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도록 매서운 현실..."그래도 희망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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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도록 매서운 현실..."그래도 희망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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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겨울 밤, 자정 넘긴 도서관...'치열한' 삶의 터전

시리도록 찬 바람이 부는 겨울밤, 커다란 가방을 짊어매고 얼어붙은 길을 조심조심 걸어간다. 목적지는 멀찌기 불을 밝히고 있는 도서관.

늦은 시간을 넘어 보통은 잠이 들어야 할 시간인 자정, 가로등 불빛도 깜깜하고 날씨도 짖궂기 그지 없었지만 제주대학교 도서관 열람실의 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방학기간인데다가 차량이 올라오기도 힘든 도로사정상 많은 이들이 있을것 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나, 차가운 바깥공기와는 달리 열람실의 열기는 후끈거렸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학생들이 열람실을 가득 메웠다. <헤드라인제주>

# '공부하는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

시계바늘이 자정을 가르키려 하자 하나 둘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대부분 돌아가는 시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중 태반은 다시 옆 열람실로 들어간다. 12시부터는 한 열람실만을 사용토록 운영하는 도서관 운영지침 때문에 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단촐하게 짐을 꾸린 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 커다란 가방에 두꺼운 책을 3~4권씩 쌓아놓고 있다.

또 담요에 슬리퍼, 치약 칫솔은 기본이며 머그컵에 커피믹스까지 온갖 살림을 갖춰 놓았다. 심지어 전기방석까지 챙겨온 이들도 눈에 띄었다.

온갖 생활용품을 갖춰 놓았다. <헤드라인제주>

너무나 익숙한 듯이 자유자재로 생활용품을 사용하는 모습은 이채롭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도서관은 공부하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도서관을 찾아온 강모씨. "늦은 시간에 공부가 더 잘 된다"며 매일은 아니더라도 틈이 날때면 도서관을 종종 찾아온다고 말한다.

"오늘같은 날은 방에 있어봤자 뒹굴거리기만 할게 분명하거든요."라며 그는 "어차피 집이 바로 뒤라서 도서관 오는게 어렵지 않아요. 또 저만 공부하는 것도 아니잖아요?"고 덧붙였다.

이제 갓 1학년을 마친 경영학도는 공인 회계사를 꿈꾸고 있다.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 <헤드라인제주>

"물론 군대 먼저 갔다와야 겠지만, 가기 전에라도 한 글자 더 보는것이 잠 자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도움될 것이라 생각해요."

그러면서 영어책을 펴든다. 공인 영어시험을 몇점까지 올려놓겠다는 뚜렷한 목표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목표가 높은 점수는 아니었지만, 차곡차곡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한참인데요 뭐. 미리 준비하면 안될 것 있나요?"

# 치열한 싸움,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니..."

마냥 미래를 바라보고 희망찬 꿈을 준비하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열람실 한 켠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3시간째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A씨는 중등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벌써 3번의 고배를 마셨다.

"이미 공부한다는 개념은 넘어섰어요. 이제는 그야말로 싸움이에요."

다음 시험은 연말에야 있지만, 스스로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고 말하는 A씨에게 그런 것 따위는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20대 후반의 나이, 그러나 이 싸움을 언제까지 끌고 가야할 지 알길이 없으니 막막하다.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 <헤드라인제주>

"벌써 3전4기인데 흔히들 말하는 7전8기 못할 것 있겠어요? 정신력으로 버티면 되는거지. 문제는 7전8기를 한다고 해도 장담할 수 있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느냐는 거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고 덧붙인다.

"공부하는 거야 내 할일이니 그렇다 치지만, 항상 신세를 지고 있는 가족들과 여자친구에게는 정말 너무 미안한 마음만 들어요."

그가 준비하는 국어 과목의 경우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 치열한 경쟁자가 한 둘이 아니다. 지난 시험의 경쟁률은 무려 60대 1을 기록했다.

쉽지 않은 길이라는 핑계는 있었지만, 처음 떨어졌을 때는 간혹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후배들을 보는 것도 낯 뜨거웠다. 그런데, 그렇게 피해다니던 후배들도 해를 지나면서 같은 처지가 됐다.

"특히 국어 과목같은 경우는 영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던데, 막상 우리 입장은 그렇지 않아요."

'스펙, 스펙'을 외쳐대는 사회. 다른 길로 들어서려면 영어공부가 절실하지만 밑바탕이 없으니 손 댈 엄두도 안난다. 결국 몇번을 떨어져도 외길을 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에게는 도서관 문 밖을 감싸고 있는 매서운 한파 만큼이나 매서운 현실이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쫓기듯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니 이러고 있죠."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학생들이 열람실을 가득 메웠다. <헤드라인제주>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을 지킨 이들의 현재 살아가는 모습은 달랐지만, 그들은 결국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길과 눈보라를 뚫고, 한 점 빛에 불과했던 이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처럼.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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