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가시밭길 민주화 여정 '동행'…이희호 파란만장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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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가시밭길 민주화 여정 '동행'…이희호 파란만장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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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까지 한 촉망받던 여성 사회운동가
1962년 DJ와 결혼…평생의 정치적 동반자
DJ 수난 때마다 항상 곁 지키며 버팀목 역할
DJ에 "고난의 생을 견딘 당신 사랑하고 존경"
여성의 사회 참여 발전 이끌어…방북 활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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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오후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고(故)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부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이희호 남편'이라 칭할 만큼 둘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동지' '동업자'에 가까웠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망명하던 시절인 1983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강연에서 이같이 말하기도 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이희호는 1922년 서울에서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이희호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1936년 진학했다.

졸업 후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을 다니던 이희호는 2년 다닌 뒤 강제졸업을 당했다. 후에 이화여대에 편입을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1946년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 당시 이희호의 별명은 독일어 중성 관사인 '다스(das)'였다고 한다. 행동이 여성 같지 않고 중성적이었다는 의미였다.

당시 이희호는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각 대학의 학생 리더들이 만든 '면학동지회'에도 참여하면서 사회운동에 발을 들였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을 갔던 이희호는 이곳에서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었다. 이희호는 이 무렵부터 여성이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대한여자청년단에 이어 여성문제연구원도 창립했다.

서울대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 역시 1951년 부산에서 다시 회동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이 모임에서 이희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195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희호는 모교였던 이화여대에 둥지를 틀고 기독교사회사업학과에서 사회학 원서 강독을 했다. 대학교수를 희망했던 이희호는 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측으로부터 총무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YWCA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며 사회운동가로의 명성을 쌓아갔다.

김대중을 다시 만난 건 1961년이었다. 김대중은 당시 첫 부인이던 차용애를 먼저 떠나보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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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은 '정치 실업자' 김대중과 YWCA 총무였던 이희호는 주로 정치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졌다. 두 사람 사이에 '동지애'가 싹텄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1962년 결혼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재혼인 데다가 5·16 군사 쿠데타로 정치생명을 잃었기에 주변에서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정치 낭인이었던 김대중의 앞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열흘 뒤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정도였다. 평생을 김대중의 정치적 동반자로 산 이희호의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정치인 김대중의 뒷바라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이희호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은 접게 된다. 이희호가 기억하는 가장 고된 선거는 1967년 총선이었다. 주위에서는 지방 지역구는 부정선거가 이뤄지기 쉽다며 김대중의 목포 출마를 만류했다. 하지만 결국 김대중은 목포 출마를 결심했다. 이희호도 나서 지원했다.

1970년 김대중은 처음으로 대선에 나갈 결심을 했다. 40대 기수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인기는 날이 갈수록 올라갔다. 부산 연설에는 50만 명의 시민이 몰렸다. 김대중이 하루에 열 차례가 넘는 연설을 하면 이희호 역시 전국의 장터와 거리를 돌며 남편을 도왔다. 이희호는 찬조연사로 나서 시민들에게 "제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4월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김대중의 유세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들었다. 하지만 결국 제7대 대선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김대중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1972년 유신 쿠데타가 시작되자 야당 의원들에 대한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됐다.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머물던 김대중은 10월 유신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한 뒤 해외 망명을 결정했다. 이희호는 남편에게 편지로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국내 민심을 전했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남편의 투쟁 의지를 북돋았다. 그는 편지에 “현재로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으니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적었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까지 벌어졌다. 김대중은 일본 도쿄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당해 배로 끌려가 바다에 떨어져 죽을뻔한 위험을 겪는다. 다행히 미국 정부에 배의 위치가 탄로나 김대중은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이희호는 매일 가슴을 졸이는 날들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런 고초 속에서도 남편에게 포기를 권하지 않았다. 이 시절 이희호를 붙든 건 간절한 신앙심이었다.

1979년 박정희가 암살돼 기나긴 군부독재 시절이 저물었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김대중은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신군부가 김대중이 민주화운동가 20여명과 북한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획책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장남 김홍일까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이희호는 눈물을 삼키며 남편과 아들의 한복 수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김대중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나서 서한을 보냈다. 결국 1981년 김대중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대중의 투옥생활 동안 이희호는 일기를 쓰듯 김대중에 편지를 보냈다. 1982년 12월 출감 때까지 그가 보낸 편지만 649통에 달했다.

이희호가 할 수 있는 일은 헌신적인 옥바라지였다. 쉼없이 독서를 하는 김대중을 위해 각종 책을 사식 넣듯 감옥으로 보냈다. 김대중이 교도소에 수감됐던 2년6개월 동안 이희호가 김대중에 보낸 책만 600권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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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1982년 김대중은 다시는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탄원서를 쓰고 2년간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희호도 따라나섰다.

하지만 1984년 귀국한 김대중은 결국 다시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12대 총선에서 김대중의 귀국으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이 됐다. 이후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 의장을 맡아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부터 김대중은 연이어 세 차례 대선에 도전한다. 1992년 세 번째 도전에서는 김영삼에게 패배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의 요청으로 3년만에 정치를 재개했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정치 재개를 말렸지만 결국 설득당했다. 김대중은 1997년 3전4기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이희호는 영부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2000년 6월15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에도 이희호는 함께 했다. 이희호는 당시 장상 이화여대 총장, 성인숙 청와대 제2부속실장 등과 함께 북측 여성 인사들과 남북 여성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의 사회 참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01년 여성부가 처음으로 들어섰고, 한명숙이 여성 최초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희호의 역할이 상당했다는 평가다.

2002년 5월 이희호는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의장국 대표로 임시의장을 맡은 이희호는 여성 최초로 기조연설을 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그와 함께 활동을 지속했다. 2008년에는 김대중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이때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 '햇볕정책이 성공의 길이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2008년 11월 이희호는 자서전 '동행-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를 펴냈다. 제목을 지어준 이는 김대중이었다. 그해 11월11일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인사를 표해 눈길을 끌었다.

2009년 노무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김대중의 병세는 급격히 안 좋아졌다. 김대중 장례는 이희호 뜻대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국회의사당에 빈소가 차려졌다.

입관 전날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주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느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믿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8월23일 국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이희호는 단상에 올라 국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희호는 2009년 9월10일부터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에 선임됐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세상을 떠나자 이희호는 정부에 방북 신청을 했다. 당시 상주 김정은을 만나기도 했다.

이희호는 꾸준히 정치 활동을 지속했다. 2014년 10월에는 청와대를 방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다. 북한 아동 돕기를 위해 방북을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2015년 8월 이희호는 북한을 3박4일 일정으로 방문했다. 당시 북한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우리 인민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원천리 평양을 방문한 이희호 여사에게서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애쓰는 진심을 알 수 있었고 여생을 통일의 길에 바치려는 그의 남다른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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