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8) 평범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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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8) 평범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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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도 되기 전부터 어머니는 자주 전화를 해서는 2학기 등록금은 얼마냐? 언제까지 내면 될 거냐? 입에 달고 물어보셨다.

그리고 방학이 거의 끝에 닿은 일요일 저녁, 저녁을 챙겨 먹는 게 조금은 귀찮아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시큰한 땀내가 풀풀 나도록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소일하던 저녁시간에 어머니의 전화목소리를 들었다.

“언제꼬장 납부금 내민 델거니? 학교통장더레 은아네시디, 담아불렌 허마... 혼, 이백 만원 해사허크냐? 니, 납부금이영, 기숙사에 낼 돈이영 허민, 그마니 이서사허지?”
여전히 학비걱정을 시작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더운 여름 내내 땡볕에 나서서 일을 하느라 기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우면서도 차마, 묻지 못하고 말았다.

“아니, 엄마. 나, 납부금 용지 와신디, 등록금은 안내도 되크랑게... 저번에 학교에 전화행 물어볼 때, 선생님이 장학금 신청해주켄해신디.. 정말로 장학금 나완!...”
이유를 알 수 없는 시큰한 것들이 코끝에 대롱거리는 게 민망해 나는 며칠 전에 편지함에서 주워온 등록금고지서에 찍혀있던 숫자들을 떠올리면서 다다닥, 말을 건넸다.

“이이?... 아이고... 게난, 장학금 받아져시냐?... 아이고... 휘유...”
느닷없는 어머니의 목메임에 나도 목이 메고 말았다. 겨우 참고 있던 물방울이 몸을 버티느라 짚고 있던 상위의 손위에 툭, 하고 떨어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는 숨을 들이키며 어머니가 알아챌까 다급해진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기 전에 수습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눈물을 터트리면 나는 수습이 안 되는데...

“에이, 나 공부 막 잘행 받은 건 아니라... 기냥 장애인 장학금 그걸로 해신디 된 거...”
물먹은 코끝을 훔치며 머리를 굴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저렇게 못돼 먹은 소리다.

“아이고, 우리 윤미 게난, 장학금도 받고... 이녕냥으로 알앙, 어멍이 해주지 못 허는 거 다 해졈시냐, 게난... 기여...”
“참, 엄마. 나, 다음 달부터 일할곳 나올거 닮아... 그거 하잰허맨. 경해브난 나, 이번엔 휴학해사 헐 거 닮은디....”

“무사게?... 일 허지 마랑, 공부 허라... 허단거 해베샤 허주게...”
“응, 내년엔 다시 댕길 거... 우선 일 해보멩... 천천히 허민 되난. 걱정허지맙써.”

“기여, 잘 햄쪄... 알았져. 밥이영, 잘 먹으라이. 실펑 굶지 마랑...”
“예. 밥 잘 먹으멘. 걱정허지맙써.”

“알았져. 끊으라...”
“예. 알아수다.”

뜨거운 서러움에 눅진하게 절여진 채, 꾹꾹 눌러 담은 목 메임을 나도 어머니도 서로 모른 척, 어머니와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의 목 메임을 알은 체 하다가는 어머니보다 내가 먼저 목 놓아 장맛비에 터지는 봇물마냥 투두둑, 하고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울컥 임이 내 심장을 향해 가만 시선을 들고 바라다보기 시작하기에...

며칠 비를 쏟아내던 날씨가 맑아지면서 더위가 마지막인 듯 고집스럽게 열을 뿜어내던 오늘 하루도 어머니가 한라산 어느 중턱, 손바닥만한 그늘의 여유도 주지 않는 골프장 잔디밭을 누비며 땡볕과 함께 저물도록 누비셨을 모습이 눈보다 가슴에 어른거려 울컥, 심장이 토악질을 하려고 기회를 노려와 꿀꺽, 하고 숨을 삼켰다. 

칠순의 어머니는 더운 내가 확, 확, 오르는 골프장의 잔디밭을 누비며 약을 치고, 검질을 메고, 독한 농약을 쳐 어느 가수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시푸른 서귀포 앞바다의 넘실거리는 물결처럼 푸르른 육지의 바다를 유지하느라 20년 전에 얻은 허리 병으로 온전히 등을 세워 서지도 못하고 점점 더 휘어지고 무너져가면서도 여전히 그 일을 버리지 못하신다.

“엄마, 일 댕기지 마랑 병원에 갑써게!”

다 늙은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 생떼를 부려대는 온전치 못한 딸자식의 등록금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관절이 다 뭉글어 신경이 짓눌려 아픈 걸, 그래서 젊은 사내도 버거운 막일을 하기위해 한밤에 홀로 앉아 직접 부항을 뜨고, 쑥뜸을 뜨면서 살을 지진다. 하루라도 더 일을 할 수 있는 육신을 위해서...
그리고 파스를 더덕더덕 자그마한 몸뚱이에 겨울 속 옷 껴입듯이 한 겹 칭칭 감아 붙이고 새벽이슬을 밟으며 일을 나가는 어머니의 걸음을 나는 단 한 번도 막아서질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식으로서 부모를 봉양하는 게 당연하지만 나는 흰머리 성성하게 늙어가는 부모와 함께 부모의 봉양을 받으며 부모의 생명으로 나이를 먹었다.
그렇게 성장하고 나이가 드는 동안 내내 나는 하루, 한 시간, 단 일분도 부모의 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낫지 않는 고름 앉은 딱정이처럼 부모의 가슴을 늘 곪게 하는 자식으로 살게 되지는 않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늘 심장에 인을 지지며 살아왔다.

그래서 공부를 선택하게 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나이만 어른이 되어있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주어지는 기회 또한 없는 나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공부밖엔 없어 보인 게 사실 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뒤늦은 나이에 선택하게 된 공부는 내게 많은 기쁨을 주었지만 그와 더불어서 지나칠 만큼 넘치는 고민과 아픔으로 다가와서 늘 가던 길을 망설이게 했었다.
그것은 나날이 낡아가는 부모의 육신과 더불어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어린자식의 모습으로만 남아있는 나에 대한 서러움은 늘 부모 앞에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함께 늙아가는 자식으로서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들...

보수적인 세대의 문화 안에서 자란 나에게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들 이였지만 아무 기력 없이 휘청거리며 몇 걸음을 걷는 것에도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헐떡거려야 하는 나는 그저 나이든 부모의 손으로 차려놓은 밥상 앞에 마주앉아 꿋꿋하게 한 사발 가득 담긴 흰밥을 다 비우는 것만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뿐 이였다.

그렇게 살면서 내가 내 입으로 “어머니, 취직했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오늘....
어머니에게 “일하게 됐어요.”라고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 강윤미 객원필진



비록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의 큰 도리는 어림없다 해도 제 앞가림은 할 수 있는, 부모의 가슴에 늘 낫지 않을 고름 앉은 딱정이만은 되지 않을 수 있으면...


<강윤미 / 헤드라인제주 객원필진>

* 필자인 강윤미 님은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학년에 다니다 휴학 중입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강의실을 오가는, 그러나 항상 밝은 얼굴을 하는 강윤미 님의 모습은 아랏벌을 항상 훈훈하게 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게 돼, 아랏벌의 빈자리는 더욱 커 보이게 합니다.
그의 나이,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늦깍이로 대학에 입문해 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분입니다.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항상 직면해 있지만, 그는 365일 하루하루를 매우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강윤미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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