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제주는 특산물 진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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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제주는 특산물 진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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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0)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조선 초기에는 토지제도 정비, 각종 농서의 보급, 측우기 개발, 수리시설의 확대, 우량품종 도입, 목화재배 확대, 국영목장의 운영 등 농업은 최고의 중흥기였다. 이러한 농업의 중흥기인 조선 초 제주농업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당시 육지부에서는 벼농사를 위시한 최고의 농업 중흥기인 반면 제주에서의 농업발전의 기록은 거의 없고 수취의 역사만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제주농업을 재배 작물적 측면에서 보면 이전 시대인 고려시대에 재배되었던 보리, 콩, 조, 팥, 메밀 등으로 이전 시대와 획기적으로 달라진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제주도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재배되는 농산물 보다는 육지에서 나지 않는 진귀한 특산품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이런 특산품은 당연히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은 당시의 제주도는 삶을 영위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제주도에서 중요 진상품들은 대표적으로 말(馬), 감귤, 전복, 참돔, 사슴 등이었다. 나아가 한라산 곳곳에서 생산되는 약재 등 온갖 진상과 잡역·잡세에 시달려야 했다.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은 데 비해 잡역·잡세가 많아 도민이 져야 할 역(役)이 매우 많았다. 이에 도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출륙하거나 민란을 일으켜 중앙 정부에 저항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 제주는 말의 특산지로 부각되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어, 중앙 정부에 의해 과중한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졌다. 특히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했기 때문에 제주인들은 해변 지역의 일부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다 척박한 농업 환경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낸 제주 인구는 5만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말목장, 소목장, 사슴목장 등이 있었는데 15∼16세기의 목장은 관영목장과 사설목장으로 나누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목장가운데서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관영말목장이였다. 말은 국방을 강화하고 국가 통치기구를 운영하는데서 매우 필요한 가축이었다. 그래서 조선 건국 초부터 각지에 말목장을 건설하고 관리 운영에 국가적인 관심을 가졌다. 특히 제주도의 목장은 전국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목장이었다. 

제주도에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에 국영 목장으로 10소장을 두었다. 1446년 당시 제주목 목장에서는 3,800마리, 정의현 목장에서는 3,880마리, 대정현 목장에는 2,090마리의 말을 기르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는 개인이 경영하는 말목장도 적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말 사육은 삼별초를 토벌한 몽골군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온화한 기후라서 말을 키우기에 좋은데다 섬이라 목장에 들어와 말을 해치는 호랑이가 살지 않아서 목장을 차리기에 이상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제주 중산간 지역에 초원의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고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일부러 초원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조선 왕조에서는 더욱 더 엄격하게 제주도의 말 생산을 관리했다. 세종대왕 때 제주도를 10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말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기른 말들은 제주 목사가 직접 관리 감독해서 임금이 탈 말(어승마)로 분류한 뒤 한양까지 배로 운반시켰다. 

문제는 말을 키우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제주도민들은 행여나 말이 탈이 나서 진상품이 되지 못하거나 죽어버릴 경우에는 자비로 새 말을 채워 넣어야 했다. 말 한마리 값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제주도민들 사이에는 말 한 마리 잘못되면 집과 밭을 팔아야 된다고 할 정도로 고역은 심각했다. 전국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말을 생산했다고는 하지만 요구량은 항상 그보다 많아서 종마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일부러 말의 한 쪽 눈을 멀게 해서 진상 대상에서 빼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연산군 시절에는 연산군이 말고기가 정력에 좋다면서 말고기 상납을 지나치게 요구해서 등골이 휠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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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력도 ‘공마봉진’(왼쪽), 탐라순력도 ‘감귤봉진’

감귤도 제주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이라 왕실의 집중적인 요구 품목이었다. 어느 정도로 귀했냐면 귤이 진상되면 황감제(黃柑製)라 해서 성균관에서 과거시험을 볼 정도로 귀했다. 조선 시대에는 저장 수송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탓에 제주도에서 올려보내도 대다수 썩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댓잎을 까는 등 어떻게든 하나라도 건져내보려고 애를 써야 했고, 양을 맞추기 위해서는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이 올려보내야 정해진 양을 건질 수 있었다. 감귤 또한 제주 목사가 직접 관리했다. 그래서, 항상 귤을 더 보내라고 난리였지만 귤나무는 약하고 예민한 편이며 접붙이기로 증식하기 때문에 기르기가 힘들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에서는 귤, 감자(柑子), 유자 등이 많이 재배되었는데 그 가운데 귤 종류에는 동정귤, 금귤, 청귤, 산귤 등이 있었으며 관영 감귤원이 19개 운영되었으며 개인이 경영하는 감귤원도 있어 집집마다 귤과 유자를 생산하고 있었다.

4면의 바다인 제주에서 중요한 진상품목의 하나는 전복 등 수산물이었다. 제주에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많은 데다, 관리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또한 몇 배가 된다. 포작들은 그 일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는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다. 조선 전기 제주에서 전복을 따는 남자들을 포작인이라 불렀는데 50명이 132만개의 전복을 공납으로 중앙 정부에 바친 기록이 있다. 1년에 1인당 2만 6,400 개로 하루 70개가 넘는 양이다. 바람이 심해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날을 감안하면 하루 200개 이상의 전복을 따야 했다. 급료를 주는 것도 아니고, 노예처럼 일만 해야 했다. 전시에는 격군으로 배 젖는 일에 동원되었다. 너무 힘들어서 전라도 경상도 해안과 심지어 중국 해랑도까지 유랑하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남자들이 많아지자 출륙금지령(1629년 인조 7년)을 내려 제주인의 외부 출입을 엄금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제주에 남자인구가 줄어들면서 남자에서 여자로 점차 전복채취 담당자가 바뀌게 된다. 

원래는 남자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을 했지만, 농사, 낚시, 말 키우기, 사냥 등등 매우 고된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여자들이 대신 물질을 한 것이다. 현재의 해녀는 있고 해남은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또한, 미역 같은 해조류는 가을에 자라기 시작해 초여름에 바위에서 떨어져나가 죽어버리니 채취하려면 늦어도 초봄까진 채취를 마쳐야 한다. 즉, 제일 추울때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원래 전복은 포작이라 하여 남자가 채취하고, 여자들은 해조류를 채취했는데 할당량이 너무 많아서 견디지 못하고 포작이 전부 도주해버리자 해녀에게 할당량을 떠넘겼다. 생계를 위해 물질하다가 세금 폭탄을 맞은 꼴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일일이 전복을 다듬어서 말리는 작업도 해야 했다. 또한, 해녀들은 기녀 취급을 받아 양반과 관리들의 수청도 드는 경우도 허다했었다.

농본주의를 기본으로 최고의 농업중흥기인 조선 초 제주농업의 모습은 이전 시대 대비 획기적으로 달라진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잡역·잡세 및 특산품의 진상 등 제주의 농업인들의 삶은 져야 할 부역(負役)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 참고자료: 국립제주박물관, 2017, 국립제주박물관; 경인문화사, 2015, 제주지역 목장사와 목축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해녀와 일본의 아마, 2006, 민속원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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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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