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화국'...똥개도 한국말로 짖습니다
상태바
'영어 공화국'...똥개도 한국말로 짖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 <38>영어를 끊다

김경훈 객원필진. <헤드라인제주>
 우리들은 끄떡하면 외세를
 자랑처럼 모시고 들어오지
 8・15 후, 우리의 땅은
 디딜 곳 하나 없이
 지렁이 문자로 가득하다
 모화관에서 개성 사이의 행길에 끌려나와
 청나라 깃발 흔들던 눈먼 조상들처럼,
 오늘은 또, 화창한 코스모스 길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불쌍한 장님들은, 대중도 없이 서양깃발만
 흔들어댄다.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 중에서)

영어공용화, 영어조기교육, 영어몰입교육, 영어교육도시, 영어전용타운! 옳거니! 이제야 제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화는 자발적으로 가랑이를 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어를 포기하면 영어는 마음으로 열립니다. 유전된 한국인을 부정하면 영어가 자연스레 모국어가 됩니다. 꿈도 영어로 꾸고 비석도 영어로 쓰고 한국사도 영어로 배우고 한국어도 모두 영어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는 학생이나 국민들은 그들만의 보호구역을 만들어 그들끼리만 한국어를 실컷 사용하도록 방목해버리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그렇습니까?

몇 년 전에 여가수 보아의 2집을 보면서 저의 큰딸이 했던 말입니다.
“여기 열네 곡 중에 한글 제목은 두 개밖에 없네. 야이, 완전 미친년 아니? 졸라 싸가지 없어!”

그렇습니다. 요즘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가사의 반 이상이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가히 영어의 전성시대입니다. 바야흐로 영어의 광풍狂風이자 해일海溢의 시대입니다. 이 미친바람에 국민들과 학생들은 이리저리 몸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고, 해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국어나 국사를 영어로 교육하면 돈 들여서 외국 어학연수 필요 없다는 당선자의 얘기도 있었습니다. 어느 관청에서는 영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영어로만 회의를 하기로 하였다고 했습니다. 영어교육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하는 것도 모자라 ‘유치원 때’부터로 더 내려가더니 이제는 이젠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영어 공화국’이자 ‘영어 식민지’가 자발적으로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학에 교련이라는 군사과목이 있었다  군사독재의 마수가 학교에도 침투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암약하던 교관이 하루는 군 사를 안 가르치고 난데없이 전국민의 영어 상용화를 주창하였다 그러면 우리 어멍  아방 같은 촌사람들도 다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거냐고 따져 물었더니, 그 학기  교련 학점은 여지없이 낙제였다 영어와 교련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따져 묻기보다,  나는 영어와 교련을 동시에 끊는 걸로 복수를 대신하였다 영어가 미친년처럼 개판 치는 요즘 세상이지만, 영어 한 단어라도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날이면 나는 지랄 같이 오장이 뒤틀린다 조선의 촌놈으로 살기 위해 막걸리부터 찾는다 
(졸시, 「영어를 끊다」 전문)

예, 그렇습니다. 저는 영어를 끊었습니다! 영어깨나 해야 지식인 취급받고, 자나 깨나 영어를 입에 달고 살아야 제대로 된 상류사회의 일원이나 되는 것 같이 행세하는 이 착각의 시대, 영어깨나 해야 출세를 하고 인정을 받는 이 사회에서 저는 그냥 영어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냥 아주 쉽게 휴지 버리듯 버려버렸습니다.

 저는 동시대인으로서 의식적으로 영어를 털어내려고 시대와 싸우고 있습니다. 시대와 싸우고 있다는 말은, 아직도 ‘외래어’로써의 영어까지를 다 털어내지 못해서 주억거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일상생활에서 담배 하나를 살 때도 “‘에세’ 하나 줍서!”라고 영어 단어를 써야 합니다. 전자우편을 쓸 때도 ‘아이디’가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대화를 할 때에도 영어를 쓰지 않으려고 하면, 말을 하다가도 많이 중치가 막힙니다. 그러지 않아도 못하는 말에 이런 의식적인 제어장치를 뇌에 달아놓으니 말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 써야하는 경우에는 나 자신이나 상대방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서 쓰고는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어를 쓰지 말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저의 삶의 방식이고, 저 안의 제국주의를 비질하려는 나름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자녀들에게도 영어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영어를 사용할 사람은 하십시오. 그러나 다음의 말은 꼭 명심해서 사용하십시오.

한자漢字를 가지고 죽고 못 사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이라네. 우리는 중국에 중독 되어 제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네. 중국은 우리를 아주 보잘 것 없는 소국 으로만 여기는데 오직 우리만이 중국의 한 주가 되기를 자원하고 있다네. 딴 나라 의 정신으로 사는 것은 인간이 짐승의 혼으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네.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 중에서)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배우는 것은 그들과의 상호 평등한 교류를 위해서입니다. 그들 나라와의 주종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의 관계에 있는 나라라면 ‘주’의 관계에 있는 나라를 이기기 위해서 그들 나라의 말과 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 일본어를 배우는 신세호라는 분처럼 말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논리는 일국의 정체성을 계속 무너뜨려가고 있습니다. 무국적 문화가 판을 치고, 비주체적인 몰개성이 비싼 상품으로 포장되어 유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릔지’로 대변되는 현 정부의 영어정책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까지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정부와 기업이 더 앞장서서 경쟁하듯이 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어를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 사이에 점점 깊은 양극화의 골을 만들고 있습니다. 영어로 대표되는 가진 자들의 교육은 그들만의 독점체제가 되어 권력과 재력을 대물림하는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회의 불통은 정치나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언어의 불통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쓰는 상류사회와 한국어를 쓰는 하류사회로 나뉘어 또 하나의 주종관계가 형성될 지도 모릅니다. 그 사회 위로 영어 원어국민들이 오만하게 등장하여 상・하류사회 모두를 시선을 내리깐 채 경멸하듯 조소할 때가 올 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그렇습니까?

 허나
 다녀가는 높은 오만들이여
 오해 마시라,
 그대들이 만져본 건 역사의 껍데기,
 알맹이는 여기
 언제나 말없이 흐르는 금강처럼
 도시와 농촌 깊숙한 그늘에서
 우리의 노래 우리끼리 부르며
 누워 있었니라.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 중에서)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삽니다. 똥개도 ‘멍멍’ 한국말로 짖습니다. 참새도 ‘짹짹’ 한국말입니다. 흐르는 물도 ‘물물’ 한국말입니다. 한국말을 하는 데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두 평등합니다. 한글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글자끼리 서로를 찌르거나 해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상호 독립과 존중의 정신이 한글을 만든 철학에도 담겨져 있습니다.

이 정신이 한국어와 영어뿐만 아니라 만국의 언어를 관통하는 평등한 교류의 핵심입니다. 자발적 언어 식민지화가 아니라 자존적 언어주체로써 도도하게 존재감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그 등불 아래에서라면 저는 거리낌 없이 영어 ‘아이디’를 쓰고, ‘에세’ 담배를 거침없이 주문하며, 보아의 영어 노래를 당당하게 들을 것입니다. <헤드라인제주>

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는...

   
김경훈 객원필진. <헤드라인제주>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4.3이야기, 현시대의 시사문제, 책을 읽은 후의 느낌, 삶의 의미과 가치에 대한 생각 등을 시(詩)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프로필.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우아한 막창」,「운동부족」, 「한라산의 겨울」, 「고운 아이 다 죽고」,「삼돌이네집」, 「눈물 밥 한숨 잉걸」이 있고 마당극대본집으로 「살짜기옵서예」가 있다. 

제주 4.3 일본어 시집 「불복종의 한라산」도 최근 출간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4.3 드라마 10부작「한라산」을 집필했다.

제주4.3 연구서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와 「그늘 속의 4.3」,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인들」을 공동집필했다. 현재 제주4.3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김경훈 객원필진/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수정
댓글 3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다은 2011-10-19 15:24:59 | 118.***.***.254
글 정말 잘 읽었고, 내가 알지 못하던 싯구절도 접할 수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특히 정체성과 관련해서도 다시한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드릴 께요....

태태몽 2011-11-21 22:37:35 | 123.***.***.105
좋은 글 잘 읽고 현재 야기되고 있는 영어 공용화에 대해 정당한지에 대해 시와 조화롭게 섞여 재미있었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합니다!

송현우 2011-10-13 22:06:48 | 122.***.***.228
나도 영어 안 하고, 못 하는디..우리 언제 만낭 막걸리라도 듭이쌉주~!
글 잘 읽어수다. 대학 댕길 때,내가 사투리(제주어)를 하영 쓰니까,같은 과
여자 분께서 '에이그,저 촌놈'헙디다. 조금 쪽팔려서 되받아치기 해십주.
그래,이 도싯년아! 용심이 부에 조끗디 강 헌 말이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