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9)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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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9)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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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윤미 객원필진

하루를 살기가 벅차게 헉헉거리는 부모의 하루를 아무런 방법 없이 그저 바라보면서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안치고 반찬을 끓이고 냉수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시고 한라산 중턱에 있는 일자리까지 데려다줄 버스가 서는 곳까지 30분 이상을 걸어가기 위해 아직 해도 일어서지 않은 어스름을 벗 삼아 나가셨었다.

그런 어머니의 힘듦을 어렸던 나는 안타까운 게 아니라 궁상을 떨어대는 것만 같아 속이 끓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리품을 팔며 채 몇 백 원도 되지 않는 푼돈을 아까워하는 어머니를 나는 화가 나서 울곤 했다.

하지만, 그 때 어머니가 새벽이슬을 적셔가며 하루 품을 팔아 벌어 오는 돈은 눈물이 날만큼 작은 불과 몇 천원.

그 몇 천원이 모여 보름에 한 번씩 어머니가 일당을 받아 오는 날이면 우리 어린 자식들은 시장 통 닭 집에서 고소하고 향긋한 카레양념을 해 튀긴 통닭을 먹을 수 있는 기쁘기만 한 그런 잔칫날 이였다.

일당을 받는 날이면 어머니는 장을 보기 위해 일부러 멀리 도는 버스를 타고, 장에 내려 집에서 병아리 새끼마냥 삐악거리며 앉아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만 귀 기울여 기다리는 어리고 철딱서니 없는 우리에게 먹일 통닭이나 귀한 먹을거리를 사와 하루 노동으로 젖은 피로를 끌어안은 채 저녁밥상을 차려 자식들을 먹이곤 하셨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도 그리 할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보름에 한 번씩 일당을 받아오는 어머니에게 언제나 무언가를 요구하곤 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늘 웃으시면서 이런 말을 하셨다.

“고마니 이서보라....이번이 월급 받으민 허게....”

채, 130cm 도 되지 않는 작은 몸으로도 어머니는 거인과 같은 일을 하셨지만 우리 자식들은 그런 고달픔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가 보름에 한 번씩 받아오는 누런 봉투에 든 돈으로 사주는 시장통 양념통닭 한 마리와 명절이 다가올 무렵이나 되어야 새로 산 티셔츠나, 바지 하나, 운동화 한 켤레를 우리는 더 기대했을 뿐 이었다.

“엄마, 그 월급 받으민 헐 거 잘도 하신디...그거 다 해질 거?”
“... 게메 이...”

우리는 어머니에게 항상 그렇게 입을 내밀며 항의를 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웃으며 기다리라고만 하셨다.

“그디 이서보라... 어멍, 이번이 얼마나 일 해져시니?.... 이번인 비오지 안허난 어멍, 일 열닷새 다 해신개ㅤ. 게난, 거 받으민 저버니 타온 거영 해영 윤자 학교 납부금 물고 남으민 은아 운동화 호나 사질거여... 독발 사당 볶아주민 먹을따? 낼랑 장에 강 상 오져?”
“게메?... 은아네신디 들어보게...”

늘 사람 좋다는 소리만을 들으며 사시던 부모님은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으로 젊은 시절 빚보증을 서준 값을 톡톡하게 치르며 나이를 갉아 먹혔다.

그리고 겨우 그 빚더미에서 벗어난 어느날엔가 귀밑머리에 서리가 앉은 아버지의 몸에 암이란 짐이 울컥, 올라앉아 가난이란 것이 누군가의 표현처럼 결코 불편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심장과 가슴을 서럽게 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몸으로 아프게 겪어야 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던 나이만 먹은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번거롭고 정신없는 가족들에게 걸리적 거리지 않게 비켜 앉아 주는 것만으로 하루를, 한 달을, 그리고 일 년, 아버지가 건강을 추스르는 동안을 살았다.

가만히 앉아 다급한 내 어머니의 늙은 걸음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앉아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원생활을 챙기며 뛰어다니는 내 어린동생들을 배웅하면서...

가만히 앉아 아버지가 배를 가르고 있는 수술실을 상상하면서...

나는...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 아팠다.

내가
내 스스로 나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죽이고 싶게도 했었다.

자식이라는 이름이...
자식이라는 자리가...
자식이라는 사실이...

진저리가 나도록
버리고 싶었던 몇 년의 시간...

초라하고 핼쑥한 안색에 항생제라는 걸 먹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속을 게워 올리며 측은한 미소를 짓던 아버지는
이제 배를 갈랐던 흔적만 남아

게으름피우면 안 된다고 
칠순의 나이가 다가오는 지금도
매일을 기름 냄새 역한
차에 앉아 운전을 하며
푼돈을 버신다.

그런 부모님을 위해
내가 이번 추석 명절에 할 수 있는 건

글을 써 주었다고 보내준 작지 않은 돈
그것으로 무엇을 해드릴까?

행복한 고민을 해본다.


<강윤미 / 헤드라인제주 객원필진>

* 필자인 강윤미 님은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학년에 다니다 휴학 중입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강의실을 오가는, 그러나 항상 밝은 얼굴을 하는 강윤미 님의 모습은 아랏벌을 항상 훈훈하게 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게 돼, 아랏벌의 빈자리는 더욱 커 보이게 합니다.
그의 나이,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늦깍이로 대학에 입문해 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분입니다.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항상 직면해 있지만, 그는 365일 하루하루를 매우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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