에 약하고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는 보리 같은 작물은 바람을 막아주고 물기를 보존하는 고랑에 씨를 뿌려 키우고, 습기를 싫어하는 조와 콩 같은 작물은 반대로 이랑에 심어서 키운는 방법을 활용했을 것이다.

타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농업에서 가장 크게 발달한 것은 벼농사이만 제주토양은 물빠짐이 좋은 화산섬의 특성상 벼농사는 그리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벼농사는 타 곡물에 비해 생산성이 높아 벼를 식량에 충당하고도 남는 것을 저장할 수 있었다. 잉여농산물의 생산은 고대국가 형성에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물빠짐이 빠른 제주에서의 벼 재배는 어려워 육지부 보다는 고대국가 형성의 기반은 어려웠다.

농기구는 크게 갈이 농기구와 거두기 농기구로 나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각각의 농사일에 걸맞은 농기구들을 갖추어 나갔다. 대표적인 농기구는 거두기 농기구인 반달돌칼이다. 이후 철제 낫이 등장하면서 반달돌칼도 점점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밭을 가는 갈이 농기구로 신석기시대에 마찬가지로 돌로 만든 보습을 이용하였다. 이때는 아직 농사에 소를 이용하기 전 이었기 때문에 돌보습에 줄을 달아 사람이 직접 끌었다. 이외에도 동물 뼈나 돌로 만든 괭이, 곰배괭이로 밭을 갈았다. 밭을 가는데 돌로 만든 농기구 보다는 나무로 만든 농기구인 따비를 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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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양동 유적지 입구 모습(왼쪽), 삼양동 유적지 농업 활동 재현 모습.

청동기시대 사용하던 농기구는 주로 뼈, 돌. 나무로 만들어져 청동으로 만든 농기구는 찾기 힘들었다. 청동으로 농기구를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갔다. 당시 청동기에 주로 사용된 재료인 구리와 추석은 매우 귀한 재료였다. 청동으로 만든 유물들을 살펴보면 청동칼,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주로 제사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 많았다. 이 도구들은 주로 당시 지배층에 속한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청동이 본격적으로 농경에 활용 되어질 즈음 철을 이용하여 기구를 쓰는 단계로 넘어갔다.

탐라(耽羅)의 개국신화는〈고려사〉,〈동국여지승람〉,〈탐라지〉,〈영주지〉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한라산 북녘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에서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 3신인(三神人)이 솟아났다. 이들은 사냥을 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바닷가에 밀려온 나무함을 발견해 열어보았더니 돌함과 사자(使者)가 있었다. 돌함을 열자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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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청 벽화 삼성신화의 3형제와 3공주 

벽랑국 사자는 '우리 임금이 세 딸을 낳고 이르시되 서쪽 바다에 있는 산에 신자(神子) 셋이 탄강(誕降)하여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 하시며 세 따님을 보내셨으니 배필을 삼고 대업을 이루소서'라고 말한 뒤 구름을 타고 떠났다. 세 사람은 나이순대로 장가들고 활을 쏘아 각자 거처지를 정한 뒤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소와 말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륙지역의 개국신화는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강림(降臨)식인데 이 신화의 특징은 시조가 땅속에서 솟아 나오고 상자 모양의 배를 타고 왔다는 등의 남방의 해양문화적 신화적 요소가 나타난다. 또한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단계와 씨족사회가 부족국가로 바뀐 배경이 담겨 있다.

탐라의 개국과 비슷한 시점인 우리나라의 철기 시대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철제농기구가 만들어졌다. 특히 철제 따비와 괭이, 쇠낫 등이 개발되면서 농업생산성 크게 높아졌다. 철기시대에도 모두가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건 아니고 목재 농기구도 많이 쓰였다. 철제 농기구는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주로 지배층이 많이 사용하였고 지배층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주로 목재 농기구를 사용해야 했다. 

지배층이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농작물 수확량은 크게 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지배자가 등장한 시기가 철기 시대이다. 철제 제작기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발전했다. 거푸집을 활용해 찍어내는 주조방식 말고도 쇠에 열을 가하하여 망치로 두들겨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 단조 방식이 등장하였다. 철기기대부터 농사에 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소는 농업이 발달 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 동물이다. 철제 농기구가 농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소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의 와서 벼농사가 발전하고 논으로 쓰는 땅이 많아졌다. 그래서 물을 가두어 두는 수리시설인 저수지가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우경이 시작되면서 농업생산력이 발달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대국가(고구려, 백제, 신라)의 체계를 보다 확실하게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고대 국가들은 주변에 작은 나라를 정복하면서 많은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들 나라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공물로 거두어들였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지배층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철제 농기구를 활용해 농업생산을 꾸려나갔다. 이런 경제적 기반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반면 농민들은 자기들의 노동력으로 직접 농사를 짓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이 토지를 빌리기로 했다. 자연재해가 닥치면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한 경우에는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철기 문명으로 계급이 발생한 것이다. 농민들은 수확물의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받치고 농사일을 하지 않을 때에도 국가의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농민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때때로 크고 작은 봉기를 일으켰다. 통일신라시대 말에 일어난 여러 농민봉기는 새로운 중세 국가를 세우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농업은 고대 국가성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중세 국가를 세우는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제주에는 화산회토의 토양 특성상 물을 가둘 수 있는 수리시설 축조가 어려워 벼농사가 많지 않았으며 보리, 조 등 밭작물 위주로 작물이 재배되었다. 화산토의 부드러운 토양 특성으로 우경(牛耕)의 필요성이 적었을 것이며 이 시대에 우경을 사용했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며 섬이라는 특성상 주변 나라의 정복을 통한 농경지 확보도 어려워 탐라는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규모의 고대국가로의 발전은 늦었다.

※ 참고자료: 강용희(2018), <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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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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