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총살 지켜본 13살 소녀, '그후 71년'..."억울합니다"
상태바
어머니 총살 지켜본 13살 소녀, '그후 71년'..."억울합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4.3 증언본풀이 마당 '그늘 속의 4.3'
4.3희생자 '불인정' 가족들의 눈물겨운 증언 이어져
133.jpg
▲ 29일 열린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 ⓒ헤드라인제주
"13살 나이에 어머니가 총살 당하시는 걸 지켜봐야 했고, 한 평생 고문 후유증을 앓으며 살아왔습니다. 저도 4.3희생자입니다."

제71주년 제주4.3을 맞아 29일 오후 제주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열여덟 번째 제주4.3증언본풀이마당에서는 4.3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한 가족들의 안타깝고 눈물겨운 사연의 증언이 이어졌다.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이사장 이규배, 소장 허영선)가 주최한 이날 증언본풀이마당의 주제는 '그늘 속의 4.3 그 후 10년, 나는 4.3희생자입니다'.

희생자로 불인정되거나, 후유장애인으로 불인정된 4.3 경험자 3명이 무대에 올랐다.

◆ "총살당한 제 아버지, 신고 철회 종용에, 위패 떼어져"

138.jpg
▲ 29일 열린 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 김낭규 할머니가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허호준 한겨레신문 기자와의 대담 형식으로 첫 증언에 나선 김낭규 할머니(1940년생, 조천읍 신촌리 출신)는 4.3당시 총살된 아버지(김대진)가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억울함을 전했다. 아버지 김대진은 무장대에서 간부급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저는 4.3당시 신촌국민학교 교사였던 김대진의 딸이다. 4.3이 발발하면서 아버지는 산에 있다가 총살당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가 총살당하고, 아버지까지도 총살되면서 남아 있는 삼남매는 고아로 외롭게 평생을 살아야 했다."

김 할머니는 당초 아버지를 4.3희생자로 신고했고,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위패를 모셨다고 했다. 그러나 4.3사업소 직원이 찾아와서 희생자 신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해에 4.3평화공원에 가보니 아버지의 위패가 떼어져 없어졌다.

김 할머니는 "직원이 찾아와서 철회 요구를 얘기한 후에 위패를 정말 떼어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 "위패가 없는 걸 보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버지 산소에 가서 울고, 집에 와서도 3일을 계속 울었다"고 말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고 항일운동도 했다고 들었다. 위패봉안소에 있던 아버지의 이름이 떼어져 없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억울하다 못해 우울증까지 겹쳐 있다. 저는 딸로서 아버지를 4.3희생자로 인정받는 날까지 계속 요구할 것이다."

"온달 같은 우리 어머니 반달 같은 날 두고 저승길이 얼마나 좋아서 가서 지금까지 안 돌아오나. 산이 높아 못 오시면 비행기 타고 오고, 물이 깊어 못 오시면 낚시배라도 타고 오세요" 증언 말미, 어머니가 보고싶어 남몰래 지어불렀다는 노래 가락이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객석에 있던 몇몇은 울음을 터뜨렸다.

◆ "4.3당시 다친 상처에도 '불인정', 국가가 나를 의심..."

137.jpg
▲ 29일 열린 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 강양자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4.3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의 대담으로 두번째 증언에 나선 강양자 할머니(1942년생,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출신).

강 할머니는 외가인 광령리에 있을 때 4.3을 맞았다. 어린 나이였던 강 할머니는 당시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찾으러 할머니와 함께 비오는 밤에 나갔다가 넘어져 돌에 크게 부딪혀 허리 부상을 입었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콩알만한 뼈가 튀어나왔다고 했다. 허리가 휘어진 채로 성장기를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1948년 4월에 총살을 당했다. 외할머니는 1949년 2월, 외삼촌은 1949년 1월에 총살을 당했다고 했다.

악몽과 같은 기억 속에서 70년 세월을 살아온 강 할머니의 마음을 더욱 찢어놓은 것은 4.3후유장애인 '불인정' 통보.

강 할머니는 4.3후유장애인' 신청을 했다. 그러나 국가는 그녀에게 '불인정' 통보를 했다. 재심의와 행정소송까지 했지만 모두 불인정됐다.

"후유장애다 뭐다 하는 걸 왜 거짓으로 신고하겠습니까? 신고하라고 해서 한 것인데 불인정이다 뭐다 하니까 정말 야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가 나를 의심하는구나' 그런 생각부터 앞섭니다."

◆ "물고문.전기고문, 눈 앞에서 어머니 총살, 그런데..."

136.jpg
29일 열린 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 정순규 할머니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오화선 제주4.3연구소 자료실장 대담으로 세번째 증언에 나선 정순희 할머니(1935년생, 서귀포시 강정출신).

강정동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정 할머니는 70년 세월이 흘렀어도 4.3당시의 악몽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13살 어린 소녀였던 정 할머니는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이유 때문에 언지와 함께 법환지서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경찰은 어린 자매에게 오빠에게 밥 나르고 있다고, 오빠를 어디에 숨겼냐고 하면서 두꺼운 끈으로 다리와 허리, 가슴과 팔을 결박하고선 문짝에 묶고 고문을 가했다.

"거꾸로 세워놓고 콱콱 찍어, 큰 주전자에 고춧가루 푼 물을 코로 입으로 붓는 겁니다. 들이마시다 보면 이제 죽는구나 싶을 만큼 숨이 막혀, 바른 말 하라며 쇠꼬챙이를 이 사이에 집어넣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해, 그때부터 오랫동안 이 두개 없이 살았습니다."

"막대기에 줄을 다리에 묶어서 쇠꼬챙이에 콱콱 허벅지며 등을 막 찌르면 '찌르륵 찌르륵' 했는데, 고름도 비글비글 나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줄도 까맣고 전기고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 할머니의 어머니는 1948년 12월 서북청년단에 붙잡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 총살을 당했다고 했다. 정 할머니 자매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총살 장면을 지켜봤다.

"저하고 언니하고 어머니하고 셋이 (서북청년단에) 잡혀가서 줄줄이 앉았는데 모두 쏘겠다고 했다. 한 사람이 '아이고 이 애들은 아무 죄 없는 데 쏘지 말라' 해줘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서북청년단은) '눈 크게 뜨고 저 사람들 보라'며 어머니와 같이 있던 사람들을 쏘아 죽였습니다."

정 할머니는 4.3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심하게 앓아왔는데, 그 역시 4.3후유장애로 인정받지 못했다. 신청을 했으나 불인정됐다.

"세월이 오래 지나 고문 받은 흔적이 별로 없다면서 인정받질 못했습니다. 내 몸은 죽어지는데 말입니다. 작년에 진단서를 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70년 넘은 것을 누가 끊어주겠습니까? 그냥 돌아왔습니다."

132.jpg
▲ 29일 열린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 ⓒ헤드라인제주

이날 증언본풀이마당의 '그늘 속의 4.3 그 후 10년'이란 주제는 2009년 개최한 '그늘 속의 4.3'이란 증언본풀이마당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도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이면에는 그늘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전하고 있다.

제주4.3연구소 이규배 이사장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전개된 4.3진상규명운동은 30년을 넘었는데, 제주4.3은 그동안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진전이 있어왔다"고 전제, "그러나 그 과정에서 4.3평화공원에 모신 위패가 자의에 의해, 또는 타의에 의해 철회되고, 4.3 당시의 후유증이 분명한데도 이를 인정해주지 않아 불인정자로 남아있다"며 이번 본풀이 증언의 의미를 설명했다.

제주4.3연구소는 지난 2002년부터 해마다 4.3증언본풀이마당을 열어왔다. 증언본풀이마당은 4.3체험자들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당으로, 마음속에 쌓여온 기억을 풀어냄으로써 자기를 치유하는 ‘트라우마의 치유마당'이다.

이를 통해 4.3의 진실을 후세대들에게 알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헤드라인제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