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청동기 시대, 한반도의 농업과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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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3) 선사시대의 제주농업

앞서 화산활동으로 제주섬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주섬의 토양은 화산토로 작물을 재배하기에 어려웠으며, 기상환경 또한 강한 바람, 잦은 태풍 등 농업활동을 영위하기에 불리한 여건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4면의 바다로 풍부한 어족자원으로 농업 활동의 필요성이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 농업의 시작점은 한반도의 다른 지방보다 늦었을 것이다. 이번 차에는 석기·청동기 시대에 한반도 농업의 발전상을 살펴봄을 통해 동 시대의 제주농업의 발전 척도를 가늠하고자 한다.

정착생활을 시작한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은 이전에 채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과실류·근경류, 화본과식물의 곡류 등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에 일어난 농업기술의 큰 변화는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를 통하여 추적할 수 있다. 원시적 경작기구의 모습은 유물이나 현존하는 미개종족의 용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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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적 형태의 농기구(좌: 따비, 우:보습) 자료=국립중앙박물관.

인간이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농기구는 제작이 단순한 땅을 파는 막대기였을 것이다. 이러한 막대기가 발달하여 농작업에 더욱 능률적인 괭이나, 삽, 가래가 나타나고, 쟁기로 발달 하였을 것이다. 쟁기는 땅을 파는 막대기이며 더욱 발전하여 보습을 이용하였는데 석제, 동제, 철제로 발달하게 된다. 청동제 보습을 사용하던 당시의 재배작물은 조, 기장, 밀, 보리, 콩, 쌀 등이고, 철제농구는 그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파는 농기구로 따비가 있었다. 지금도 서부·남부 섬지방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이 따비에 관한 옛 기록은 『삼국유사』 유리왕조편에도 나온다. 이 따비는 얼마 전까지도 제주도에 있었던 쌍따비와 똑같은 것으로 발판을 밟고 밭을 가는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이러한 농기구들의 모습은 당시 농경이 주로 밭농사였음을 말해 주는데, 따비와 괭이가 밭갈이 농업의 대표적인 농기구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잡곡은 밭에서 나는 곡물로서 농경 초기부터 오랫동안 주곡류를 이루어왔다. 그것은 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 입증된다. 탄화물(炭化物), 토기에 나타난 자국, 수수껍질·보리껍질 등과 같은 유물이 석기,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과 기록들로 보아 피, 기장, 조 같은 알이 작은 곡식이 초기의 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작은 알맹이의 곡류가 초기의 주요 재배작물로서 밭에서 가꾸어져 수확, 탈곡, 제분되었으며, 밭을 가는 도구로는 괭이와 따비를 주로 썼을 것으로 보인다.

피, 기장, 조과 같은 작은 알맹이 곡류 이후 재배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맥류(보리, 밀, 귀리, 호밀 등)는 먼저 재배되기 시작한 곡물들과 함께 이른바 5곡 문화가 오랫동안 발전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것은 한반도 전반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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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모양 돌칼(좌) 자료=국립부여박물관,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탄화미(우)

『삼국사기』에는 5, 6세기까지 조나 보리에 관한 기술이 농사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맥류의 발굴유물로는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 선사주거지에서 탄화미와 함께 나온 보리껍질이 있다. 맥류가 들어온 것에 이어서 벼를 재배하게 된 것도 중국대륙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대륙의 어느 지역에서 어느 길을 통하여 우리의 어느 고장으로 들어왔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1976년에 여주 흔암리에서 서기 전 1000년으로 추정된 탄화미가 발굴되었고, 이어서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에서도 비슷한 연대의 탄화미가 출토되었다. 그 뒤 1981년에 평양시 남경유적(南京遺蹟)에서도 비슷한 연대의 탄화미가 다른 잡곡과 아울러 발견되었다 한다. 또 전라남도 나주에서 채취한 벼꽃가루를 분석한 결과도 약 3,500년 전의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벼의 재배가 적어도 3천년 이전에, 즉 청동기시대에 이미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경로도 북쪽을 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을 이루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도 행해졌다. 하지만 곡식의 이삭을 자르던 반달 돌칼을 비롯하여 돌도끼와 괭이 등과 같은 농기구들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농경의 발달로 인해 잉여생산물이 증가하자 수렵과 어로생활의 비중은 줄어들었고, 돼지, 소, 말 등의 가축 사육은 전보다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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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양동 선사유적지 제주 선사인들 삶 구현모습(좌: 밖, 우: 안).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주변에 하천이 있는 낮은 구릉 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취락 내에는 장인들이 전문적으로 일하는 공간과 대형 창고, 공동작업장, 집회용 건물들이 지어졌다. 5∼6명이 주거할 수 있는 장방형의 공간에는 한쪽 벽에 화덕과 저장용 구덩이가 갖추어져 있었다.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청동기 유적을 중심으로 석기시대부터 철기 시대까지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청동기 시대 제주의 선사인들의 정착생활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음 차에는 이번 설명한 한반도의 석기·청동기 시대의 농업을 척도로 구석기 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순으로 제주섬에서의 농경의 흔적들을 찾고자 한다.

※ 참고자료: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사계절(2015),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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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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