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소녀의 4.3상흔..."귀신병 알고보니 50년전 포탄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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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녀의 4.3상흔..."귀신병 알고보니 50년전 포탄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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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본풀이 마당, 김순혜 할머니의 '4.3 증언'
"오빠는 폭도로 몰려 총살..제발 한명만이라도 살려줍서"

제주4.3 당시 제주시 오라동에 살았던 김순혜 할머니(78)에게 제주4.3의 상흔은 67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악몽의 기억'으로 남는다.

31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가 주최한 열네번째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기억 in 4.3'에서 김 할머니는 남편 양치부 할아버지(76)와 함께 증언자로 나서 67년만에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꺼내들었다.

양치부, 김순혜 부부가 31일 열린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 4.3증언을 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31일 열린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기억 in 4.3'. <헤드라인제주>

4.3의 광풍이 불었던 1948년, 김 할머니는 당시 12세 소녀였다. 형제는 5남매로, 위로 오빠 2명이 있었고, 남동생 2명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4.3 기억은 오빠 2명이 폭도로 몰려 토벌대에 끌려가던 것으로 시작했다.

"그날은 할아버지 생일날있어요. 집에서 생일 밥을 먹고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둘이서 밭에서 보리를 갈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마침 연동에서 토벌대가 폭도 2명으로 쫓아서 오라리까지 내려온 상황이었죠. 폭도를 잡지 못한 토벌대는 길가에서 우리 오빠들을 발견하고는, 이젠 오빠들을 폭도들이라 하며 잡아갔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듯, 김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손주 2명이 토벌대에 붙잡혀간다는 말을 들은 우리 할머니가 뛰쳐나와 '아이고, 이거 우리 손지우다' 하며 토벌대에 매달려도 소용이 없었어요. 할머니가 연동까지 쫓아가면서 '우리 손지 하나만 살려줍서, 하나만이라도 제발 살려줍서' 하며 울며 사정하자 작은 오빠는 보내주고 큰 오빠만 끌고 갔어요."

결국 '손주 한명만이라도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에 작은 오빠는 화를 면했지만, 큰 오빠는 연동 공회당 우녁밭에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나중에 우리 남편 얘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연동리 사람들을 전부 모이라고 해서 우리 오빠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묻고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연동 사람들을 가리켜) 폭도가 분명하다며 총살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오라리 사람을 잡아다가 연동 사람들 한테 아느냐고 물어보면, 모르는게 당연한거 아니냐"며 "그렇게 큰 오빠는 아무죄 없이 폭도로 몰려서 희생됐다. 그날이 1948년 동짓달 열하룻 날, 지금 음력 11월10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양치부, 김순혜 부부가 31일 열린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 4.3증언을 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할머니의 두번째 기억은 막내 남동생 얘기였다.

동생이 죽게 된 것은 다름아닌 군인차에 놀라 달아나던 '소'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동네에 소가 20~30마리 정도 됐는데, 그날 우리 차례(소에게 풀을 먹이는 당번 차례)가 아니었으나 둘째 오빠가 막내동생을 업고 나갔다가, 마침 군인차가 올라온다고 하자 차를 비켜 서 냇 바위쪽으로 섰는데 차 소리에 놀란 소들이 막 날뛰자 오빠가 소를 피하다가 막내동생을 떨어뜨렸다"며 "바닥에 떨어진 막내를 소들이 밟아버려 등이 볼록 튀어난 곱새가 됐다."

동생은 4.3회오리로 인해 병원에도 못가고 집에서 치료를 하다가 5개월만에 숨졌다고 했다.

김 할머니의 직접 피해도 우연치 않게 발생했다고 한다.

"연동리가 불태워진 날이었어요. 날이 저물어서 밭에 둔 소를 몰러 섯구린질로 나갔다는데, 길 아래쪽에서 남자 2명이 막 뛰어오는 것이 보여 무슨 달리기 시합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때 연동리에 불을 붙이러 올라가던 군인차가 망원경으로 그 두명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 두남자는) 산(산사람)과 관계된 사람이었던 같았다."

2명의 남자를 발견한 군인들은 로켓트포를 발사했는데, 하필 그 로켓포는 김 할머니가 서 있는 길가 큰 돌에 맞았다고 한다.

"돌이 폭파되면서 '쾅'하는 굉을 들고 나는 바로 기절을 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보니 주위가 깜깜했다. 입고 있는 몸빼(바지)는 피로 가득 찼고, 등어리가 선뜩선뜩 해서 만져보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 등과 오른쪽 허벅지에 포탄 파편이 박힌 것이었다."

김 할머니는 "제가 포탄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어도 우리 오빠는 (군인들이) 자기도 죽여버릴까봐 집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밤이 되어서야 저를 찾으러온 오빠 등에 업혀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날 밤 병우너으로 옮겨져 파편 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김 할머니는 이후 양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다. 포탄에 맞은 기억은 잊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통증이 시작됐고, 그로인해 잠을 이룰 수 없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고 한다.

"병원을 다 돌아다녀봐도 감기증상이라고만 하고, 몸은 아픈데 병명을 모르니 점쟁이도 찾아가고 심방도 찾아가고, 귀신이 붙었다고 해서 치병굿도 여러번 했다"는 그는 "그런 중 1994년 병원에서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폐에 박힌 파편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4.3의 상처를 50년 가까이 안고 살아온 것이다.

김 할머니는 "처음에 병원에서도 파편조각인줄 모르고 암이라는 진단을 했다"면서 "서울 병원에서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제 등에 새겨진 흉터를 보더니 저보고 물었는데, 제가 '4.3사건 당시 포탄 파편을 맞았었다'고 얘기하자 바로 제거수술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연신 눈물을 훔치며 묵묵히 듣고있던 양 할아버지도 4.3 얘기를 꺼내들었다.

양 할아버지는 4.3 당시 부모를 모두 잃은 경우다. 아버지는 당시 연미마을에서 오라리로 소개된 뒤 토벌대에 연행됐고, 이후 목포형무소로 이송됐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현재까지 행방불명 상태다.

청각장애인이었던 어머니는 4.3 당시 피난을 가던 중 토벌대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그의 부모의 경우 혼인신고가 돼 있지 않아 현재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본적지별로 위패가 나뉘어 진설돼 있는데, 부부 위패가 함께 모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이날 4.3증언에서는 양용해 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장도 직접 나와 자신이 겪은 4.3과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얘기를 전하며 67년만에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헤드라인제주>

양치부, 김순혜 부부가 31일 열린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 4.3증언을 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31일 열린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 양용해 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장이 4.3증언을 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윤철수 기자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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