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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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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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용국 제주도감사위원회 조사과
김용국 / 제주도감사위원회 조사과.<헤드라인제주>

서양에서 유래되었지만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사회 지도층 또는 고위직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얘기할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라는 말을 종종 인용한다.

중국의 초대 국가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마오안잉(毛岸英)이라는 장남이 있었다. 그는 1950년 6.25 당시 압록강(국경)에 주둔한 중공군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참모 겸 러시아 통역병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10월 18일, 마오안잉은 중공군 선봉부대인 38군이 진군할 때 량상추 사령관과 마주친 자리에서 "저를 일선으로 보내주십시오. 전방에 있는 병사들과 같이 근무하고 싶습니다"라며, 전선의 최전방 근무를 요청하였고, 이에 량상추 사령관은 "그건 내 소관 밖의 일이니 펑더화이 사령관님을 잘 모셔라,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6일 뒤인 1950년 10월 24일 평안북도 대유동에 있는 중공군 인민지원군 사령부가 미군기에 발견되자 참모들은 펑더화이 사령관에게 동굴로 피신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펑더화이 사령관은 참모들의 건의를 묵살하였고,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 다음 날인 1950년 10월 25일 마오안잉은 중공군 사령부의 당직을 맡아 자리를 지키던 중 미군의 폭격을 받게 되었고, 당시 마오안잉은 뜻과 마음을 세운다는 이립(而立)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공군 사령부에서는 마오쩌둥 국가 주석에게 마오안잉의 시신을 중국으로 옮기겠다고 건의하였고, 이에 마오쩌둥은 "그 누구도 특별대우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후, "지도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일화는 훗날 그가 세계적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게 한 동기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마오안잉은 지금도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혁명 능원의 일반 묘원에 묻혀있다고 한다.

평소 우리 사회에서 종종 회자되는 말들이 있다.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솔선수범과 높은 도덕적 의무감이다. 존경할 만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없어 충성도 의리도 없는 사회와 조직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도자가 정의로울 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다수의 청렴한 제주특별자치도 공직자는 지금까지 음지에서 도덕적 의무감과 사명감을 갖고 봉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리라 확신한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에서 묵묵히 일하는 공직자들이야말로 사회적 지도층은 아니라 하여도 우리 사회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 하는 짧은 생각을 해 본다.<김용국 / 제주도감사위원회 조사과>

*이 글은 헤드라인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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