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고대국가 완성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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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고대국가 완성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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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1)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국가는 영토, 주권과 함께 질서 유지수단의 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조직과 구별된다. 국가의 발전 단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흔히 부족국가→연맹국가→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탐라국의 고대국가로 완성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탐라는 질서유지를 위한 나름대로의 관습법이 있었고 영토, 주권이 있는 낮은 완성도의 고대국가라고 정의하고 싶다. 여기에서는 한반도 동 시대인 삼국시대의 고대국가들의 발전상을 살펴보고 이 시기 문헌상의 농업의 기록들을 통한 농업의 발전상을 살펴봄으로써 동 시대의 제주의 농업과 견주어 보도록 하겠다.

삼국시대는 BC 1세기경 고구려·백제·신라라는 3개의 강력한 봉건국가가 있던 시대로 삼국이 건국되는 연대(신라 : 서기전 57, 고구려 : 서기전 37, 백제 : 서기전 18)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예맥(濊貊)족과 한(韓)족 사회에는 철기문화가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어로·목축과 함께 농경이 크게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강되었고, 새로운 전술인 기병전(騎兵戰)의 등장으로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안으로는 인접한 정치세력 간의 통합이 촉진되고, 밖으로는 요동군·현도군·낙랑군·대방군 등 중국의 식민지 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왕권이 성립되고 그 지배력도 강화되어 갔다.

삼국은 부족국가들을 파괴하지 않고 국가의 하부 지배체제로 받아들였다. 부족국가는 지형, 생태, 생업, 주민의 안보 등의 조건에 의하여 형성된 상호 의존적인 취락들의 집합체인 읍락(邑落)들을 구성 요소로 하는 정치체였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초기에는 이 같은 읍락이 여전히 사회 조직의 기간 역할을 하였다. 주민들은 국가에 편입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종래 지배층의 지배를 받았으며, 읍락공동체의 질서에 따라 살았다. 

이 같은 읍락들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수취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가졌는데 국가는 국가의 통치를 받아들인 종래의 지배자를 통하여 이 같은 읍락 혹은 읍락군(邑落群)들로부터 집단적 공동적으로 수취를 행하였다. 읍락 내에는 이미 정치적 지배관계가 성립되어, 지배층인 호민(豪民)과 그들의 지배와 지도를 받는 농민인 민(民)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종족간의 전투나 범죄 출생 등에 의해 산출된 노예 신분인 노비들이 있었다. 

이들 주민들은 읍락을 구성하는 취락에서 대체로 소규모의 반움집이나 지상가옥에 부부와 자녀 중심의 가정 단위로 살았다. 호민이나 일부 부자들은 기와집에 사는 경우도 점차 나타났다. 종래의 읍락은 삼국시대의 중·후반기에 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내적으로는 철제 농기구의 보급, 국가 정책적인 수리시설 확충 등 적극적인 농업 증산정책에 힘입어 읍락민 상호간의 경제적 분화가 심화되고, 외적으로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파견되는 변화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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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의 국가별 위치도(왼쪽), 진흥왕순수비 탑본.

삼국시대에는 수렵이나 어로, 열매채취 등의 방식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으며 일부 종족 사이에는 목축도 비중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농업의 비중이 거의 절대적인 농업 사회였다. 따라서 농토의 소유와 경영은 사회경제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삼국 시대에 이르러 농업 생산이 크게 늘어나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이 되면서 삼국의 각국은 국가적으로 농업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에서는 수리 시설을 크게 확장시켜 벼농사를 많이 지었으며, 산악 지대인 고구려에서는 조가 주요 작물이었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기본생산은 농업이었으며 어업·염업·상업 등이 상당히 발전했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또한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이 발전해서 건강과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심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한반도에는 철기시대의 완숙기라 할 수 있는 1∼3세기 무렵 청동제는 물러나고 철기가 두루 보급되어 낙동강 하구에서는 철생산이 활발해져 낙랑과 일본으로 철을 수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나 대동강 기슭의 낙랑군·대방군은 야철(冶鐵)과 아울러 철제농구의 사용이 점차 활발해졌을 것이다. 

이때 한강 하류의 충적평야는 농경지로서 석기시대로부터 주거지를 이루었던 중 양평 대심리에는 초기의 야철 유적이 나왔고 남양주의 덕소, 서울의 암사동, 납동에서 김해토기(시루 포함)가 출토될 만큼 이 지역에 문화발달과 농경술의 진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강유역의 진한이라는 사회에 부여족이 세운 백제는 비교적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양과 수리시설에 알맞는 하천이 많아 농업국가의 면모를 나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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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문화재청)(왼쪽), 일본서기 답본(영암, 영월관)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루왕 때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고, 기루왕 때 큰비가 10일간이나 내려 한강이 넘쳐 논밭이 훼손되는 등 수해를 입은 전답을 보수하도록 하였으며, 벽골지(碧骨池)를 새로 열었다는 기록으로도 벼재배가 중요시됨에 따라 관개공사와 치수공사가 국가의 사업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한인지(韓人池)·백제지(百濟池)의 기록은 백제의 수리기술이 일본에까지 전해진 것을 말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4, 5세기까지도 맥류가 주작물이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벼의 재배가 상당히 보급되고 수리·치수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둑이 얼마나 많았던가는 지명과 인명에서 많이 찾을 수 있고 논을 뜻하는 답(畓)자의 활자가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창녕비(昌寧碑)에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 소장의 통일신라시대의 「민정문서(民政文書)」에는 촌주위답(村主位畓), 내시령답(內視令畓), 연수유답(烟受有畓) 등 직전(職田)·구분전(口分田)의 종류가 기재되어 벼 재배가 주로 재배되어가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536년(법흥왕 23)에 건조되어 798년(원성왕 14)에 보수하였다는 지금의 영천에 있는 청제(菁堤)의 비문(碑文)인 798년의 정원명(貞元銘)에는 보(洑)와 둑을 관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국가에 의한 수리사업이 벼재배의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일대의 고분에서 때때로 출토되는 여러 가지의 철제농구와 벼껍질·탄화미 등도 이를 증명해 준다. 이와 아울러 기록에 나오는 쟁기와 황우가 흙을 간다는 우경(牛耕)의 이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신라의 농업은 경작기술뿐만 아니라 농가의 민속까지도 오늘날까지 전하여 내려오는 것이 많다. 이른바 명절이라 하여 설, 정월대보름, 오월단오, 칠월칠석, 팔월한가위, 시월고사 등은 그 원천을 신라에 둘 수 있는 것들이다.

제주의 경우는 화산토라는 풍토적 여건으로 물을 가둘 수 있는 수리시설 확보가 어려워 농업 정착이 순조롭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삼국시대의 농업의 발전상을 알 수 있는 키워드는 철생산, 철제농구, 수리시설, 벼농사, 우경 등이다. 고대국가로서 삼국은 농업을 통해 발전하였고 논농사를 중심으로 농업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제주와 대비되는 당시의 농업상황인 것이다.

※ 참고자료: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사계절(2015),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 국립제주박물관(2017) ,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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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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