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냉이골 무덤..."벌초라도 좀 하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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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냉이골 무덤..."벌초라도 좀 하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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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훈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 <30> 속냉이골 벌초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큰 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현대사의 최대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희생된 영령들의 유 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2연대 제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 분자로 몰아 의귀초등학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12일(음력 48.12.14) 새벽 무장대들이 내습, 주민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주둔군 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때 희생된 십수 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 왔다.
우리 생명평화탁발 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리 군인 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 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 5. 13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일동
-「속냉이골 의귀사건 희생자 유골 방치터」 안내판 문구 전문

그러니까, 2004년 5월이었습니다. 생명평화 탁발 순례를 하시는 도법 스님 일행이 제주도 곳곳을 순례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순례의 일정 중 많은 부분이 4・3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사리 용기를 내서 순례 기획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체 일정 속에 이곳 ‘의귀리 속냉이골 무장대 무덤’ 순례를 넣어달라고 말입니다.

다행히 도법 스님께서 흔쾌히 동의해주셨고 예정에 없던 천도재도 치러 주셨습니다. 천도재를 마친 스님께서는 저를 불러 나지막하게 ‘벌초라도 좀 하지 그랬어!’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스님께서는 아주 유하게 에둘러 말씀하셨지만, 스님의 말씀은 저의 가슴을 쇠망치로 후려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 비겁한 놈들, 벌초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들이 뭔 4・3일을 한다는 거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수차례 속냉이골을 드나들었지만, 그저 마음에만 품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작 무장대 무덤 벌초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훅훅 달아오르고 어디 쥐구멍이나 담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일주일 내에 벌초를 조직하겠다고 우물쭈물 대답을 겨우 했습니다.

55년만의 벌초! 순례 일행인 박남준 시인의 표현처럼 '야만의 잡풀을 베고 폭력의 덩굴을 걷어내고' 보니까 드러나는 세 개의 작은 봉분들! 조천읍 북촌리의 너븐숭이 애기 돌무덤보다 조금 크나마나한 무덤이었습니다. 제물을 진설하고 다시 한번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수경스님의 독경과 도법스님의 생명평화 강론에 이어 시인은 시를 낭송하고 가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 다시 여기 왔습니다.
그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접고 도법스님 수경스님의 독경소리에 힘입어 우리 다시 여기에 왔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 무덤가 잡풀을 처음으로 뽑아냅니다
속 좁고 비겁하여 선뜻 벌초 한 번 해드리지 못했던 우리들의 마음이 현실입니다
바보 같고 부끄러운 마음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중략)
말씀하지 않으셔도 당신들의 마음 헤아립니다
50년 이상 이 좁고 후미진 곳에 버려진 채 오욕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얼마나 그 한이 깊었겠 습니까
속 좁고 비겁하게 선뜻 벌초 한 번 해드리지 못했던 우리들의 정성을 모아 언젠가 멀지 않은 때에 햇볕 따사로운 양지로 영령들을 고이 모시고자 합니다
이제는 낯설어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 그 이름들을 다시 크게 부르고자 합니다
가령 자유와 해방과 자주와 민주 이 이름들을 다시 노래하고자 합니다
통일된 조국의 이름으로 그 모든 죽임과 죽음의 어둠을 물리치고 참된 생명과 평화를 외치고 자 합니다
- 졸시, 「여기에 왔습니다 - 의귀리 속냉이골 천도재에서」 부분

그 후로 해마다 양력 8월 15일 날 벌초를 해오고 있습니다. 올해로 여덟 번째가 됩니다.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어도 무조건 강행하고 있습니다. 적게는 열 명에서 많게는 서른 명 정도가 매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벌초 날짜를 8월 15일로 못 박은 이유는 그날이 공휴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통일된 조국의 이름으로 그 모든 죽임과 죽음의 어둠을 물리치고 참된 생명과 평화를 외치고자’ 하는 그 이유 말입니다. 그러나,

토벌군은 충혼묘지의 열사가 됐고, 현의합장묘의 유골은 그나마 나중에 봉분을 쌓고 잔디를 입혀 유족들이 관리를 했건만, 이들은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돌무더기에 깔려 짓눌리고 나무뿌리들과 뒤엉켜서 55년 동안 내팽개쳐진 산부대 사람들. 그들은 과연 누구던가. 그들은 대통령이 4・3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한 이 시점에도 여전히 동토에 누워 신음하고 있다. 폭 도로, 빨갱이로 남아서 잠들지 못한 채 헐떡이고 있다. 그들은 영영 영면할 수 없는 것일까.
- 김동윤, 「어떤 죽음들, 열사에서 폭도까지」, 『시평』 2004년 봄호 중에서

그렇습니다. 속냉이골 무장대 무덤은 여전히 방치된 채 쓸쓸히 누워 있습니다. ‘토벌군은 충혼묘지의 열사가 됐고, 현의합장묘의 유골은 그나마 나중에 봉분을 쌓고 잔디를 입혀 유족들이 관리를 했건만, 이들은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장대 관련자라고 해서 제주4・3희생자 선정에서도 제외시켜버리는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 잡아먹으시오’하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관련 유족들이 나올 때까지는 우리들이 벌초를 이어가지고 말입니다. 그것이 팔자든 전상이든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이든 간에, 도법 스님에게 욕을 복삭 얻어먹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내년 8월 15일에도 벌초는 이어질 겁니다. 다른 일로 바빠서 못 오는 건 할 수 없습니다만, 내년에는 다시, 또는 처음으로 의귀리 속냉이골에서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벌초를 하는 일이니만큼 낫 한 자루 챙겨 오시는 건 잊지 마십시오. <헤드라인제주>

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는...

   
김경훈 객원필진.<헤드라인제주>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4.3이야기, 현시대의 시사문제, 책을 읽은 후의 느낌, 삶의 의미과 가치에 대한 생각 등을 시(詩)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프로필.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우아한 막창」,「운동부족」, 「한라산의 겨울」, 「고운 아이 다 죽고」,「삼돌이네집」, 「눈물 밥 한숨 잉걸」이 있고 마당극대본집으로 「살짜기옵서예」가 있다. 

제주 4.3 일본어 시집 「불복종의 한라산」도 최근 출간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4.3 드라마 10부작「한라산」을 집필했다.

제주4.3 연구서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와 「그늘 속의 4.3」,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인들」을 공동집필했다. 현재 제주4.3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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