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의 살과 뼈를 갉아 먹으며 노리개로 만드는 세계적 관광지 제2의 하와이 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써, 생활의 보금자리로써의 제주도를 원하기에 특별법 저지, 2차 종합개발계획 폐기를 외치며 또한 이를 추진하는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이 길을 간다.”
- 고故 양용찬 열사의 유서 중에서
고故 양용찬 열사가 분신한 것은 1991년 11월 7일의 일이었으니 이제 20년이 다 되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故 양용찬 열사 20주기 추모제가 지난 11월 6일 서귀포시 매일시장 일대에서 열렸습니다. 추모굿과 공연, 추모비 제막식 등이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도중, 잠시 20년 전 그 상황을 되짚어 봅니다. 저는 그 당시 「주간 탐라」라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있을 때였습니다. 편집회의를 끝내고 저녁 식사 겸해서 술도 한 잔하고 오후 9시쯤 편집실에 돌아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서귀포에서 큰 일이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무작정 서귀포로 향했습니다. 다음은 그 당시 썼던 기사의 초고입니다.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반대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제주도 남단 서귀포에서 한 청년이 분신자살을 해 충격을 던지고 있다. 5-6월 전국적으로 번졌던 민주화 투쟁의 열기와 수많은 사람들의 분신을 접했던 우리들에게 이곳 제주에서의 분신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11월 7일 오후 7시 40분 경, 양용찬씨(26세,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회원. 이하 나사청)가 온 몸에 석유를 뿌리고 건물 옥상에서 분신, 1층 건물로 투신을 하였다. 현장을 처음 목격한 바로 옆 건물의 김춘호씨(한라장식 대표)에 따르면, 한 어린이가 그 장면을 보고 신문지에 불이 붙은줄 알고 달려가 불을 끄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상히 여겨 달려가 보니 사람이 불에 휩싸여 있어 경찰서와 소방대에 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고 순찰차와 119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8시가 채 안된 시각이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양용찬씨는 이미 처참하게 허옇게 뼈까지 드러난 상태로 불타고 있었다고 한다.
사건 직전 양용찬씨는 언제나처럼 밝은 표정으로 나사청 사무실에 들렀다. 사무실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원충보, 이용호, 이승훈씨 등에게 '목욕하러 간다.'고 한마디만 하고 나갔다. 원충보씨 등은 사건이 있고난 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에 밖에 나와 보니, 불에 타 쓰러진 젊은이를 포대에 사서 구급차에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까지도 그들은 전혀 당사자가 양용찬씨인 줄은 몰랐다. 오후 8시 20분경 경찰들이 사무실에 들어와 신원조사를 하는 과정에서야 유품들을 확인하고 알 수 있었다. 당시 양용찬씨는 유서를 써놓은 대학 노트 1권과 현금 17만2백2십원, 가방 등의 유품을 남겼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서귀포의료원에서는 약식집회가 있었다. 양용찬씨의 유서를 낭독하던 정원태(제주도개발특별법제정반대 범도민회,정책위원)씨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속울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인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특별법 폐기와 민자당 타도의 한길로 투쟁해 나가자!’는 결의문이 장내를 숙연케 하였다.
양용찬씨는 1966년 생으로 제주대학교 사학과를 다녔고 분신 전에는 타일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생전의 양용찬씨는 항상 밝은 모습에 꾸밈없는 성격으로 무난한 인간관계를 유지했었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영안실을 지키던 그의 친척들도 ‘너무 착하고 명랑했으며 악의가 없는 성격이었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의 보모는 넋을 잃은 채 말도 못하고 눈물만 삼키고 있다. 동료들인 나사청 회원들도 평소 그가 ‘지역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석했다’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기어이 한 젊은이의 목숨까지, 특별법 반대 민자당 타도 외치며 서귀포 청년 분신자살’ 1991년, 「주간 탐라」의 기사 중에서
이 긴 기사를 그대로 재인용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본적인 내용을 기사로나마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또한 알고 있더라도 그저 관성적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저 자신을 포함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처음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20년 전 그때에도 일부 위정자들이나 개발론자들은, 개발만 하면 제주도가 훨씬 잘살게 된다고 우겨댔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밀어붙였고 그들의 뜻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20년 후인 지금 그들의 말대로 되었습니까? 지금 정말로 훨씬 잘살고 있습니까? 예, 일부 개발사업자들은 전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제주도민들은, 아닙니다!
군사기지, 영리병원, 영리학교, 한라산 케이블카, 쇼핑 아울렛, 카지노……. 열사가 간지도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이런 것들이 아직도 유령처럼 제주사회를 배회하며 언제든지 제주도를 말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좀 패와지고 넉넉해져야 하거늘, 어찌하여 더 모작지고 돼싸지기만 하는지.
왜 다들 제주도를 특별하게 말아먹지 못해서 안달입니까? 왜 다들 국제적으로 조져대기 위해 발광합니까? 지금의 제주는 누구를 위한 특별자치, 무엇을 위한 국제자유입니까? 이러다가 정말 ‘특별자해自害도’나 ‘국제자살自殺도시’가 될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합니다. 열사의 뜻이었던 ‘제주도민이 주체가 되는 제주도’는 너무 멀어지고만 있어 애타기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세계적인 제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주인에 의한, 제주인을 위한
제주다운 제주를 원할 뿐
- 양용찬, 「아버님 전상서」 중에서
그렇습니다. 열사가 온몸으로 사랑했던 그 제주를 위해 이제 우리 다시 처음처럼 다시 시작합시다. 열사의 제주사랑 정신은 평화를 위한 투쟁과 다르지 않고, 열사의 민중사랑은 공동체적 저항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제주공동체를 지키고, 제주의 미래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에 맞서는 숭고한 싸움입니다. 바로 그 마음 자세로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추모굿을 집전한 이정자 심방은 ‘영게울림’(망자의 뜻을 심방의 입을 통해 전하는 말)을 통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여러 상황에 같이 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열사의 심중을 전했습니다.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고, 우리 모두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개발의 과정에서 ‘자기의 땅에서 유배’되었던 아메리키 인디언들의 말로는 ‘미타구예 오야신’이라고도 합니다. 열사와 하나로 연결되는 그 마음으로 저는 다음의 시를 열사와 우리들 모두에게 전하려 합니다.
불로 가신 그대여
다시 오실 때에는 물로 오시라
절망으로 가신 이는 희망으로 오시라
불의에 맞서 가신 이는 시퍼런 의로움으로 오시라
행여 기념하러 오지 마시라
이 기만적인 화해와 상생의 시대에
그대는 불화와 상극의 진정으로 오시라
신열로 들끓는 억센 돌개바람으로 오시라
저당 잡힌 고운 바닷가 다시 지킬
거대한 희망의 해일로 오시라
하늘길 땅길 바닷길 이어지듯
그대는 그렇게 구름길 바람길 열린 길로 오시라
눈물로는 오지 마시라
한숨으로도 오지 마시라
반성하고 수고할 줄 모르는 우리들
오만한 아집을 삭일 찬 서릿발로 오시라
분노가 진실한 정의가 되게
그대는 맞불의 분노로 오시라
먼 길 돌아 다시 오시는 그대여
오실 때에는 참 생명 평화 평등의 단칼로 오시라
-졸시,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 전문
<헤드라인제주>
<김경훈 객원필진/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