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제주에서 농경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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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제주에서 농경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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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6)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

세계 4대 문명은 B.C. 4000∼B.C. 3000년경 청동기를 기반으로 큰 강 유역에서 발달한다. 최초의 인류 문명 발생지로 나일 강변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하강 유역의 황하 문명을 들 수가 있다. 이들 지역은 큰 강의 유역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며, 공통적으로 청동기, 문자, 도시 국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BC 1000년경에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는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다수의 정치집단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이 정복과 복속을 통하여 차츰 더 큰 규모로 성장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이 등장했다.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아직까지 학계의 통일된 정설은 없지만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서 발달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농경이 점차 발달하여 조, 피, 수수, 기장, 콩, 보리 등을 주식으로 삼았으며 이후 벼농사를 지어 쌀을 먹기도 했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8, 7세기경에는 국가로서 뚜렷한 실체를 드러내었고, BC 5, 4세기경부터 철기문화가 전개되면서 한층 발전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BC 108) 부여가 등장하며 고구려가 뒤를 잇고,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와 신라가 성립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제주 선주민들의 농업의 시작은 풍부한 바다자원에 어려운 농경 여건으로 농업활동의 시작은 청동기 이후에나 가능하였을 것으로 예측한다. 청동기 시대는 신석기 시대를 이어 나타나는 청동기를 도구로 만들어 사용한 시대이다. 기원전 1,000년경 중국 동북 지방에서 청동기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쓰며 쌀농사를 짓고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주민이 한반도로 들어와 선주민과 동화되면서 한국 본토도 청동기 시대 문화를 열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시작 연대는 대체적으로 기원전 10세기경 북방 민족들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선사시대 초기에는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마을이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생계유지 이외의 사회적 기능이 확대되어 공동회의장, 경작지, 무덤, 의례장소, 쓰레기터 등이 마을의 흔적들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에 본격적으로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제주는 바다로 둘러싸여 육지와 격리된 섬지역이지만 일찍부터 한반도로부터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독특한 섬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점차 규모가 큰 마을이 형성되고 인구가 증가하였고 민무늬토기를 새롭게 만들고 청동기와 간석기를 사용하는 한편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삼양동이나 용담동 등에는 큰 마을 유적이 들어섰다. 마을의 집들은 평탄한 구릉지나 바닷가에 위치하였다.

이 시대에는 청동 제품, 마제 석기, 다양한 종류의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으며, 지석묘, 석곽묘, 옹관묘 등 새로운 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농경과 목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생산력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사회 내부에 신분적 차이가 생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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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모리 선사유적지 모습(왼쪽), 상모리 유적지 인근 바다(오른쪽).

제주도에서는 육지부 전기 무문 토기를 대표하는 토기 문화가 제주에 형성되었다. 따라서 제주도의 청동기 문화는 이 무문 토기 문화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유적은 전기의 흔암리식 무문 토기, 중기의 송국리식 토기이다. 제주도에서 무문토기 유적 중 비교적 규모의 집단이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거주한 것을 보여 주는 고고학적 증거는 상모리 유적이 있다. 나머지 유적은 유물의 출토량과 그 공간적 범위로 보아 소규모 유적이다.

무문토기가 상모리 유적에서 발견됨으로써 제주도 무문토기문화는 남한 지방에서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모리 패총과 야외 주거지 발굴에서 농경과 어로 수렵을 겸할 수 있는 혼합 생계 방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상모리 유적은 제주도에 일정한 집단의 인구가 본격적으로 정주하여 마을을 구성한 증거로 볼 수 있으며 농업이 유입이 되었으나 지역 특성상 어로활동 중심의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남한 지방의 무문 토기 문화의 변천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면, 대체로 기원전 6∼4세기경 남해안 지방에서 유입한 주민 집단이 상모리식 토기 집단이 되는 셈이다. 남해안 지방 문화의 흔적을 남길 정도로 일정 규모 이상의 주민 집단이 이 시기에 이동해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 집단은 제주도의 적응 과정에서 어로와 수렵을 중심으로 생활했으며, 일부 개간과 제분 용구로 보아 농경의 미미한 흔적도 확인된다. 이 유입 집단은 고인돌을 축조할 만한 인구 집단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소규모 마을을 조성하여 생활을 영위하였다.

초기단계 무문토기는 지금까지 상모리 유적에서만 확인된다. 상모리식 토기의 출현은 제주도 내에 새로운 주민 집단의 유입을 전제로 한다. 일단 제주도에 유입된 흔암리식 무문토기 문화는 외부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복합형 무문 토기 문화에서 단순형 무문토기 문화로 전개되었다. 제주도에서 무문토기 문화가 끝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시기는 육지부 지방보다 훨씬 늦어 대체로 기원전 2세기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무문 후기 토기는 제주도 여러 곳에 확산되었는데 분포된 지역은 서귀포시 강정동, 한림읍 동명리, 애월읍 곽지리, 제주시 용담동, 화북동, 삼양동, 조천읍 북촌리, 구좌읍 김녕리, 성산읍 신천리 등 이다. 한편, 한반도에서 초기 철기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점토띠 토기는 3단계의 무문토기와 섞여 출토된다. 이러한 현상은 용담동 유적과 삼양동 유적 등 기원전 2세기에서 출발하여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연결되는 대단위 취락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무문토기 소멸 단계를 거치며 기원전 2세기 중반경에 제주도로 점토띠 토기 집단이 유입된다. 제주시의 용담동, 삼양동, 외도동 지역을 통해서 이 집단이 정주 집단으로서 크게 성장한 증거가 확인된다. 이 시기 이후의 고대 마을은 일정한 인구 규모와 면적을 가진 부족 사회의 구조를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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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양동 불탄 콩(왼쪽), 삼양동 깊은 바리(오른쪽)

이상과 같이 살펴 본 제주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을 농경활동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상모리 패총과 야외 주거지에서 일년 내내 농경과 어로 수렵을 겸하는 혼합 생계 방식의 흔적이 보이고 있으며, 무문 후기 토기 흔적이 제주도 여러 곳에서 분포되는 점, 삼양동 유적지에서 불에 탄 콩이 발견되는 점 등은 타 지역 보다 늦었지만 청동기 시대에 제주의 농업은 시작되었다는 증거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자료: 이영권(2004), <제주역사기행>; 강용희(2018), <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한스외르크퀴스터(2016, 송소민 번역), <곡물의 역사>;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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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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