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책자발간 편집 후기
상태바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발간 편집 후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헤드라인제주가 6월 민주항쟁 20주년에 즈음해 특별기획한 <타는 목마름으로>의 첫편이 보도되었던 날, 많은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화자찬 같다는 쑥스러움이 있으나 사실 "잘 읽었다", "정말 좋았다"라는 격려전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경험하지 못했던 후배들에게는 생소하고 신기한 무용담으로 전해졌고, 선배들에게는 잊혀져가던 기억의 되살림으로 다가온 듯 했습니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 노래는 6월항쟁 이전시기에 많이 불려졌던 <타는 목마름으로>입니다. 광주항쟁에서 보여주듯, 총칼로 국민의 인권을 짓밟고 정권유지를 위해 천인공노할 만행을 서슴치 않았던 전두환 정권 시절, 이 노래는 청년학생과 재야인사에게는 한줄기 희망이자,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제주대학교 학생회관 앞에서 이 노래가 울려퍼질 때에는 숙연함이 가득했습니다. 옆 사람과 손을 교차해 잡고 부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987년 '4·3대자보'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석방된 송영란 당시 총여학생회장은 중간시험 거부결의 성토를 하면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노래는 당시 비상학생총회에 참가했던 수많은 학생들의 가슴속에 감동으로 전해졌고, 서슬퍼런 칼날을 세운 정권에 맞서 투쟁의 한 길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기획보도 첫편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저편'에 드리워진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였던 듯 합니다. 몰래 숨어서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며 '나'보다는 '나라'를 걱정하였고, 청년학생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하여 고민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다시 다가왔던 것입니다.
'두려움'을 표출하며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일반적 사건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건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내면적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공안당국에 또다른 빌미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국가보안법, 그리고 수구세력이 판치고 있는 마당에 운동권진영의 비밀학습조직이었던 소위 '언더진영'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것에 대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해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2.
격려와 걱정, 그러한 가운데 어쨌든 특별기획 <타는 목마름으로>는 1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기획보도를 통하여 공개되었고, 그 결과를 한편의 책으로 담았습니다. 6월항쟁 20주년을 1년 앞둔 2006년 여름, 이 특별기획 준비를 위하여 논의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사건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정리할 것인지, 아니면 야사(野史)적 이야기 중심으로 써 나갈 것인지를 놓고도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론이 난 것은 객관화된 팩트를 모토로 해 야사적 이야기를 두루 수집하고 검증하는 방법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내자는데 모아졌습니다. 스토리는 '객관화된 사실'에 근거한 얘기를 의미합니다. 객관화된 사실은, 언론보도를 근거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제대신문>과 <제주신문>의 기사를 모토로 삼았습니다.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당사자 또는 관계자들로 하여금 검증받는 방식으로 기록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특별기획이 시작되기 전, 과거 제주의 민주화운동사를 담은 사료가 몇 있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료들은 제주 민주화운동사의 일반화된 사건을 그대로 기록화한 것에 불과해, 한 사건을 심층적으로 정리하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연구 및 조사방법과 시각이 다른 관계로, 누락된 부분이 많았고, 매우 축약적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따라서 특별기획은 앞서 설명한 신문보도 기사를 팩트로 하여 당사자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 스토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3.
전체적인 사건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사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반화된 것이 ▶1단계 태동기(1979년말-1985년 상반기) ▶2단계 성숙기(1985년 하반기-1987년 상반기) ▶3단계 고양기(1987년 6월항쟁 이후) 등 3단계로 구분화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구분은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흐름과 제주에서의 정치투쟁 흐름을 반영한 것입니다. 새싹이 돋아나듯 비밀리에 학습소그룹이 형성되며 학습과 논의가 이뤄지던 태동기, 그리고 소규모 인자를 중심으로 한 선도적 정치투쟁, 이어 '언더'가 아니라 '공개진영'이 주축이 되어 이뤄진 대중투쟁시기를 구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적 구분을 감안할 때 제주의 6월항쟁을 기획하는데 어느 시점부터 시작할 것인지가 중요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6월항쟁은 '1987년 6월'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성과와 시행착오 속에 단련되며 발전되어 온 그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대중적 시민항쟁으로 촉발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왔던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데모를 하니까, 제주에서도 데모를 한 것이다. 왜 6월10일에는 크게 데모를 하지 않다가, 6·29 선언 직전에야 일어섰느냐. 이런 핀잔을 내미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의 단절론적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주의 6월항쟁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역사적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1987년 6월 이전의 역사가 없었다면, 제주의 6월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런지 모릅니다. '6월나무'다큐멘터리에서 모 인사가 지적했듯이 제주 사람들은 전국적 '6월항쟁'에 그냥 무임승차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준비와 끊임없는 민주화투쟁의 정점으로 '1987년 6월'을 일궈낸 것입니다.

따라서 제주의 6월항쟁을 살펴보는데에는 더없이 중요한 것이 '대중적 항쟁'을 일궈낼 수 있었던 역사적 과정입니다. 그 대표적 촉발점이 바로 <1편>에 소개된 1985년 2월 광양초등학교 유세장 시위입니다. 졸업을 일주일 앞둔 장은심, 김옥임, 오옥만 3명이 주도해 벌인 이 유세장 시위는 제주 민주화운동사에 있어 더없는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무섭게만 여겨졌던 곳을 과감히 뛰어든 촉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들의 투쟁을 지켜본 한 인사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길을 가는데 어떤 낭떠러지가 있어요. 그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면 길이 있을 것 같았어요. 높이를 가늠해 보니 뛰어내리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누군가 그곳에서 직접 뛰어내려 보았어요. 그런데 막상 뛰어내려 보니 약간 다쳤을 뿐, 죽지는 않았거든요. 그 첫 사람이 뛰어내린 경험은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주게되죠. 장은심, 김옥임, 오옥만 3명의 광양초등학교 유세장 시위는 후배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계기가 된 것이죠. 이 사건 때문에 그 이후 많은 '용기있는 투쟁'이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사실 그랬습니다. 혹자는 이 사건을 아주 미미하고 어설펐다고 할지 몰라도, 학생운동의 불모지였고 총칼로 군림하던 군사독재정권 시대에서 이 3명의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비밀리에 골방에 모여 성토하던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를 처음으로 대중적 공간에서 표출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 학생운동 소그룹 언더진영은 정치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1985년 5월에는 제주대 4학년 학생들인 김계완 강수경 한연희 강양희 강정희 등 5명이 5월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1980년대 들어 제주에서는 처음 페퍼포그와 최루탄이 등장하였습니다. 최루탄을 쏘며 시위학생 진압에 나선 경찰에 맞서,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 시위는 광양유세장 시위가 끝난 후 준비되어졌습니다. 언더진영에서 4학년을 중심으로 '결의'할 사람을 모았고, 마침내 결의한 소위 '5인방'이 이 시위를 주도하게 된 것입니다. 2월의 광양유세장 시위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 시위는 불가능했을런지 모릅니다. 처음 81학번 여학생 3명이 '용기'를 보였기 때문에, 82학번들이 뒤를 이어 이같은 정치투쟁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어느정도 보장되어 있는 현 시점에 비춰볼 때 1985년 당시 시위를 왜 그토록 어렵게 준비하고, 간헐적으로 일궈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시 시위는 '나'를 버리고 '대의'를 위해 결의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선도적 정치투쟁이었습니다. 5월 시위가 열리기 하루 전날, '5인방'이 한자리에 모여 다음날 시위계획을 점검할 당시, 주도자 중 한명인 여학생이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뇌에 찬 결단이 필요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평범하게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졸업 후 좋은 직장 얻고 싶은 원초적 욕망이 있는 법인데, 그러한 욕망을 완전히 벗어던져야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한번 잡히면 경찰에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던 시대적 상황, '빨간줄' 한번이면 인생을 망친다는 사회적 분위기, 이러한 상황들이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앞선 투쟁들이 있었기에 이후 '대중적 투쟁'의 기조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1985년 상반기 투쟁까지는 소위 '언더'진영을 중심으로 극비리에 계획되고, 결의한 소수에 의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태동기'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4.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렸는데도 큰 부상없이 보다 나은 길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지는 것을 직접 확인한 후, 뒤따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비유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주대 학생운동 역시 그랬습니다. 1979년 후반, 혹은 1980년 초반부터 은밀히 이뤄져온 '언더'진영의 학습논의는 1985년 2월 광양유세장 시위와 그해 5월 광주학살진상규명 시위를 계기로 해 수면위로 부상하는 전환점을 만듭니다.

급기야 '언더'조직에서만 활동하던 학생들이 총학생회라는 공개된 기구를 통하여 학생운동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하였고, 결의한 소수 선도적 투쟁가들만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 즉 대중들의 참여도 크게 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985년 겨울에 치러진 1986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학생들이 박희수 후보와 연대해 선거에서 승리하고 이듬해 출범한 총학생회에 3명의 운동권 진영을 집행부로 입성시킨 일은 '언더'중심에서 '공개'중심으로 전환시키는 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제주 학생운동은 숨어서 논의하고, 숨어서 활동하던 시대에서 '공개적 대중운동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터져나온 제주대학교 당국과 경찰 등 공안당국이 만들어낸 운동권 학생의 학생회진출 방해공작과 무더기 제명처분, 무더기 수배 등과 같은 탄압정국은 학생운동권 진영을 중심으로 대중참여를 더욱 넓히고 민주화 운동 대오를 오히려 강철과 같이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탄압이 심해지면 질수록, 이에대한 저항의 강도 또한 더해 갔습니다. 특히 1986년 12월, 수배 중이던 고창후, 황인호 등이 주도가 된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은 공안당국과 학교당국의 노골적인 탄압이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정치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국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1987년 4월, 제주대학교 총여학생회의 '4·3대자보사건'은 제주대 학생운동이 '선도적 투쟁'에서 '대중적 투쟁'으로 확실히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십여일에 걸친 이 싸움에 학생 수천명이 매일같이 참여했습니다. 학생운동의 역사가 짧은 제주에서 수천명이 결집한 투쟁을 일궈낸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두달 후인 1987년 6월 대규모 대중투쟁을 일굴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언더'진영 주도로 이뤄져 온 각종 집회 및 시위는 공개기구인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물론 언더진영의 지도부들의 결정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학생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투쟁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공개 학생회와 언던진영 지도부에 1987년 6월항쟁에서 대규모 가두투쟁을 일굴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했고, 이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민주화운동사의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 6월21일부터 26일까지 이뤄진 제주에서의 6월항쟁은 다른지역과 달리 나름대로의 특성과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도적 투쟁'에서 '대중적 투쟁'을 표방하고 나선 학생운동권의 전환과, 4·3이후 억눌려온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제주의 6월항쟁은 우리 앞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6월항쟁의 주체는 당연 시민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직 '민주화'를 염원하며 싸우고 응원했던 '이름없는 민중'이 항쟁의 주역이었습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면서 거대한 함성을 일궈내고, 마침내 '6·29선언'이라는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언더진영의 지도부격인 정원태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같이합니다. 6월항쟁은 시민, 묵묵히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이름없는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있었기에 일궈낼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5.
이번 특별기획은 이러한 '민중적 관점'에서 볼 때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가 다소 시각적 상이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객관화된 사실을 모토로해 그 진행과정을 재정리하고자 할 때, 취재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사건 당사자와 관계자 중심의 취재가 이뤄지면서 많은 부분에 있어 이름없이 힘써온 이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습니다.
또한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도 꼭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상 그러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1984년 5월 홀로 횃불을 들고 "전두환 규탄"시위를 벌인 진희종 님의 이야기는 인터뷰를 사양하는 바람에 이 기획에서는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1985년 2월 광양유세장 시위의 주도자였던 장은심 님과 김옥임 님의 경우 이번 특별기획에서 직접적 인터뷰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1985년 5월 광주학살 진상규명 시위의 주도자 중 강수경과 한연희, 강양희, 강정희 님 역시 직접적인 대면을 할 수 없었습니다. 1986년 5월 제민투위 시위 때 고창후 강성순과 함께 주도자로 나섰던 김현실 님 등은 특별기획 연재의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이 겸연쩍었던지 원활한 증언채록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 점 대단히 아쉽게 생각합니다.
1987년 6월21일부터 26일까지 매집회에서 이뤄진 시국대토론회에 참가한 시민들의 경우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어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담아내지 못하였습니다. 학생운동권은 아니지만,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해 남모른 노력을 해오신 송상용 님등의 이야기가 빠져있는 것도 아쉬움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첫 연재물인 [1편] <1985년 광양초등학교 유세장 시위>에서 부터 [16편] <1987년 '김윤삼 부상사건'과 '제주국본'결성>에 이르기까지 3년 가까운 시기적 범주 속에서는 민주화와 관련된 내용들을 누락시키지 않고 될 수 있으면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은 했으나, 일부 빠진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특별기획 기사에서 덧글을 통해 의견을 주신 분 중, 당시 신민당 제주도당의 반정부투쟁 활동에 대해서는 사료수집에 한계가 있어 대신 [9편] <박종철군 추모미사와 6·10 시국대토론회>에서 짤막하게 언급하였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덧글 중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일부 이견을 보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실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시대가 끝나고 신자유주의시대,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그 답을 선뜻 내리기도 애매모호한 점도 있었습니다. 6월항쟁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현재적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하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도 많았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특별기획은 집필되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인터뷰 제의가 있은 후에는 많은 고민을 한 듯 합니다. 혹, 이야기가 '자기자랑'으로 전락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겸손함'때문인지, 극구 사양을 했던 분들도 많았습니다. 앞서 말한 진희종님 외에, 1986년 제민투위 사건과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의 주도자인 고창후 님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쓰기까지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7편] <고창후의 항소이유서>는 [6편]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의 연재가 끝난 후, 급하게 만들어진 기획이었습니다. [6편] 보도가 나간 후, 모 인사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학생운동진영의 내부 학습자료로 쓰일 만큼 유명한 일화의 <항소이유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고창후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의 소지여부를 물었으나 "없다"는 말을 듣고 체념한 상황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제주대학교 도서관 자료실에 들러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발행된 학교 간행물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총여학생회 발행 기관지였던 <햇귀>라는 책 속에서 그 분이 직접 쓴 <항소이유서>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복사해온 자료를 옮겨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항소이유서의 내용처럼 정말 꿈을 현실로 만들며 열심히 살고 있는 분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치도 못했던 성과물은 1987년 6월26일 <서귀포 항쟁>이었습니다. 이날은 제주시에서 대규모 집회, 그것도 사상 최대인파가 결집한 집회가 열린 날이었기 때문에 사실 서귀포에서의 민주항쟁 내용을 세부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서귀포항쟁이 열릴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주시 집회에 참가하고 있었고, 학생 20여명만이 '지원군'형식으로 서귀포에 갔었습니다. 서귀포항쟁은 학생들이 아니라 그 지역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군 대중투쟁이었기에 그 의미를 높게 했습니다. 서귀포항쟁이 열렸던 매일시장 옆 놀이터를 찾아 당시 시위 주도자였던 이영일 님과 윤춘광 님을 만났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특히 이영일님이 전해 준, 경찰의 원천봉쇄망을 뚫고 가두시위를 일구는 그 일련의 과정은 마치 영화속 얘기와도 같았습니다. 성당 지하계단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출정가'를 부를 때의 그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할때 그 분의 눈시울은 뜨거워졌습니다.

1980년 5월21일, 빛고을 광주 금남로에서 총상을 입고 쓰러진 시민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부축하여 거리를 빠져나오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한쪽다리를 잃은 제주인 오용태 님의 이야기도 <뒷마당>에 실었습니다.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다 용기를 내어 주신 오용태님에게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암울했던 시절 '민주항쟁'의 주역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헌신적으로 싸워온 수많은 '이름없는 민중'이었습니다.
이번 특별기획에서 부족한 부분은 <제주민주화운동사 2편> 연재시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기획에서는 보다 철저한 준비와 내용검증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서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특별기획의 성공적 마무리를 위해 아낌없는 협조를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책자 발간을 위해 성원해주신 발간위원님들과, 제주특별자치도 자치행정국 관계 공무원분들, 그리고 김영훈 6월항쟁 20년 제주사업추진위원회 고문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기획 <타는 목마름으로>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사를 재조명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가득 담으면서 부족하나마 이 책을 내놓습니다.


2007년 가을

저자 윤철수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사진콘텐츠의 또다른 일부는 제주지역 6월항쟁 20주년기념사업회와 강호진, 양창용, 박희수, 고창후 등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수정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