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의 '외로운 투쟁', "이래서는 안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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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의 '외로운 투쟁', "이래서는 안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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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운동가 후손이 '작은 기념관' 만든 까닭은?
"日 비행기 몰고 탈출 항일투쟁...정부에 완전 속았어요"

간간이 비가 내리며 잔뜩 흐렸던 일요일인 27일.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본향당 인근에서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임도현(任道賢) 선생(1909-1950)을 기리는 '임도현 자료 기념관'이 첫 손님들을 맞이했다.

간판 대신 <日 군용기 몰고 탈출한 영웅이 태어나고 잠드신 곳>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린 작은 기념관에는 항일투쟁을 했던 기록물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화려하지 않은 개관식 행사이지만, 와흘리와 인근 주민들이 발걸음을 하며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임도현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기념관 전경. <헤드라인제주>
독립운동가 임도현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 <헤드라인제주>
임도현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기념관. <헤드라인제주>
독립운동가 임도현 선생의 조카인 임정범씨. <헤드라인제주>

손님들을 맞이한 이는 임 선생의 조카뻘인 임정범씨(56. 탐라중 한문교사).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손님들을 맞았다. 그러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임씨는 "백부님의 한(恨)이 아직도 풀리지 못해 죄스런 마음"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취재진들에게 2시간이 넘도록 '억울함'을 호소했다. 임도현 선생의 항일투쟁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은 3년전.

당시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내용의 언론보도가 나왔었다. 그리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한 두번째 심사가 이뤄진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상황은 정체돼 있었다. 한때 언론보도가 떠들썩 했지만, 그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일을 잊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임도현 선생, 그의 항일투쟁 기록은?

임도현 선생은 1931년 일본 도쿄 인근의 다치카와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훈련을 받다 동료 7명을 포섭해 훈련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그 후 상하이외국어학교와 류저우 육군항공학교, 육.해군대학교 등에서 차례로 수학한 뒤 중위로 임관해 쓰촨(四川)성 중경중앙군사정부 직속부대에 소속돼 장제스를 보좌하며 실전에 참가했다.

만주의 소만 국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오른쪽 눈썹 위 두개골이 부서지는 큰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됐다.

일본에서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으나 1935년 비행 탈출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대신 가마가제 특공대원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 특수임무를 수행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다시 다치카와비행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이후 부상 후유증을 핑계로 비행 대기자 명단에 올려 놓고 있다가 다시 탈출해 고향인 제주도에 들어와 숨어 살던 그는 1936년 5월 검거돼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에서 무고와 공갈 혐의로 기소돼 10월형을 선고 받아 목표형무소에서 1937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특히 1932년 상하이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전기고문 등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다.

고향 제주에서도 중국으로 빠져나가려다 2차례나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41년에는 마을에서 공출과 징병 거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을 맞아 학교 건립 등의 계몽운동도 벌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50년 41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모친이 4.3사건 당시 소개작전으로 집이 모두 불에 탈때 건져낸 장롱 속의 자필 이력서를 통해 확인됐다. 이 자필이력서는 1940년 고향으로 돌아와 그가 손수 적어놓은 것이다.

일본 탈출 내용은 조카 임정범씨가 국가기록원에서 얻는 '1936년 5월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 재판기록'에서 뒷받침하고 있다.

나머지 수료증 등은 4.3당시 모두 불에 타 남아있지 않았다.

임도현 독립운동가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입증하는 사진. 류저우항공학교에 있을 당시 촬영한 것으로 보이며, 이 사진은 조카 임정범씨가 어렵게 구했다. 사진 앞줄 가운데의 뒷짐을 쥔 모습이 임도현 선생. <헤드라인제주>
독립운동가 임도현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에 내걸린 독립운동 증빙자료. <헤드라인제주>
임도현 독립운동가가 직접 쓴 이력서. <헤드라인제주>
임도현 독립운동가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일본 총독부 판결문. <헤드라인제주>

#독립유공자 서훈 매번 '거절'..."괘씸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데,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2004년 말 조카 임씨는 국가보훈처를 찾아가 백부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해 문의했다. 당시 이듬해 있을 3.1절 기념 독립운동가 선정에 따른 심사가 이미 끝나있었기 때문에 2005년 초에 다시 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2005년 3월쯤 그는 정식으로 신청했다. 하지만 그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으로 있었던 사람은 이력서의 내용을 사전에 검토해본 후 막말까지 서슴치 않았다고 했다.

임 선생의 기록 중 1년에 00학교 수료 등의 내용이 여러개 있었던 것을 핑계삼은 것이다.

"'졸업'이 아니라 '수료'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그들은(심사를 맡은 사람들은) 이미 '색안경'을 끼고 이 일을 살피고 있었죠."

결과는 '자료 부족'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재판자료 등을 증빙자료로 제출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후손들이 겪어야 하는 첫 시련이었다.

이후 조카 임씨는 중국을 수차례 방문하며 백부의 기록을 직접 구하러 다녔다. 몽골, 베트남까지도 갔다. 그런 끝에 백부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일본 경시청의 비밀문서를 찾아냈다.

또 우연히 알게 된 중국 류저우신문사 편집장을 통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류저우항공학교에 있을 당시에 촬영한 백부의 사진을 추가로 확보했다.

그리고, 2008년 재신청했다. 류저우항공학교 사진 등이 확보되면서 후손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탈락이었다.

"두번째 심사할 때 보니까 심사위원들이 모두 바뀌어져 있었죠. 예전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그런데 이번에는 괘씸죄에 걸린 것 같아요. 어렵게 사진까지 구해서 제출했는데 사진내용을 '폄하'하기까지 했죠."

조카 임씨를 더욱 화나게 만든 일은 두번째 심사에서는 제대로운 심사조차 하지 않고 '제외' 대상으로 분류했던 점이다.

"한번은 입증자료 부족으로 '보류'가 되고 다른 한번은 제외됐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똑같은 시험문제를 출제하면서 한번은 자료부족이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제외' 대상으로 분류한 것은 괘씸죄가 아니면 뭐겠어요?"

단단히 화가 난 임씨는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고, 다음 아고라에도 올렸다. 청와대와 국가인권위원회에까지 진정했다.

'전쟁당시 우측눈썹 윗부분에 총상을 당했다'는 자필이력서의 내용 규명을 위해 와흘리에 있는 묘에서 유해를 발굴해 총상 흔적이 남아있는지와 유족들과 DNA 대조 작업까지 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백부의 한을 풀어주려는 그의 노력은 2009년말 잠시 빛을 보는 듯 했다.

"국회 국정감사를 요청하겠다며 국회의원 보좌관과 협의를 했었는데, 그 즈음 보훈처에서 전화가 와서 그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도 하고 다음에 꼭 서훈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국정감사에서는 제기하지 않기로 한 거죠. 그런데 또 속았죠."

임도현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기념관. <헤드라인제주>
임도현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기념관 개관행사에 참석한 마을 주민들. <헤드라인제주>
독립운동가 임도현 선생의 조카인 임정범씨. <헤드라인제주>

#"나에게는 개구리가 없다"

9년째 백부의 독립운동가 서훈을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있는 그는 기념관 한켠에 "나에게는 '개구리'가 없다"는 글귀를 큼직하게 써놓았다.

"내 주변에는 법조인도 없고, 근성있는 기자도 없고, 국회의원도 없습니다."

그는 "백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국내외의 자료를 찾기 위해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면서 "하지만 보훈처는 일관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심사잣대를 들이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결정적인 입증자료를 추가로 제시하지 않는 한 재신청은 어렵게 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기념관'이었다고 했다.

"행정기관 찾아다니며 하소연을 했어요. 조금만 도와달라고. 제 스스로 천막이라도 치고 백부의 독립운동 기록을 전시하고 알릴테니 도와달라고 했죠. 그러나 허사였어요."

결국 그는 이날 개관한 기념관으로 고인의 넋을 달래고자 했다.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든 비용 3000만원은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사비로 만들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죠. 기념관은 만들긴 했지만, 저 역시 현직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매일 이곳을 지킬 수 없는 노릇이고...."

임도현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기념관. '나에게는 개구리가 없다'는 문구가 독립유공자로 추서받지 못한 후손들의 '외로운 싸움'을 실감케한다. <헤드라인제주>
백부 임도현 선생의 독립운동가 추서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임정범씨. <헤드라인제주>

#후손들의 '고독한 투쟁'..."정부가 외면하면 저희들이라도 나서야죠"

자료관이 지어진 곳은 일제 강점기 당시 그가 움막집을 짓고 살았던 곳이다. 인근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기념관은 지어놨지만, 주변에 가로등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고, 기념관에 전시된 기록물 보관을 위해 보안시설이라도 해야 할텐데,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큰 걱정이죠."

기념관은 유치원생에서부터 청소년, 도민, 관광객에 개방된다. 당분간 상주 관리인이 없는 관계로 주말과 일요일에 집중적으로 개방하고, 주중에는 사전에 방문신청(전화 011-9664-4247)을 받아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오죽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기념관이 지어졌으니, 이젠 백부님의 영웅적 항일투쟁 기록을 널리 알려나갈 생각입니다. 정부가 이런저런 핑계로 해 독립운동가의 기록을 외면한다면, 저희들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요. 독립운동 기록의 입증책임이 후손들에게 있는 겁니까?"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군 비행기 몰고 탈출한 임도현 선생의 항일독립 투쟁기록.

후손들의 '고독한 투쟁'은 언제쯤 빛을 발할 수 있을까.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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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4112 2017-09-06 21:20:05 | 14.***.***.30
- 국보훈처의 적폐--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보훈처 노예로 알고 있는지---

슬픈일 2011-03-01 10:06:20 | 110.***.***.111
삼일절에 읽는 안타까운 사연
이런 분들이 많이 알려지고 후세에 귀감이되어야 하는데
이 일을 어찌할꼬

나라에영웅정부에외면 2011-02-28 05:17:27 | 119.***.***.212
당연히정부는 밭아들여야 할일을 나몰라뒤짐지고 있서야 할일이 아닌듯 합니다 담당하시는 공무원께서도 발바닥 달토록 뛰어서라도 밭아들이고 도와드려야할것입니다 정부가기념관도 활성화해 주시고 모든국민도 관심을 가저야할것입니다(나라에영웅을참)

정부의 외면이라 2011-02-27 19:05:12 | 1.***.***.151
이런 일이
독립운동가께서 이론 일을 당하시다니
임선생님 기념관 통해서 꼭 좋은 결과 얻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