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꾼과 지역주민 하나로..."사연을 들려주세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나요? 여기는 월평마을 자치방송국 라디오 방송 '돌벵듸로 올레'입니다."
28일 오후 4시 즈음부터 서귀포시 월평마을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곧 시작될 라디오 방송을 앞두고 음악을 준비하랴, 대본을 익히랴 바쁜 손을 멈추지 않는다.
30분 가량 흘렀을까. 올레 7코스에 끝자락에는 어딘지 익숙한 음악 소리가 울려퍼진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올레꾼들은 가던 길을 뚝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지역주민들에 의해 꾸려지는 '월평마을 자치방송국'은 오늘도 동네 어르신들과 꼬마들, 외지의 올레꾼들에게 낫낫한 미소를 선사했다.
어느덧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자원으로 성장한 제주 올렛길. 이 중에서도 서귀포시 외돌개와 월평동을 잇는 올레 7코스의 풍광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하루 수백명의 올레꾼들이 이 곳 월평마을을 찾아오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 월평마을은 이렇소'라고 마땅히 소개할만한 거리가 없어 안타까움이 컸다.
올레 7코스의 종점에는 월평마을 홍보관 '돌벵듸'가 들어서 있지만, 올레꾼들에게는 기념품이나 특산물을 파는 곳으로만 비쳐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라디오방송'. 종점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해 하루전인 27일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돌뱅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사연과 노래도 들을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쉼터이면서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 아이디어를 제안한 돌벵듸로 DJ 김국희씨의 설명이다.
문화도시공동체 쿠키에서 진행하는 예술인집 레지던시로 현재 월평 마을에 살고 있는 김국희씨. 쿠키는 지역의 빈집을 예술가들에게 제공하고, 그 일대에서 창작활동을 하도록 돕는 네트워크다.
월평마을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한 문화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차에 아이디어를 건네자 이내 주민들도 호응했다. 스피커를 보강하는 처마도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주는 등 열성적으로 지원해줬다.
오경식 월평마을 회장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지난 3월에 월평마을 홍보관이 건설됐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사무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부분이 아쉬워 고민을 하던 중에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이죠."
라디오는 주민들과 올레꾼들의 참여에 의해 이뤄진다. 거리에 놓인 게시판에는 짧은 사연과 신청곡을 받고 '질문 이어달리기', '이야기 이어달리기' 등의 코너도 준비돼 있다.
'돌벵듸로 올레' 방송이 개통하고 가장 첫번째 받은 신청곡은? 이름 모를 올레꾼이 신청한 '쑥대머리'였다. 첫 곡으로 틀어도 될까 DJ와 마을 사람들을 순간 난처하게 했지만 예정대로 방송을 탔다. '나름 느낌이 있었다고' 자평하기도.
이 곳은 마을 어린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요즘 어린이들이야 흔히들 PC방, 노래방 등을 놀러간다고 하지만 버스틑 타고 20분은 나가야 시내에 닿을 수 있는 월평마을의 어린이들은 놀이터가 따로 없다.
라디오 방송은 어린이들에게도 신기한 구경거리다. 행여 실수하지는 않을까 살짝 긴장한 동네 어른들이 무색하게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자유롭게 즐긴다. 최근 트렌드인 '보이는 라디오'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마을 어르신들의 사연이 소개됐다.
"아들 넷에 딸 둘이 있는데 다들 잘 컸어. 나 고기도 많이 사주고 약도 사주고 나한테 잘해. 애들 생각한다고 사는게 달라지나. 그냥 각자 건강하고 열심히 살았으면 해." 김기환씨의 사연에 이어 신청곡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울렸다.
동네 어린이들의 사연도 들려온다.
"엄마. 태어나게 해줘서 감사하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날마다 수영을 배우고 있는데 더 열심히 할게요." 노영준군의 신청곡은 유재석과 이적의 '압구정날라리'다.
그야말로 세대를 껑충껑충 넘나드는 방송. 뛰어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제주도에 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지역주민이 묻자 '돔베고기가 먹고 싶어요' 올레꾼이 답한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올레꾼이 묻자 '가족입니다. 그리고 사촌과 친척입니다' 주민이 답한다.
방송국 앞 게시판에는 이렇게 주민과 올레꾼들의 대화의 장이 마련돼 있다. 이곳을 지나치던 올레꾼들은 즉석에서 듣고싶은 곡을 신청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주고픈 곡을 신청하고는 한다.
친구와 함께 올레길을 찾아와 방송을 듣던 김형연씨(경기도 수원시)는 "정말 사람 사는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너무 좋다"고 라디오 청취 소감을 짧게 밝혔다.
라디오방송의 첫 시작은 끊었지만 앞으로가 더욱 바빠질 듯하다. DJ인 김국희씨가 오는 9월께 서울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마을내의 DJ를 물색해야 한다.
이미 몇몇 대기자들이 줄을 서고 있는 눈치지만,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상황이다. 컴퓨터로 음악을 검색하는 법에서부터 마이크와 스피커 장비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주민들 스스로 꾸려야한다.
오경식 마을회장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국 앞에 조그만 간이 의자 같은 것을 갖다놔서 올레꾼들이 편하게 방송을 들을 수 있게끔 만들 생각"이라고 밝혔다.
기회가 된다면 마을 전역에 방송을 하는 방안을 모색해보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누구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방송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사람사는 향기가 나는 월평마을의 '돌벵듸로 올레'는 매일 오후 4시30분 올레7코스 종점의 송이슈퍼 앞에서 진행된다. 소소한 거리라도 좋으니 저마다의 사연을 하나씩 챙겨와 보는 것도 좋겠다. <헤드라인제주>
<박성우 기자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