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준다 해서 왔는데"...'간첩죄' 누명 옥살이 16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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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준다 해서 왔는데"...'간첩죄' 누명 옥살이 16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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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군사재판 4.3수형인 재심재판 이틀째 집중심리
"영문도 모른채 감옥살이...너무나 원통하고 억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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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수형희생자들이 27일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헤드라인제주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감옥에 갔죠. 살려준다고 해서 산에 숨어있다가 내렸왔는데, 열 아홉살에 '간첩죄' 누명을 썼죠. 폭도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폭도 3년'이라는 소리만 듣고 감옥에 갔어요."

70년 전 불법 군사재판에 의한 무고한 양민에 누명을 씌워 불법 체포.투옥한 사건에 대한 제주4.3수형인 재심재판의 집중심리가 26일에 이어 27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속개됐다.

전날 10명의 4.3수형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가 진행된데 이어, 이날 7명이 출석했다. 총 18명의 재판재판 청구인 중 1명은 건강상의 문제로 출석하지 못했다.

제주4.3 당시 행해졌던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계엄 군사재판(군법회의)으로 모진 옥고를 치렀던 4.3수형인들.

'내란죄'와 '간첩죄'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으로 형무소에 투옥됐던 이들의 당시 연령대는 10대 후반 소녀.소년에서부터 20대 청년이었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제갈창 부장판사)의 심리로 진행된 이날 공판에서도 당시 18살, 19살의 소녀들이 '간첩죄'로 누명을 씌운 4.3의 비극적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검찰측 피고인 심문에 나선 박순석 할머니(90).

박 할머니는 스무살이던 1949년, 일본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통역해주는 국제통역 일을 하다가 산으로 피신 가 생활하다가 2연대 군인들에게 잡혔다고 했다.

제주시내 부두가 쪽의 주정공장에 갇힌 후, "바른대로 말 안하면 얼굴을 반으로 쪼개 버리겠다", "너 같은 것은 총알이 아까워 몽둥이로 때려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모진 고초를 당했다고 했다.

영문도 모른채 그해 7월 형무소에 가서야 자신이 국방경비법의 간첩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것을 알았다고 했다.

이날 검찰측 심문에서 박 할머니는 검찰이 "당시 경찰에 잡혔을 때 경찰이 뭐라고 했나?"라고 묻자, 격앙된 어조로 "무조건 폭도년이라고 했다. 가슴에 총을 대고 입에 담지도 못할 모욕을 했다. 억울하다. 명예회복이라도 됐으면..."라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재판이라고 할게 없었다. 너는 몇년, 너는 몇년만 했지. 당시 10여명이 같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했다"면서 "'폭도 3년'이라는 소리만 듣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감옥에 갔다. 누명 썼다. 폭도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현우룡 할아버지(93)의 진술이 이어졌다.

현 할아버지는 군경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면서 자신의 집도 불에 타버리자 산에 숨어 살다가 5.10 투표일 날 투표를 하러 내려왔다가 오라리 헌병대에 붙잡혔다고 했다.

"고문받고 서문통 극장 했던 소금창고를 거쳐 칠성통 헌법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개 패듯 두들겨 맞고 물고문도 받았다. 산에 간 것이 빨갱이짓 하러 간 것이라고 했고, 안 했다고 하면 때리고 또 때렸다. 세번이나 기절했다. 기절하면 물 뿌리고 깨어나면 또 때리고, 잘도 맞았다. 재판도 받았지만 뭐가 뭔지도 모른다. 이름 부르고 뭐 방화라고 했던 것 같다."

검찰측의 질문에 현 할아버지는 "산에서 4개월 정도 살았는데, 산사람들을 만난 적은 없었다. 등에 메고 간 식량으로 연명하며 숨어지냈다"면서 "산에서 내려오니 경찰들이 사람 죽였냐, 무장대에 돈줬다고 물어봐서 끝까지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고 하니까 더 때렸다"고 진술했다.

당시 18살이던 오영종 할아버지(88)는 4.3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남원읍 한남리에 살고 있었는데, 마을이 불에 타면서 산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나중에 와보니 집은 완전히 불에 타 있었고, 거동이 불편해 도망가지 못한 할아버지는 총에 맞아 숨져 있었다. 마을에 있으면 자신도 죽을 것 같아 또 산으로 도망쳤다가 이듬해 봄에 토벌대에게 잡혔다고 한다.

붙잡히면서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는 "부상을 입은 저를 동네 사람들이 부축해서 토평리로 내려왔는데, (토벌대는) '총 맞은 놈 뭐하러 데려왔나' 하며 장작으로 팼다"면서 "이후 제주시 주정공장으로 옮겨졌는데, 재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 부르고, 주소까지 대답한 것 같다. 대구형무소에 가서야 형량 들었다"고 말했다.

18살 소년인 그 역시 '간첩죄'로 징역 7년6개월을 선고받고 억울한 감옥생활을 했다.

박동수 할아버지(85)는 당시 지금의 중학생 나이인 16살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었다. 1948년 11월쯤, 애월읍 소길리서 추수한 곡식 밭아 묻어두고 내려오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도망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고 했다.

얼마 후 자신도 군인들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군인들은 악질폭도를 잡았다고 했다. 배운 것도 없는 어린 나를 두고 악질 폭도라니 어이 없었다"면서 "제주시 농업학교 막사에 갇힌 후 무지막지하게 맞았다"고 했다.

이 어린 소년에게도 당시 군법회의에서는 '간첩죄' 누명을 씌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양근방 할아버지(85)도 당시 16살 소년이었다. 소개로 인해 방목하던 소와 말이 걱정되어서 집에 가서 형님과 형수님과 저녁밥을 먹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쏜 총에 형님과 형수님은 즉사했다고 한다.

양 할아버지는 "저도 허벅지에 총 맞았으나 도망갔다. 숨어 지냈지만 춥고 배가 고파 함덕 헌병대에 자수했다"고 말했다.

자수하면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군인들은 빨갱이라고 하면서 죽이려 했다고 한다.

그는 "헌법대에서 많이 맞았다. 묻는 말에 원하는 답을 못하면 밤새도록 때렸다. 엄지손가락에 전기 줄을 묶어 전기고문을 했다. 죽을 것 같았다"고 피력했다.

양 할아버지는 "재판은 없었는데, 인천형무소로 가니 형무관이 5년, 7년 하면서 형량을 불러줬다. 내가 왜 징역 7년이냐고 물으니 형무관은 서류가 넘어왔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억울한 옥살이를 호소하며, 이번 재심재판으로 명예를 꼭 회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인 할머니(84)는 당시 만으로 17살 소녀였다.

김 할머니는 당시 4.3의 회오리를 피해 가족들과 산에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부모님과 동생은 산에서 내려가고, 자신은 젊은 사람은 내려가면 죽여버린다는 소문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고 동네 사람들과 산에서 지냈다고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소문을 듣고 동광양 군인초소에 내려왔다. 그런데 군인들은 자신을 체포하고 서문통 창고에 가뒀다가 다시 동척회사로 끌고갔다.

"동척회사에서 '산에서 뭐 했나?'는 취조를 받았다. 재판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살려준다고 해서 내려오니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당시 국방경비법 간첩죄 누명을 쓰고 투옥됐다.

김순화 할머니(83)는 16살 때였다. 오빠들이 1948년 12월 산으로 숨었다고 '폭도 가족'으로 몰려 가족들이 잡혀갔는데, 자신은 산으로 피신했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1949년 4월까지 숨어 지내다가 계엄도 해제되고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해서 함덕으로 내려왔는데 잡아가뒀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조사를 받으면서 '부모님은 총에 맞아 학살되었다고 마하자 경찰은 제 뺨을 때렸다"면서 "아마도 이 말 때문에 형무소 간 거 같은데, 서대문형무소로 가뒀다"고 말했다.

70년간 이 이야기는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왔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이 말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 못했다. 자식들에게도 말 안했다. 이제 재판도 하니 말을 해야겠다. 억울한 것은 바로 잡아야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재심재판을 받은 4.3수형 생존자들은 1948년 12월 제주도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1차 군사재판)에서 구형법의 내란죄위반, 1949년 7월 고등군법회의(2차 군사재판)에서 국방경비법의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죄, 이적죄 등의 죄명으로 최소 1년형부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피해자들이다.

26일에는 내란죄 누명으로 투옥됐던 피해자들, 27일에는 간첩죄 누명을 받은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가 진행됐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군.경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최소한의 적법한 절차도 없이 행해진 '초사법적 처형'으로 투옥돼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이후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속에서 평생의 한을 가슴에 묻고 살아오다, 이번에 제주4.3도민연대의 적극적 도움을 받아 구순을 넘긴 고령으로 '재심'을 청구해 70년만에 정식 재판을 받게 됐다.

재심재판은 이번에 이틀에 걸친 집중심리가 마무리됨에 따라 12월 17일 한차례 더 공판을 진행할 예정이다.

재판부는 총 3차례 공판을 거친 뒤 판결문 작성 등 절차에 들어가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올해가 지나고 바로 선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심청구소송에서 법원이 당시 재판기록이나 판결문 등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가지 정황들을 볼 때 재심사유가 충분하고, 불법 구금과 조사과정의 가혹행위 실체가 인정된다고 밝힌 만큼 이번 재심재판에서 수형인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질 가능성은 매우 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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