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만에 법정진술 4.3수형인, "정말 원통...죽고싶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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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만에 법정진술 4.3수형인, "정말 원통...죽고싶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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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군법회의 4.3수형인 재심재판, 통한의 '눈물'
19살 소녀에 '내란죄' 누명..."억울함 풀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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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수형희생자들이 재심소송 첫 심문기일인 26일 제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헤드라인제주
제주4.3 당시 행해졌던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계엄 군사재판(군법회의)으로 모진 옥고를 치렀던 제주4.3 수형인들.

형무소에 투옥될 시점 이들의 나이는 10대 후반 소녀.소년에서부터 20대 청년이었다.

그로부터 7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의 연령은 어느 덧 대부분 구순을 넘었다.

70년 전 불법 군사재판에 의한 무고한 양민에 누명을 씌워 불법 체포.투옥한 사건에 대한 제주4.3수형인 재심재판의 집중심리가 26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재판에는 김평국 할머니(88)를 비롯해 현창용, 오희춘, 부원휴, 오계춘, 조병태, 양일화, 박내은, 임창의, 한신화 등 10명이 출석했다.

이들은 4.3당시 영문도 모른채 군.경에 끌려가 1948년 12월 제주도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구형법의 내란죄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육지부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제갈창 부장판사)가 맡은 이날 공판은 검찰측 심문과 변호인측 반대심문으로 진행됐다. 검찰측은 피고인인 4.3수형희생자 개개인을 상대로 공소 사실을 특정하기 위한 질문을 했다. 

법원은 수형희생자들이 고령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점 등을 감안해 이례적으로 피고인석 앞에 의자를 배치했다. 피고인들이 검찰측과 변호인측의 질문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원활한 심문을 위해 제주어 통역인까지 피고인 옆에 배석해 의사소통을 도왔다.    

먼저 김평국 할머니에게 질문이 이어졌다.

김 할머니는 19살이던 1948년, 제주시 아라리(아라동)에서 생활하다가 마을이 불에 타면서 삼도동으로 피난을 왔다가 연행돼 군사재판에서 당시 형법 77조(내란죄) 위반으로 1년형을 선고받아 전주형무소에 투옥됐다.

중산간 지역에 살던 사람이어서 끌려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검찰이 출신지에서부터 피난을 오게 된 경위, 당시 경찰의 고문.폭행 여부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다.

김 할머니는 담담하게 "아라리에서 살다가 4.3이 터지면서 남문통(이도동)으로 피신했는데 거기서 경찰들에게 붙잡혔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당시 무장대를 도와주거나 망을 보거나, 물건 운반 등을 한 적이 없다고 설명한 후, "(경찰에)나는 그런적 없다고 대답했느데, 그 사람들(경찰) 술 한잔 먹고 와서 때리기만 하고..."라고 말했다.

변호인측 반대신문에서 김 할머니는 "19살 아가씨였는데, 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문을 당했다. 고문 이후에도 몸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또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할 때 석방증을 한장 주며 배타고 가라고 했는데, 정말 참담했다"면서 "우리 어머니가 동동 기다리고 있어서 돌아왔다. 너무 괴로웠다. 멀쩡한 아가씨가 형무소 석방증 받고 배를 타야 한다는 게..."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할머니는 "살고 싶지 않았다. 형무소에 억울하게 갇혔던 그 생각을 하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는데, 어머니 때문에 돌아왔다"면서 "나중에는 전과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저 사람들 내 흉보겠구나'생각하면서 70년 동안 살았다"고 울먹였다.

김 할머니는 법정에 들어서기 전에도, "어린 나이에 잡혀 감옥살이, 정말 억울하다. 이제라도 한 풀고 갈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현창용 할아버지(86)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현 할아버지는 16살이던 1948년 9월 26일 새벽 2시쯤, 잠자는 집에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혀갔다고 한다.

월랑부락 토벌대 사무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자기들이 작성한 조서에 지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매 맞고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죽다 살아났다고 했다. 그 후 내란죄 죄명으로 인천형무소에 수감됐고, 전쟁이 터진 후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현 할아버지에 대한 심문은 원활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의사소통이 어려워 검찰 심문이 중지됐고, 변호사 반대심문도 이뤄지지 못하면서 안타까움을 샀다.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한달 전까지만 해도 더듬더듬 하면서 의사소통이 가능했는데, 오늘은 옆에 보조해 주는 사람이 있어도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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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수형희생자들이 재심재판을 받기 위해 제주지법 안으로 이동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세번째로 박내은 할머니(87) 증언이 이어졌다.

박 할머니는 1848년 11월 15일 군경토벌대가 표선면 가시리 마을을 불태우자 산으로 피신해 오름 등지에서 숨어 살았는데, 남원면 지경 토벌대에 발각되어 12월 11일쯤 서귀포로 끌려가 창고에 갇혔다.

이후 제주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서에서 매를 많이 맞았고, 전기고문도 많이 당했다고 했다.

그런 끝에 내란죄 위반으로 전주형무소로 이송돼 수감됐다. 그때 나이 17살이었다.

박 할머니는 검찰측 심문에서 당시 경찰이 무장대를 위해 망을 보거나 돈을 주거나 물건을 운반해준 것이 없느냐고 물었느냐고 묻자, "들은 적 없다"고 말했다.

당시 무슨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박 할머니는 "경찰에 끌려가서 거의 죽도록 맞았다. 뒤로 묶여서 천장에 매달려 몽둥이로 맞았다"면서 "정신을 잃어서 늘어지니까 한 겨울인데도 냉수를 부어서 정신을 차리게 했다. 팔목 뼈, 허리 뼈 부러져서 아파서 잠을 못 잤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박 할머니는 "(형무소 출소 후에도) 계속 통증 주사를 맞는데도 너무 아파서 잠을 못자고 밖으로 서성인 적이 많다. 고문 기억이 계속 떠올라서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검찰이 계속 심문을 이어가자, "지금 얘기한거 외에 더 덧불일 말은 없다. (귀가 잘 안들려서) 말을 잘 못알아들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법정에 들어서기 전 가진 포토타임에서 "전 아무 죄도 없다고 해도 계속 죄인이라고 하니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지금도 억울하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꼭 밝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부원휴 할아버지(88)도 70년만의 재판을 받았다.

부 할아버지는 제주농업학교 5학년인 1948년, 제주시 화북 거로마을에 거주할 때 끌려갔다고 했다.

학교 갔다 와서 집에 있는데 군인 2명이 찾아와 물어볼 것이 있다며 군 부대막사에 끌려갔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야전 침대봉으로 때리고, 전기줄을 손가락에 감아 고문했다고 했다. 조서도 군인들이 작성한대로 해서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내란죄로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아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날 검찰심문에서 부 할아버지는 "당시 학생증을 제시했는데도 '삐라'를 뿌렸느냐, 산사람(무장대)과는 연락했느냐고 추궁하며 고문을 했다"고 진술했다.

오희춘 할머니(85)도 당시 17살때 서귀포시 하효동에 살 때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내란죄로 전주형무소에 투옥됐다고 진술했다.

그는 "동네 해녀 모집을 하는 오00씨가 와서 육지 물질 가자는 서류를 내밀었고, 육지 물질 가는 줄 알고 도장을 찍었다"면서 "이것이 사단이 되어 잡혀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오 할머니는 "형무소에서 출소한 후 어린 처녀가 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사실로 인해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면서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억울하게 보낸 세월이었다"고 토로했다.

오계춘 할머니(93)는 1948년 11월 남편이 집에 오지 않자 8개월된 아이를 없고 집을 나섰다가 경찰에 잡혀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했다.

이후 모진 고초를 당한 후 내란죄로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는데, 전주로 갈 때 데리고 갔던 아이가 배에서 죽었다고 했다.

오 할머니는 이날 법정에 들어서기 전, "죽은 아이를 묻어줘야 하기에 경찰관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경찰은 길가에 그냥 두라고 했다"면서 "참으로 억울하고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런 기막힌 이야기는 지난 세월 말도 못했고, 자식들에게도 말을 안했다"면서 "4.3희생자 신고도 한참동안 안했었다. 이제는 모든게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죄가 뭔지도 모르고..."라고 피력했다.

조병태 할아버지(89)는 4.3당시 전신주 보수공사에 동원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온 후 법환지서 경찰에 끌려갔다고 했다.

그는 "매를 하도 많이 맞았고, 고문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면서 "형무소 갈때에는 입은 옷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했다.

양일화 할아버지(89)는 1948년 11월 제주읍에 있는 백부댁으로 피난을 갔다가 제주시 서문다리 쪽에서 대한청년단에게 잡혔다고 한다.

양 할아버지는 "중산간 마을 금악에서 제주시로 피난 왔는데, (청년단은) 무슨 이유가 있어 제주읍에 왔냐고 하면서 바로 빨갱이로 몰아넣었다"면서 "고문도 실컷 받고 나중에 보니 제주경찰서에 잡혀와 있었다"고 말했다.

내란죄로 인천형무소에 수감된 후 전쟁 발발로 부산수용소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영천수용소 등으로 끌려다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임창의 할머니(97)는 올해 5월에야 4.3희생자 신고를 했다고 한다. 70년간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70년 세월 침묵을 해온 임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이 수형인 명부에 ㅣ록된 사실에 놀랐다.

4.3조사 연구원의 방문을 받고도 믿기지 않았던 임 할머니, 다 잊고 산 세월이 언제인데, 아직도 죄인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싫어서 희생자 신고도 안하고 자식들에게도 함구했다고 한다.

임 할머니는 "70년 세월, 잡혀갈 때도 이유 없이, 잡혀가서도 재판도 제대로 받지 않았는데, 결국 전주형무소에 수감도어 죄인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이제는 정말로 억울함 풀고 명예회복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신화 할머니(96)는 1948년 11월 군경토벌대에 의해 표선면 가시리 마을이 불에 탈 때 어린 아이를 업고 산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 잡혔다고 했다.

한 할머니는 "둘째 아들과 함께 잡혔는데, 의귀리를 거쳐 서귀포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으면서 장작으로 패고, 전기고문 등으로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아이는 결국 고아원에 맡겨지고 자신은 전주형무소로 끌려가 수감됐다고 한다.

한 할머니는 "나중에 형무소에서 나와 아이를 찾으러 고아원에 갔지만, 죽었다는 소리에 넋 나가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이날 법정에서는 4.3수형인들의 통한의 진술이 계속됐다.

이번 재심 재판은 이날을 시작으로 27일과 12월 17일 3차례 진행된다.

27일에는 1949년 7월 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의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죄, 이적죄 등의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른 나머지 8명 중 7명에 대한 심리가 진행된다. 1명은 건강이 안좋아 출석을 못하게 됐다.

재판부는 3차례 공판을 거친 뒤 판결문 작성 등 절차에 들어가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올해가 지나고 바로 선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재심을 청구한 18명의 4.3수형 생존자들은 4.3 당시 영문도 모른채 군.경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최소한의 적법한 절차도 없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던 계엄 군사재판에 의해 투옥돼 우여곡절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속에서 평생의 한을 가슴에 묻고 살아오다, 이번에 제주4.3도민연대의 적극적 도움을 받아 구순을 넘긴 고령으로 '재심'을 청구해 70년만에 정식 재판을 받게 됐다.

재심청구소송에서 법원이 당시 재판기록이나 판결문 등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가지 정황들을 볼 때 재심사유가 충분하고, 불법 구금과 조사과정의 가혹행위 실체가 인정된다고 밝힌 만큼 이번 재심재판에서 수형인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질 가능성은 매우 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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