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로 보는 제주인의 삶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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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로 보는 제주인의 삶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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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8) 선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선사시대의 정착생활 이후 농업활동을 영위하면서 마을이 조그맣게 형성 된다. 의식주 해결, 야생동물의 침입에 대한 공동 대처, 자연재해로 부터의 보호 등을 위한 마을 구성원들의 공동체가 형성이 되고 운영이 된다. 이렇게 구성된 마을은 초보적인 사회로 발전하고 마을 구성원 중 씨족의 연장자 등 마을의 수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며 씨족간의 결합 등으로 더 큰 사회로 발전한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발전상을 추정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선사 시대의 비석의 일종으로, 한국에서는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의 대표적인 장례문화이다. 고인돌은 거대한 바위를 멀리까지 운반하여야 하므로 일정 정도의 인력이 동원될 수 있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지배층의 일부는 청동기를 사용하였고, 농기구로는 신석기 시대보다 발달한 반달돌칼 등의 도구를 사용하였다. 또한, 농기구를 이용하여 벼, 보리, 조, 콩 등 발달된 방법으로 다양한 곡물을 경작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정착생활에 들어가면서 소, 멧돼지, 사슴, 노루, 닭 등을 사냥보다는 집에서 길러서 먹는 비율이 높아졌다. 한 마을에 정착하는 사람 수가 많아지면서 주거지도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원형 움집보다는 집을 크게 짓는 데 유리한 직사각형의 움집을 많이 짓고 생활하는 경향을 보인다. 움의 깊이도 집짓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낮아지게 되어 반움집이 되었다. 농경지를 앞에 둔 산 바로 아래쪽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토기는 강가나 바닷가에서 주로 생활했을 때 사용했던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이 아랫부분이 뾰족하지 않고, 납작한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미송리식토기 등을 이용하게 된다.

제주도에는 80여기의 고인돌이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된 제주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기원후 3세기까지 고인돌이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인돌의 분포가 한정적이고 밀집된 곳이라도 10∼20여 기에 불과하여 고인돌 피장자는 적어도 마을 구성원 중 일정한 지위에 있는 신분임은 분명하다. 제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당시 선사인들의 신체 조건을 고려하면 최소한 건장한 남정 15∼20인 이상이 한 번에 모여야 축조 할 수 있는 규모이다. 곧 고인돌이 발견되는 지역에는 부녀자, 고령자 등을 포함하면 최소한 40∼50명 이상 거주하였을 것이라 상상을 해본다. 또한 제주도 고인돌은 대부분 단독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군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고인돌 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분포 지역은 특히 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당시 먹거리 충족의 방식이 어로활동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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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서 주요 고인돌의 분포도.

탐라 형성기(기원전후)의 대표적인 묘제는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일정한 인구의 규모, 이에 따른 취락의 형성, 본격적인 농경과 협업체의 구성, 불평등 사회 구조 등의 배경 하에 축조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사회 구조를 갖춘 탐라 형성기의 삼양동 마을 유적으로 이곳에 자리한 지석묘는 지하 매장 주체를 둔 2톤 미만의 개석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룬다. 결국 고인돌의 분포와 동일 시기의 토기가 동반 되는 정도에 따라 살펴보면 탐라 초기에 한라산 북쪽에는 용담동, 오라동 일대와 광령리, 고내리, 하귀리, 곽지리, 옹포리 일대에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거주 집단이 있었고, 한라산 남서쪽에는 신도리, 일과리, 동일리, 화순리, 창천리와 가파도 일대, 남동쪽으로는 신례리, 신천리, 신풍리, 신산리 일대에 크고 작은 마을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우도를 제외하고 구좌읍 종달리∼조천읍에 이르는 제주 동북부 지역은 고인돌의 분포가 미미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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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문화 공원 고인돌 재현 모습(왼쪽), 신도리 해안가 고인돌(오른쪽).

탐라 전기시대(200∼500년)의 특징을 살펴보면, 새로운 유력 개인묘인 철기 부장의 적석목곽묘가 출현하며 철기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난다. 탐라 성립기에 진행된 계층 구조의 불평등화가 심화되는 최고조의 과정에서 등장한 지배 계층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유적수가 급증한다. 이는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연결되며, 소규모 취락이 증가하게 되고 확대되는 일련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중심 취락의 기능과 역할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고인돌의 경우, 이전 시기에 비해 축조 형태의 우월성을 보이는 축조 기술상의 발전이 진행된다. 이는 노동력의 집약화가 강화되고 지배층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묘제 문화를 보면 이 시기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대외적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산지항과 삼양동 유적 등에서 외부와의 직·간접적인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 주는 대외 교류 유물이 다량 확인되고 있다. 계층 구조에 있어서도 옥환, 동검, 동촉 등 권위를 상징하는 위신재와 각종 장신구류 등 계층 구조의 불평등화를 시사하는 유물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후기에 철기가 등장하게 된다. 이 철기는 삼각형 점토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나 소형 철도자편 등 소량에 불과하며 다음 단계인 탐라 전기에 들어서서 철기의 유입과 사용이 증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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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용천수 분포도(파란색)(왼쪽), 예래동 용천수 논짓물 모습(오른쪽)

제주도 고인돌의 분포 지역은 대부분 해발 100m 미만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분포되고 있다. 이는 제주의 토양·지질적 특성상 생명의 원천인 물 문제 해결을 위한 용천수 분포지역과 유사하며 당시 생계유지의 수단인 먹거리 해결을 위한 생활은 풍부한 바다자원을 활용한 어로·해산물 채취 활동이 주를 이루었으며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제주에서 농업 활동이 적당한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인돌 분포 지역은 제주에서의 농업활동이 시작 되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알수 있다.

※ 참고자료: 강용희(2018), <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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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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