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미의 사는 이야기](32) 설날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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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미의 사는 이야기](32) 설날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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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임.

그리움.

누구에게나 마음 한구석에 콩콩 절구질하는 설레임과 어떤 그리움이 하나씩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애틋한 첫사랑처럼 콩닥거리는 발그레한 설레임, 혹은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투박한 손끝에 들린 군밤봉지 하나를 그리던 부모의 질박한 정이라도......

그것은 그저 우리가 사는 동안 가질 수도, 갖지 못할 수도 있는 평범하고 다정한 설레임과 그리움이라는 일상이므로.

어린 시절,
눈싸움을 해보지도 못했고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함께 고무줄놀이도, 사방치기도, 소꿉놀이조차도 해보지 못한 나에게도 아주 가끔 청빛의 시려운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콧등이 시큰하게 그리워서, 괜히 서럽게 눈물나는 일상이 있다.

제 나이를 훌쩍 넘기고 겨우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입학했지만, 툭하면 아프기 일쑤고, 자지러지는 나를 부모님은 보다 못해 외가댁으로 요양겸 치료를 위해 데려다 놨다. 그렇게 데려다 두니 한학기면 반은 외가댁에서 왕할머니를 외시한 외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자랐다고 거짓말이 아니다.

아픈 아이를 신경 쓰느라 책 한 권 가져가지 못했으니, 늙은 어른들과 보내는 하루 일상은 자고, 먹고, 하늘 보며 지나가는 구름이나 헤아리는 게 일과였던 참 재미없는 시간들이였으라.

들일을 하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모두 나가버리고 나면 그때부터 왕할머니는 온갖 집안일을 하고 돌아다니셨다.

집안청소에서부터 부엌의 솥뚜껑이 반질거리도록 닦아내고 행주가 뽀얗게 빨아 마당 빨랫줄에 널고는 한 볕 가운데 하얗게 센 머리위에 수건하나 묶어 올리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아들내외가 밭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널어 시간 맞춰가며 써레질에, 속박(약간 기름하게 생긴 바가지)을 이용해 바람을 태워 부스러기 깍지를 날리고 돌을 고르는 일을 끊임없이 하셨다.

자그마한 몸집의 눈부시게 하얀 모습의 왕할머니가 볕이 내리는 마당 한가운데에서 그렇게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나는 나른한 눈으로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졸음이 몰려와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면 바스락거리는 메밀베개가 내 머리맡을 받치고, 배에는 얇은 홑이불이 올려져 있곤 했다. 반쯤 깬 귓가로 콩콩거리는 절구질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나머지 절반의 혼수를 일깨운다.

"윤미, 깨어난댜?"

"으응......"

누워있던 몸을 버르적거리며 기어 부엌 쪽으로 가보면 왕할머니는 깨를 볶아 종지에 담고 있다.

고소한 냄새가 '꼬르륵......' 저녁해가 긴 여름의 시장기를 알리는 종소리가 마룻바닥에서 울린다.

솥뚜껑을 열고 작은 낭푼이에 담긴 식은 밥 한 덩이를 절구에 담고 소금 몇 방울 손가락 끝으로 부수어 뿌리고 조물조물, 왕할머니의 마디 굵은 손끝에서 마술이 일어난다.

조물조물

오물오물

조물 오물, 오물 조물

할머니의 손끝에서 조물거린 주먹밥이 그릇에 놓이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내 입을 보면서 왕할머니는 '허허허' 웃으신다.

찬이라고는 밭에서 나는 푸성귀가 전부, 간식이라고는 귀하게 얻는 옥수수나 감자가 전부이던 시절.

양념으로 쓰는 깨를 갈고 난 절구에 밥 한덩이를 부벼 주며 '허허허' 웃으시던 그 정갈하고 맑은 모습의 왕할머니.

그 웃음 속엔 성치 못한 손녀에게 많은 것을 주지 못하는 미안함과 측은함이 있었겠지만 부모로부터 떨어져 오롯이 외롭게 지내던 내게 왕할머니는 가질 수 없던 친구이자, 부모였고 내겐 소중한 왕할머니였다.

그런 왕할머니의 제사에 나는 한 번도 가지 못한다.

그저 가슴 속으로 명절이 오면

향가지 하나 향로에 꽂고 촛불을 켠다.

"왕할머니 감사합니다."

"왕할머니 깨주먹밥 짱이에요!"  <헤드라인제주>

강윤미씨 그는...
 
   
▲ 강윤미 객원필진
강윤미 님은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강의실을 오가는, 하지만 항상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강윤미 님의 모습은 아랏벌을 훈훈하게 해 줍니다.

그 의 나이,  벌써 마흔을 훌쩍 넘었습니다.  늦깎이로 대학에 입문해 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분입니다.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항상 직면해 있지만, 그는 365일 하루하루를 매우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강윤미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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