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역사 탐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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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3)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탐라는 3세기 초반부터 12세기 초반까지 약 천년 동안 제주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체이다. 조선 후기 역사가 한치윤의 저서 ‘해동역사’에 의하면 탐라는 섬을 말하는 ‘탐’과 나라를 의미하는 ‘라’가 합쳐진 것이라 했다. 

탐라는 태고의 시대로부터 바다를 통해 세계의 여러 나라와 교통했던 위대한 해양 국가였을 거라는 명제는 제주를 중심으로 제주역사를 찾는 최근 제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제주의 역사를 보듬어 보면 불행하게도 탐라를 흡수 통합한 조선 왕조의 유교적 쇄국주의가 해양 국가적 문명을 용인하지 않는 바람에 탐라 그 자체를 와해시켜 버렸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민족의 대이동, 초기국가형성기, 해양국가, 탐라국 성립, 일본의 국가 통일 시대, 삼국의 패권 쟁탈 시대, 탐라의 전성 시대, 동지나해의 파도, 대륙과 해양세력의 충돌 등의 주제를 통해 망령처럼 세계의 해역에 표류하고 있는 탐라의 실체를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탐라는 세계의 끝자락에 고립된 작은 나라가 아니라, 대륙과 대양, 그리고 동양과 중동, 서양문명이 교차하는 세계사의 한복판에 해상교역을 통해 문명을 연결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풍요로운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탐라는 조선시대 행정구역 제주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탐라에서 제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역사를 전체사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탐라가 조선시대 이후 중앙정부의 조그마한 부속 도서로 간주되면서 역사적 가치는 중앙집권 정부의 시각에서 기술되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탐라에 대한 자료가 미비한 것도 해양문화라는 특성과 중앙집권적 사고에서 역사가 기술되어졌기 때문 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주를 바라보는 시각은 육지에 딸린 섬이 아니라 북서태평양의 일원으로서 제주, 즉 주체적 입장을 강조하고 싶다.

초기 탐라의 모습을 표기한 문헌은 많지 않았다. 중국의 3세기 기록인 『삼국지』위서동이전엔 탐라국으로 보이는 ‘주호(州胡)’가 기록되어 있다. 마한 서쪽 바다의 섬에 있는 주호국의 생활풍습을 소개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작고 머리는 깎은 채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있는데, 위의 것은 있으나 아래의 것은 없다. 소와 돼지를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왕래하여 한(韓)과 교류를 한다’는 사료가 그것이다. 

그러나 주호와 탐라가 동일한 국가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마한 서쪽 바다의 섬, 배를 타고 왕래하여 한(韓)과 교류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소국 등의 정황으로 대부분 역사가들은 이 주호를 끌어당겨 탐라국과 동일한 국가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나오는 마한은 삼한시대의 정치연맹체 중의 하나로 서기 1세기∼ 3세기경 한강 유역으로부터 충청 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의 통칭이다. 주호국이 탐라라는 가정이 성립 된다면 마한이 있던 서기 1세기∼ 3세기경이 제주에 탐라가 소국으로 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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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삼한시대 주호, 삼국시대 탐라, 남북시대 탐라, 고려시대 탐라

탐라국이 우리 역사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년) 기사인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주었다”는 게 아직까지는 처음이다. 476년 이전의 탐라 모습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다 보니 고려 정부에 의해 완전히 복속 될 때까지 탐라국은 분명 실존했으면서도 그 처음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 실체가 어떠했는지가 거의 들어나 있지 못하다. 때문에 중국과 일본 사료 그리고 최근엔 고고학 발굴 성과를 활용하는 등 범위를 확대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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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역사 변화와 탐라의 명칭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였던 시대를 삼국시대(三國時代)이고,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한 676년 이후부터 935년까지의 시기인 통일 신라 시대(統一新羅時代)이며,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의 세 나라가 재건하여 정립하여 왕건이 고려를 창건 한 918년까지는 후삼국 시대이다.

탐라국은 ‘섬나라’라는 의미로서, 섬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독자적인 국가 형태로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5세기 말∼10세기 백제, 중국, 일본 등과의 국제 교역을 하면서 ‘국(國)’을 형성 기반으로 하였던 제주의 옛 정치그룹이다. 

탐라국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후한서(後漢書)』에는 섭라(涉羅),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耽牟羅國), 『신당서(新唐書)』 등 국내외 사서에는 담라(儋羅), 혹은 탐부라(耽浮羅), 탁라(乇羅), 탁라(托羅), 탁라(託羅), 둔라(屯羅) 등이 나타나 있다. 특히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이미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의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탐라국의 관직 체계에서 성주, 왕자, 도내(徒內) 등은 탐라 지배층의 호칭이다. 기록상으로는 신라 전성기에 고을라의 15대손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세 형제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와서 조공을 하자 신라의 왕이 이들을 가상히 여겨 성주, 왕자, 도내의 작위를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특히 성주는 국왕을 지칭한 것으로 고려에서도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국의 왕을 성주라고 불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탐라국의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알현하자 왕은 그에게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에서는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운휘대장군(雲麾大將 軍) 등의 직위를 주어 우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 또는 세자라 하였다.

성주와 왕자는 1105년(숙종 10) 이후 제주가 군현으로 편제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여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하며 조선 초기까지 내려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는 중앙의 행정력이 제주에 미치게 되면서 성주를 좌도지관,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하였고 이때부터 이전과 같은 대우는 없어져 1000년의 역사의 탐라국은 독립된 고대·중세국가로서의 지위는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탐라가 1000여년의 역사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세력의 침략이 어려운 섬이라는 여건도 있지만 태풍, 가뭄 등 의식주 해결이 어려운 섬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나름 데로의 수눌음 같은 공동체 생활방식이 탐라민들에게 내재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 참고자료: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강용희(2018), <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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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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