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탐라의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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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탐라의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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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7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한반도에서 고려시대의 농업을 정리해 보면 목축산업의 발전, 우경 확대, 윤작법, 벼 재배기술, 목화의 도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농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음을 앞서 기술하였다. 이 번 차에는 고려시대 탐라의 농업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고려 시대의 제주농업의 발전상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고려시대에 탐라민이 먹거리와 일용품을 마련하려 애썼던 생업활동으로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어로활동과 농경이었다. 4면의 바다로 어로활동은 선사시대부터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려시대 제주의 농업은 보리, 조, 콩, 팥 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탐라민들의 철제 농기구 사용이 흔한 일이 되었고, 우경(牛耕)도 점차 확산되었기 때문에 소출이 이전보다 늘어났을 것이다. 한편 탐라지역의 암반층은 물이 빨리 스며드는 현무암 지질이고 토양은 화산회토이다. 그래서 하천과 용천수가 있어 마실 물과 농경용수를 취할 수 있는 곳이 적었으며, 농경에 적합한 토양이 있는 지대도 극히 한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 시대 보다 더욱 해안에 가까운 1∼2km 이내의 해발 50m이하의 저지대 20여 군대의 농경지로 축소·집중화 되었다. 이 시기 마을의 입지와 분포도 전과 같이 마실 물과 농경용수를 취할 수 있고 농경이 적합한 토양 지대였다. 바로 이곳에 고려 때 탐라민도 삶의 터전을 잡았으며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제주시를 중심으로 구성된 각각의 군현이 자리를 잡았다. 고려 때 탐라민의 중점적 거주지역도 농경과 연관성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탐라민이 농경을 통해서 얻은 먹거리는 충분치 못 했다. 탐라민은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으나 땅이 워낙 척박한 연유로 소출이 충분치 않아 해산물을 채취하여 먹거리를 충당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땅이 척박했던 것은 토양이 화산회토라는 토성이 뜨고 건조하여 곡류 농경에 적합치 않으며, 자갈이 많아 심경(深耕)과 김매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토성은 탐라민으로 하여금 색다른 농사법을 낳게 하였다. 이 색다른 농사법이란 토성이 뜨고 건조하기 때문에 종자 착지가 잘 안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갈아먹는 땅에는 반드시 소와 말을 풀어놓아 밟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모습은 최근까지도 화산회토 토양에 조 등을 심을 때 볼 수 있다.

탐라지에 따르면 ‘잇달아 삼 년을 갈아 먹으면 곡물 이삭이 실하지 않으니 부득이 또 새로운 땅을 개간해야 했다. 노동력은 배가 들어가나 소출이 적어 곤궁한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곡식을 1년 갈아 먹고 난 다음에는 1년 또는 2년을 묵혀 지력이 회복된 이후에 다시 갈아 먹었던 휴한농법을 이르는 말이다.

밭돌담은 밭에 우마 등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방풍도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었다. 제주밭의 돌담은 고종 21∼26년(1234∼1239) 사이에 판관으로 재직한 김구가 탐라민에게 쌓도록 권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돌담으로 각자의 경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경작자가 매해 그 땅을 갈아 먹지 않더라도 최소한 경작할 때를 대비해 김매기 등과 같은 관리를 평소에도 행할 구획이 분명히 나누어 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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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밭의 돌담(왼쪽), 제주의 조랑말.

우마 이용 경작지 밟아주기, 휴한 농법, 가축분 비료이용, 화경 등의 농작업이 행해진 탐라지역에서는 논이 없었고 밭만 있었다. 여기에서 탐라민은 보리, 콩, 조, 팜, 메밀, 삼 등을 재배했다. 특히 탐라에서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인 콩 농사를 많이 지었던 편이다.

귤은 고려 때부터 탐라의 특산품이었다. 귤과 관련해서는 고종때(1214∼1259)에 최자가 탐라부사로 재직하는 동안 당대의 대문호이자 실력자인 이규보에게 매해 선물로 보낸 적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이 귤을 받고 고마워한 이규보가 최자의 승진 소식을 알려 축하하며, 다시 만날 것을 고대하는 시에서 알 수가 있다. 귤은 탐라에서 만 생산되었고 매우 귀해 개경의 최고 상류층도 구하기 힘들었다. 이 시를 보면 이때도 귤을 과일로 먹었고, 특히 향기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탐라에서 개경으로 가는 동안 시일이 많이 걸려 부패해진 귤이 많았다는 사실도 이 이규보의 시에 나타난다.

고려 후기의 탐라는 그 동안 고립되어 낙후되었던 제주도에 발달한 고려의 문화를 일시에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元이 제주도를 유배지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제주가 유배 1번지로 자리를 잡게 되어 이후 유배문화 형성의 시초를 이루게 되는 등 문화 발달의 커다란 전기를 이루었으며, 또한 원의 목장 설치로 인한 목축기술의 도입은 제주도 목축업 발달의 일대 전기를 이루었다. 이후 탐라가 고려 조정에 말을 진상했다. 탐라 말은 부여 및 고구려 때부터 사육되어 온 토종 말로, 풍토에 잘 적응하고 거친 먹이도 잘 먹으며 지구력이 강한 장점이 있어 밭갈이나 짐 나르는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과하마(果下馬), 토마(土馬)로도 불리는데, ‘과하마’는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1258년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탐라총관부를 두고 이곳을 다스릴 때부터 몽골 말이 들어와 탐라 말과 섞여 오늘날의 조랑말(제주마)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 그 땅에 돌이 많고 건조하여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 콩, 조가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가 없어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차츰 침식해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었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고통되는 바를 물어 돌을 모으고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 제주에서 밭농업이 보편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종 31년(1244) 탐라가 제주로 개칭되면서 당시 부임했던 판관 김구가 소유 경작지의 경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밭 경계선에 돌담을 쌓게 함으로써 그 때부터 밭에 있던 돌이 제거되어 농경에 편리해지고 경지 면적이 늘어났으며 우마의 침입 방지와 방풍도 되어 오늘날 제주도의 돌담으로 된 농경지의 유래를 보여주고 있어 제주 농업에 획기적인 전기를 이루었다. 

토지를 2∼3년간 계속적으로 경작하면 지력 소모에 의한 생산의 저하로 새로운 토지를 개간해야만 했으며, 게다가 노동생산성이 매우 낮아 주민은 곤궁을 면할 길이 없었다. 또 당시의 농업이 이동식 화전경작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영농방법도 원시적이며 조방적 경영상태를 탈피하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의 제주농업을 정리해보면 이전 시대에 비해 고려, 몽고 등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변화의 폭이 컸던 시대였다. 원나라 탐라총관부를 두어 몽골 말이 들어와 탐라 말과 섞여 오늘날의 조랑말(제주마)에 이르는 시기로 특히 제주의 축산업이 자리 잡는 시대였다. 재배 작물적 측면에서 보면 이전 시대에 재배되었던 보리, 콩, 조, 팜, 메밀 등으로 이전 시대와 획기적으로 달라진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제주가 유배지로 자리 잡기 시작 되었으며, 밭담은 고려 이전부터 제주민들은 쌓아 왔을 것으로 추정 되지만 문헌적으로는 고려의 판관 김구가 탐라민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했던 기록이 있었다.

※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경인문화사(2009), <고려시대의 농업생산과 권농정책>; 이매진(2013), <한국·몽골 교류사 연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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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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