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4.3 시인과 '인생은 아름다워'..."아, 당신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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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4.3 시인과 '인생은 아름다워'..."아, 당신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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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세상] (6)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내게는 학살에 대한 간접 트라우마가 있다.

오랫동안 제주4·3 문제에 천착해온 아버지의 시로 4·3을 접하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평화와 상생을 기원하는 소재로 쓰이고 있으나 나에게 4·3은 그냥 끔찍한 것으로 기억된다.

초등학생 때 접한 아버지의 시 가운데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엄마가 서북청년단에게 갖은 방법으로 유린당하는 동안 장롱 속에 숨어 그것을 지켜보면서 오줌을 싸는 어린 아들. 그것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아, 다른 전쟁이나 학살 사례를 접하면 으레 그 학살과 고문 장면부터 머릿속에 그려지곤 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스틸컷.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스틸컷.

<인생은 아름다워>는 1930년대 말 파시즘이 당대를 지배하던 이탈리아에서 유태인에게 자행되던 강제노역과 학살 상황을 그린 영화이다. 막상 영화 안에 끔찍한 장면은 잘 나오지 않는데, 낙천적인 성격의 주인공 귀도는 자신과 함께 끌려온 아들 조슈아를 위해 이 상황을 철저히 게임인 것처럼 속이고, 아들의 초점에 맞춰 영화는 잔인한 장면을 최대한 배제한 채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보고서 단순히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만 기억되지 않았다. 귀도가 희극적으로 연출하는 상황 속에서 그림자처럼 전쟁의 비극은 따라다닌다. 조슈아가 자는 동안 귀도가 목격한 풍경은 가스에 질식하여 죽임을 당한 시신 무더기였다. 그 안에는 아마 귀도의 숙부도 있었을 것이다. 귀도는 절대 그것을 아들에게 보여주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독일군에 의해 죽으러 가는 상황조차 아들에게는 게임으로 보이게끔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를 선보인다. 마지막에 조슈아는 귀도가 이 게임의 선물이라고 속인 진짜 탱크(사실은 연합군의 탱크)를 만나고 어머니 도라와 재회한다. 영화 장면만 보았을 때 조슈아는 이 상황을 끝내 게임으로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 전체를 들려주는 화자는 다름 아닌 조슈아다. 영화는 ‘이것은 내 아버지의 이야기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귀도 역을 연기한 로베르토 베니니는 이 영화의 감독이면서 아버지 귀도 역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준 아들 조슈아이기도 하다. 결국 <인생은 아름다워>는 베니니가 겪은 체험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물려받은 기억의 산물이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스틸컷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스틸컷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스틸컷.

아버지였으면서 다시 아들이 되어 그것을 돌이켜보며 그가 느꼈을 심경을 떠올려 보았다. 내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제주4·3의 잔인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죽이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시리즈 연작시는 제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문 장면들을 그렸다. 4·3을 소재로 한 마당극에서는 제주 사람들을 괴롭히는 서북청년단 앞잡이 역을 맡아 연기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게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귀도가 조슈아에게 심어준 상황은 왜곡된 것이었지만, 훗날 아들에게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베니니가 우리에게 보여준 장면은 우스웠지만, 그로부터 극대화된 비극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대인 학살 문제를 뇌리에서 씻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세상에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잊어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를 물을 때, 무엇 하나가 절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억되어야 할 일을 기억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리고 전승받은 그 기억을 다시 후대에 전승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학살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며, 그 참상과 인간의 도리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기억시키는 것은 이제 그것을 물려받은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아버지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로부터 배웠다.<김소영 대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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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 2015-03-29 16:01:55 | 39.***.***.71
67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을 앞두고 인간애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참 좋은 글이네요 ㅎㅎ

피카딜리 2015-03-29 13:10:36 | 27.***.***.178
글의 요지와 구도가 좋네요
저도 집에 묵혀놓은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를 다시 꺼내게 만드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